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87화 (87/131)

〈 87화 〉 Ep10. 국가가 무너지는 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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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화는 리무진을 타고 총리 관저를 찾았다.

수행원들을 줄줄이 대동하여 이범석 총리를 찾는 이화의 모습은 제국의 완전한 2인자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총리. 민의의 대표자. 그리고 독립운동의 영웅. 이범석 총리의 집무실에서 이화는 후배의 자세를 담아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아, 비선실세께서 오셨구만?"

"저를 놀리시는군요."

"괜찮아.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라면 안심이거든. 어서 앉게."

수행원이 차를 들고왔다. 투명한 녹색 빛깔의 녹차 향기가 총리의 집무실을 가득채웠다. 집무실의 소파에서 마주앉은 두사람이 정무를 논하기 시작한다.

이범석 총리가 말했다.

"내가 전에 이 실장을 두고 민주주의자라고 했었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액을 맞으며 샤를 드골의 전기를 읽고 계셨죠."

"헌데 이번에 폐하께서 내리신 황명을 보니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야."

그는 차를 마시며 황제의 비서실장을 노려봤다.

"자네 작품이지? 제국익문사."

"예. 각하."

"내각 관할의 중앙정보부를 황제 직속으로 옮기고 제국익문사로 고치라니? 한 나라의 정보기관을 세습직 권력자 밑에 두겠다는건가?"

"어차피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던가요?"

"이 실장 자네가 폐하를 등에 업고 선배의 권위로 휘두르니 그랬던거지 법적으로 따지면 엄연히 내 관할이었어. 김재필 부장도 내가 결정해서 임명한 인사였지."

"음지의 권력을 법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 뿐입니다. 정당한 법치주의를 위해서죠."

"이건 악법이야. 한 나라의 정보 권력이 세습직 권력자 손에 들어간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되겠나?"

"더 민주적으로 발전하겠죠."

이화의 태연한 대답에 이범석 총리가 분노하며 말했다.

"허튼 소리 집어 치우게! 황제 폐하의 직속 기관이 되는데 그게 어떻게 민주적인 기관이 되나?"

"정보기관은 비밀스러운 조직입니다. 하고 있는 작전도 비밀, 그걸 실행하는 사람도 비밀, 그것을 위해 쓰이는 예산조차 국가 기밀로 분류됩니다."

"그래서?"

"룰대로 싸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조직이거든요. 첩보전이란건 사회가 정한 룰을 벗어나 무차별적으로 이어지는 그림자 속 투쟁이니까요.”

이화가 부드럽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래서 정보기관은 한 나라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비밀 권력입니다. 무엇이든지 안 들키고 해낼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요. 그런 조직이 선출직 권력자 밑에 있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휘둘리겠죠."

"그건 민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정당한 변화일세. 비서실장."

"제 생각은 다릅니다. 미국을 보시죠. 닉슨이 무슨 짓을 했던가요? CIA 국장을 백악관에 불러서 FBI의 수사를 막으라고 외압을 행사했습니다. 자유진영의 선진민주국가가 그런 짓을 한겁니다. 표면에 드러난 비리만 이정도인데 뒤에선 얼마나 많은 짓을 했을까요? FBI라고 깨끗할까요? 총리님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이화는 총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민의의 대변자들은 선출직이라 선거에 민감하죠. 항상 유혹받을 겁니다. 정보기관에 자기 사람을 앉혀놓고 선거전이나 여론전에 동원해야겠다는 생각, 야당 후보들을 도청하고 약점을 잡고 싶은 유혹."

"황실의 직속이면 그런 일이 없을거다?"

"폐하는 선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세습직 권력입니다. 거기다 이 나라의 영웅이시죠. 막강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순수한 권력을 추구하고 계십니다.”

"자네를 민주주의자로 생각한 내 판단이 틀렸군."

"민주주의자라고 한 적 없습니다. 총리각하께서 넘겨 짚으신 겁니다."

"공포정치 없이 정의로운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해보겠다. 그게 민주적인 방법을 뜻하는 거 아니었나?"

이화는 차를 탁자에 내리며 말했다.

"공포정치는 없앨겁니다. 정의로운 방법은 쓰겠지만 그게 민주적인 방법을 뜻하진 않겠죠. 전 단지 정보기관이 외압 없이 자기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배일 뿐이니까요."

그리곤 이범석 총리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소련이 폐하의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저희들의 비밀 프로젝트까지 알아냈죠. 총리님께서도 관여하셨죠? 대한제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앞뒤가 바뀌었군. 내가 관여했고 자네가 참여한것 뿐이야."

"그러니 더더욱 제 말에 귀 기울이셔야 합니다. 대한제국의 첩보능력은 CIA보다 한 수 아래고 KGB에는 상대가 안되니까요."

그녀는 강조하여 말했다.

"대한제국의 영구적인 독립을 위해 제국익문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겁니다. 최고, 최선, 최대의 힘을 모아서 CIA를 능가하는 힘을 기르고 KGB를 막아낼만한 안보 능력을 구축할겁니다."

"그래서 중정을 황제 폐하의 직속 기관으로 만들겠다는거군."

"누구의 외압에도 휘둘리지 않는 절대적인 독립기관. 대한제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지키기 위한 수호자. 그것을 위한 힘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각하."

하지만 이범석 총리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 말했다.

"난 민의의 대변자야. 제국익문사가 괴물처럼 커지는걸 방관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폐하께서 친정을 하시는 건 어디까지나 국민의 지지 아래서 이루어져야 하네."

"그럼 이렇게 하시죠. 국회 하원에 정보위원회를 두고 제국익문사를 감찰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제국익문사의 장관은 폐하가 임명하시겠지만, 국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하죠."

"고작 그정도인가?"

"제가 노력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입니다."

이범석 총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영웅이 아무 말도 않고 노려본다는 건 싫어도 해주겠다는 뜻이니까.

'전 알고 있어요. 각하께서 폐하를 지지하시는 이유. 조선 민족의 영원한 독립. 그것을 위한 핵개발. 우리가 한 배를 탄 이유겠죠.'

그렇게 생각하던 이화에게 이범석 총리가 조건을 하나 더 걸었다.

"국내 정치엔 관여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특히 내 후배들을 건드리는 날엔 나 이범석을 적으로 두게 될테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총리님이 말씀하시는 후배. 장준호 주필을 비롯한 광복군 인사들일테다. 그들을 떠올린 이화는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언론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그쪽은 중정과 무관하니 안심하시죠."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다. 언론을 장악하는 힘은 중정이 아니었으니까. 돈 만지는 일에는 임명해 둔 전문가가 따로 있었다. 기자들은 예로부터 재물이 약이랬다.

8.15 암살 미수사건에 대한 여론의 대체적인 인식은 이랬다. 국민들은 저녁 날에 술을 마실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린이날 때도 그렇고 이번 전승기념일 행사도 중앙정보부가 암살 시도를 경고했다며?>

<일 잘하는 조직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당연한거지!>

<역시 경찰 놈들은 믿을 게 못 돼. 테러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건 역시 중앙정보부 뿐이라니까?>

물론 이런 여론은 중앙정보부가 의도한 것이긴 했다. 문세광의 암살 시도에 대한 정보를 속속들이 수사하여 경찰, 검찰, 언론에 뿌려댔으니까.

문세광이 자신의 여권으로 떳떳하게 입국한 사실, 그 과정에서 권총을 밀반입해왔지만 공항과 경찰 당국이 걸러내지 못한 점, 행사장에 권총을 미리 숨겨뒀지만 친위대와 경찰 모두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해버려 물을 먹인 것이다.

<무능한 경찰 새끼들. 하여튼 다 밥버러지들이라니까?>

이러한 인식은 50년대 경찰들의 살벌한 모습을 기억중인 이북지역의 사람들일 수록 더 심해서 경찰 조직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아 새끼들 정신머리가 분단국가 시절에 고착돼있디. 그딴 사상무장으로 어떻게 테러를 막갔어?>

중앙정보부를 제국익문사로 고치고 조직의 위치를 황제 직속으로 옮긴다는 독재적인 발상이 테러 방지라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었다.

11월 1일. 덕수궁에서 이화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꿔야 할 법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중앙정보부법, 정부조직법. 그리고 조선황실법의 몇 줄을 고쳐야겠죠."

신문을 읽으며 이연이 물었다.

"신민당 놈들이 순순히 허락해줄까?"

"이범석 총리님의 한국독립당 의석이 185석입니다. 당 내 강경파와 온건파 모두 총리님의 리더십으로 당심이 하나로 뭉치는 중이죠. 신민당은 막을 수 없을겁니다."

"그럼에도 막으려 든다면 어떻게 할 거 같나?"

"여론도 테러 방지라는 명분에 쏠려있는 지금.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제한적입니다. 기껏해야 국회 하원 본회의장을 점거해서 육탄방어에 나서는 정도겠죠."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놓고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떠올린 이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원하시는 그림이군요."

"재미있는 그림이지.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거야. 머리채도 쥐여잡고, 멱살도 잡으면서, 의사봉 하나를 놓고 투닥투닥 싸우는 모습. 국민들이 한숨을 쉬며 쳐다보겠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높아지겠군요."

"총리에게 이르게.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까 정공법으로 나가라고. 싸우면 싸울수록 좋아. 법안 처리가 지지부진해도 그런 모습이 국민들에게 생생히 나가면···."

이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안은 내가 되는거지."

***

이범석 총리가 황제의 명령 때문에 불편한 기색으로 국회에 간 사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문제가 대법원에서 터졌다.

제국의 권력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뉘는데 입법, 사법, 행정이 그것이다.

법을 만드는 입법부(국회), 법으로 통치하는 행정부(내각),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법원).

대한제국은 입헌군주정이며 내각제이기 때문에 입법부와 행정부가 한 몸처럼 돌아간다. 4년 임기로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거기서 이긴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로 임명되는 구조를 지닌다. 이렇게 당선된 총리는 장관들을 꾸려 내각을 만들고 행정부를 이끄는 것이다.

황제인 이연이 통치 행위를 할 수 있는건 이범석 총리를 통해 입법과 행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때문인데, 딱 하나의 기관이 그 남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다.

법을 바탕으로 재판을 하여 범죄자를 심판한다. 법치주의 대한제국에서 입헌군주제 질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사법부의 대표인 대법원장은 대한제국 사법총평의회가 자체적으로 선출하여 황제의 임명을 받는 구조이며 완전히 독립된 위상을 갖는다. 어느정도인가 하니···.

<황제는 사법부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겸하고 있고, 입법부와 손잡으면 이론상 황제의 폐위까지 가능한 최강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심판자니까.

현재 대법원장은 이범근. 법조계의 제왕이 이연의 심기를 건드려버린 이 날의 재판. 반역자 최형욱에 대한 최종 선고가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사형>

1심과 2심까지 이어진 군사재판의 결과를 전달 받고는 3심을 주관하여 최종 선고를 내렸다. 이범근을 필두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재판정에서 내린 사형의 이유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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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11. 1 대법원 최종 선고 일부>

주도면밀하게 짜여진 작전 계획과 진행 과정을 볼 때 이는 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볼 수 없으며, 국가방위를 위해 헌신해야 할 군인이 본분을 저버리고, 사령관을 속여 군사행동을 벌인 것은 명백한 반역에 해당한다.

황실에선 피고인들에 대해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군의 기강 측면을 놓고 봤을 때 피고인들의 죄를 경감해주는 것은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다 판단되며,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피고 최형욱 외 32인 전원을 사형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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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끌었으니 적당히 끝내자는 황제의 요구를 ‘그건 정의가 아니다’라며 무시해버리고는 고위 장교 32인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해버린 그 남자.

대한제국의 사형 집행은 확정 판결이 난 후로 6개월 이내에 실시해야 한다. 민간인은 법무부장관이 결정하고, 군인은 국방부장관이 결정한다.

대한제국의 사형제도는 사문화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연쇄살인범을 교수형으로 처단한 국가였다. 재판 결과를 보고 받은 이연은 비서실장을 불러 긴급 명령을 내렸다.

<내 딸이 뉴스를 못보게 해>

마음여린 딸내미의 정신건강이 다시 악화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였다. 그런 딸내미를 미끼로 보낸 것도 본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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