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Ep9. 중앙정보부 (10)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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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전승기념일
5성장군 이은서가 한복을 입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평양 사령부에서 업무를 보는 그녀는 오늘 군인으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지웠다. 공주 시절부터 즐겨한 아리따운 댕기머리, 알록달록 귀여운 머리핀, 비단으로 짜여진 황태녀의 보랏빛 한복까지.
한 평생 곤룡포 한 번 입어본 적 없다는 아버지와 다르게 그녀는 한복을 참 좋아했다. 장인들이 조선왕국 시절의 전통과 현대적인 감각을 곁들여 만든 최고의 한복은 용무늬가 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양빛이 내리쬐는 8월. 리무진이 대기중인 평양 사령부의 중앙 현관에서 은서는 말했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그 먼 거리를 리무진으로 타고 가자고? 차도 막힐건데?"
은서의 물음에 진희가 답했다.
"암살시도가 있을거라는 중정의 보고가 있었대요."
"뭐? 암살?! 그럼 행사를 취소해야지!"
"그게 구체적인 증거는 없고 추측만 있는거라서요."
“아~ 그래? 근데 헬기 대신 리무진을 타야 하는 이유는 뭐야?”
"도중에 헬기가 요격될지도 모르고, 혹시 뭐 정비사로 위장한 적군파가 추락을 노리고 망가뜨려놓을지도 모르고···."
"어이구. 걱정도 팔자다."
"좀 이상하죠? 헤헤···."
멋쩍은듯 머리를 긁적이는 진희를 바라보며 은서가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게 허무맹랑한 소설을 쓴 사람이 누구래? 그것도 중정이야?"
"비서실장님이세요."
"비서실장님이? 아니 무슨··· 중정 요원 출신이라는 분이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하신대? 헬기며 요원이며 친위대가 직접 관리하는거잖아? 안전 검사도 세번의 교차검증으로 철저하다고!"
“그러게요··· 요즘 비서실장님이 사사건건 경찰청장님을 불러 트집을 잡으신다는데, 친위대장님이 말씀하시길 편집증을 앓고 계신 듯 하다고···.”
“뭐, 그럴수도 있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건 좋은거니까.”
“어쨌든 조심하세요. 조심해서 나쁠건 없으니까요.”
걱정하듯 말하는 진희에게 은서가 손사레를 치며 답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래 봬도 난 전쟁터까지 다녀온 몸이라고. 적진도 아니고 우리나라 땅에서 죽기야 하겠어?”
그리곤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령관의 모든 수행원들에게.
"여기 내가 오늘 죽을거라 생각하는 사람?"
"예?!"
진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은서의 뜬금없는 망언에 진희는 물론 김훈 중령이며 김진혁 중령이며 전 장군이나 다른 사령부 참모들까지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말이 씨가 되면 어쩌실려구요!"
부사령관 전 장군의 외침에 은서가 '뭔 상관이냐'는 투로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책에서 항상 그렇거든. 괜찮을거야, 돌아오면 결혼하자, 근데 꼭 이렇게 말하는 애들이 먼저 죽더라? 그게 복선이란 건가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액땜했다고 생각해. 난 오늘 죽을거야~ 아이구 무서워~! 덜덜덜덜!"
능청맞게 연기하는 은서가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갔다올게~ 사령부 잘 지키고 있어~!"
리무진을 타고 아무렇지도 않게 서울로 향하는 사령관님을 보며 모두가 입을 벌린채 고개를 저었다.
<이게 설마 마지막이 되진 않겠지?>
***
같은 날 아침 8시. 이화는 황제 폐하보다도 먼저 국립중앙극장에 도착했다. 어느 때처럼 극장 근처의 모든 사람 모든 조직의 스케줄을 암기해놨고 그걸 바탕으로 요원들을 풀어 적군파 체포를 위한 그물망을 깔아놨다.
이화는 서울의 부시장과 극장 관계자들을 모조리 불러내어 황실의 권위로 명령을 내렸다.
"오늘 행사는 친위대가 직접 통제합니다. 청소부고 용역이고 누구도 필요 없으니까 허락된 인원만 들이게 하세요."
"저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부시장의 물음에 이화가 답했다.
"극장 주위로 어슬렁거리는 공무원들 없게 하세요. 환경미화원들 청소할 필요 없으니까 극장 반경 300m 이내 얼씬도 하지 말라 하시고, 오늘 하루 경찰이 교통통제에 들어갈겁니다. 구급차 한 대 대기시켜놓으시고 언제든지 환자 후송이 가능하게 만들어놓으세요."
"환자가 누굽니까?"
"황제 폐하가 되실지도 모르죠."
"......?!"
"최악을 가정하란 말입니다. 언제! 무슨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땀을 닦아내며 도망치듯 달려가는 부시장에게 이화가 다시한번 외쳤다.
"소방차도 불러놔요! 폭탄테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지켜보던 친위대 경호팀이 고개를 저었다.
<폭탄테러라니 우릴 뭘로 보고?>
<요원 출신이라더니 이거 순 망상증 환자잖아?>
하지만 이화의 불호령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이화는 비서실장이다. 고작 비서실장일 뿐이다. 하지만 친위대장 차지연의 권한까지 넘보면서 경호실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경호차장!"
"예! 비서실장님!"
경호실의 차장과 간부들이 한데 모여 이화의 말에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경호실장 겸 친위대장 차지연의 부하들이었다.
"경호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VIP의 신변을 보호하는 겁니다. 암살자를 체포하든 뭘하든 그런건 중정과 경찰이 알아서 할테니까, 불온한 녀석이 보이면 폐하 먼저 지켜드리세요."
"그건 당연한···."
"총 꺼낼 생각 있으면 몸부터 던지라고!!!"
이화의 화가 극장의 로비를 쩌렁쩌렁 울렸다.
"니들 대가리 차지연이 계속 말하고 있지? 저격범이 나타나면 먼저 쏴죽이겠다고!"
"저희 대장님이십니다! 존칭을 제대로 붙여주십시오!"
“내가 총책임자야!”
이화가 극장 안 단상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거야! 사람 목숨은 가벼워! 아주 미친듯이 가볍지! 여기서 저기로 총알 한 개만 날아가도 폐하는 끝이야! 그러니까 총꺼낼 생각 말고 몸부터 날려! 폐하를 보호하란 말이야!”
"알겠으니···."
"정 자신 없으면 인간 방패라도 해!"
"실장님!!!"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간 비서실장님을 보며 경호실 차장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싫은게 아닙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다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제발 고정하십시오."
"고정? 지금 고정하게 생겼어?"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낌새도 수상한 자도 없었죠. 폐하는 안전합니다. 저희가 안전하게 모실테니 제발 진정하십시오."
"총은?"
"화장실까지 샅샅이 훑었습니다. 아무 이상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총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에 약간의 안심이 들었다. 너무 화가 났고 너무 흥분했다는 생각에 심호흡을 해본다.
"정말 안 나온거 맞아?"
“1시간 전에 끝마쳤습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시고···.”
"하아···."
깊게 숨을 내쉬는 심호흡 한번. 그리고 재차 강조하여 다시한번 말했다.
“1시간 전이라 이거지?
“예.”
“그럼 1시간 지났으니 다시 찾아보면 되겠네.”
“예?”
“다시 찾아보라고. 안 나올리가 없으니까.”
비서실장의 지시에 경호차장이 반발하며 말했다.
“저희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수색 했습니다! 확실하게 했단 말입니다! 경찰까지 이중 삼중으로 수색했는데···.”
“보나마나 쓰레기통이나 대충 휘저으며 여긴 없겠지 하고 넘어갔겠지.”
“실장님!”
“밑바닥까지 꼼꼼히 살펴보라고. 주인 없는 가방 같은게 보이면 의심해보고, 무대의 장막 뒤, 객석 의자 아래, 청소도구함, 화장실 각 칸칸마다. 변기통도 의심해보고···.”
“극장은 안전합니다!”
경호차장이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저희가 아침부터 계속 지키고 있었단 말입니다. 출입자 한 명 한 명까지 꼼꼼히 체크해가면서 최선의 경비를 하는 중인데 대체 왜···.”
“하지만 어제는 아니었겠지.”
“네?”
이화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8월 14일까지 경찰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지?”
“그랬습니다.”
“보고서가 허술했어. 새벽에 드나든 사람은 없었는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건 없는지. 특이사항 하나 없이 이상무 세글자만 적어서 보고했다고. 경찰청장이.”
“그야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
“내가 암살자라면 행사 전날에 몰래 잠입해서 총기를 숨겨놨을거야. 누구도 중요시하지 않을 하찮은 장소 어딘가에 숨겨놓겠지. 그리고 당일이 되면 빈 몸으로 들어와서 숨겨놨던 총을 찾아 암살을 시도하는거야.”
“그건 소설에 불과합니다!”
“소설로 안 끝나면 어쩔래?”
경호차장이 원망의 눈빛으로 말했다.
“정말 도가 지나치시군요. 비서실장님.”
“부족한 것보다 지나친게 낫지. 폐하를 경호하는 친위대라면 항상 최악을 대비하며 만전을 기하는 게 정상 아니야?”
“예. 바로 그 문제입니다. 폐하의 경호는 저희들이 담당하는거지 비서실이 담당하는 게 아니니까요.”
“뭐?”
“지금 이곳의 경호 총책임자는 저입니다. 그리고 제 상관인 차지연 대장님이죠. 비서실장님이 폐하의 허락을 얻었다곤 하시지만 이곳의 전문가는 저입니다.”
그는 강조하며 말했다.
“더 이상의 월권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비서실장이시면 비서실장에 맞는 업무만 해주십시오.”
이 때 이화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놈부터 죽일 것이다. 친위대에서 잘라버리고 취업을 영구히 막아버려 사회적으로 죽여버리고 말테다. 그리고 총책임자인 차지연 장군에게도 죄를 물을테다.
건방진새끼들.
***
아침 9시 30분. 국립중앙극장에 귀빈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내각총리대신 이범석부터 상원의장 안수진을 비롯 모든 대한제국 귀족들이 입장하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각국 대사들이나 특별히 초대된 귀빈들이 전승기념일 행사장을 찾았다.
친위대는 극장의 입구에서부터 검문검색을 실시했는데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하고, 여성 경호원들까지 데려와서 일일이 귀빈들의 몸을 더듬어가는 철저한 검문검색을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몸을 더듬는건 좀 심하지 않나?>
<안전을 위해서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사소한 실랑이들이 계속되었지만 황제폐하와 황태녀 전하가 모두 참석하시는 중요한 행사니까 어쩔수 없겠구나 싶은 반응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사전에 초대된 자들만 입장하도록 티켓 확인도 꼼꼼하게 이루어졌다.
다음 차례의 사내가 등장하자 어느 때처럼 친위대 요원이 물었다.
"성함이?"
"난조 세이코, 한국명 문세광입니다. 여기 티켓도 가져왔습니다."
친위대 요원이 일본어를 써주기 시작했다. 이번 행사는 재일교포나 일본 대사관 직원 등 외국인도 상당수 참석했기 때문에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요원들이 전면 배치되어 있었다.
“아? 민단에서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문세광씨.”
"몸수색도 진행하시겠죠?"
“하하! 네··· 비서실장이 여간 깐깐한 분이 아니신지라. 폐하께서 참석하시는 중요한 행사이니 조금만 실례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친위대 요원은 몰랐다. 이 남자를 여기서 막아야 했다고. 하지만 중정도 친위대도 경찰도 누구도 이 남자의 정체를 몰랐기에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민단에서 참석한 애국적이고 보수적인 재일교포일 뿐이었고, 시간을 내어 전승기념일 행사까지 찾아와준 동포일 뿐이다.
하물며 이 남자의 소지품에는 총기류 같은 것도 없었다. 모든게 깔끔했고 완벽했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할 수 없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세광씨. 한국에서의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가득하시길."
친위대 요원의 인사를 받으며 문세광은 극장에 입성했다. 예상대로 이곳은 경찰과 친위대원들이 조를 이루어 순찰을 도는 삼엄한 곳이었다.
‘거사를 치르려면 총이 있어야겠지?’
그는 주위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한번한 뒤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누가 바라보건 누가 의심하건 그는 태연하게 화장실을 갈 뿐이다.
1층을 놔두고 2층화장실을 쓴다. 첫번째도 두번째도 지나쳐서 굳이 세번째칸에 들어간다. 변기통 앞에 선 문세광은 굳이 수조 뚜껑을 열어본다.
그리고 굳이 총이 들어있었다. 물이라도 젖을라 비닐백에 포장하여 정성스럽게 집어넣은 그것은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 권총.
인간의 정신이 가장 취약해지는 새벽 4시. 경찰의 허술한 경비를 뚫고 오진수의 13과 대원들이 집어넣은 협동의 결과물.
경찰과 친위대가 놓친 것, 중앙정보부가 우려한 최악의 시나리오, 이화의 편집증이 진실로 귀결되는 운명의 시간 1974년 8월 15일 9시 57분. 문세광은 다섯발의 실탄이 장전된 총을 손에쥐었다.
'난 이제 혁명가야!'
야수의 심정이 남자의 총에 깃든다. 같은 시각 극장에는 황제 이연과 황태녀 이은서가 친위대의 경호를 받으며 극장 본관 안으로 입성하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극장에서 천천히 놈의 연설을 듣다가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기로 했다. 그것을 위해 지금껏 훈련을 받았으니까. 5발을 쏴서 3발 정도는 맞출 수 있는 '훈련받은 암살자'가 된 문세광은 가장 마지막으로 본관에 입성했다.
행사가 시작됐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혁명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