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Ep1. 공주 이야기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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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덕수궁 공식 발표>
공주님께서 올해로 스무살이 되셨습니다.
성인이 되신 기념으로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봉호는 철혈(鐵血). 철과 피를 가슴에 품은 강직한 여인이 되어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철혈공주님께서는 유신 10년(1965)에 대한제국 간호사관학교로 입학하실 예정이며, 유신 14년(1969)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 부상당한 장병들을 간호하시는 뜻깊은 임무를 수행하실 예정입니다.
기자 : 황실에선 공주님의 외부 공개를 극도로 꺼리고 있는데, 언제쯤 공식 석상에 나오실 예정이신지요?
대변인 : 공주님께선 '국방의 의무 앞에 귀천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범한 시민으로 어떠한 특권도 없이 동등하게 임무를 수행하겠다 하셨기에 황실에서 이를 적극 지원할 예정입니다.
기자 : 그럼, 공주님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비밀이란 말씀이신가요?
대변인 : 그렇습니다. 공주님의 신변은 군부에서도 극소수만 알게끔 2급 비밀로 유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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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론 육사에 있었다.
자기 딸래미를 육군사관학교로 보내놓고 거짓말을 한 이유는 무엇인지, 내 신변은 왜 비밀인지 은서는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 당연히 철혈공주니 평범한 시민이니 하는 것도 황당한 소리였다.
군대가 싫었다. 육군사관학교 1학년일 때 은서는 교장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한제국 황제 좆까라 그래!"
"그러지 마시고, 공주님. 제발···."
사관학교장이 애타게 호소했다. 명색이 학교의 교장이고, 사관학교의 교장이면 현직 군인. 무려 별 3개의 3성 장군이다. 그런 그가 간곡히 호소했다.
"황제 폐하의 진노가 하늘을 찌르셨습니다. 2학기에도 이 성적이면 특단의 조치가 내려질텐데 어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특단의 조치? 특전사로 전쟁터에 가는 마당에 더 이상 최악이 있어? 너 같으면 열심히 하겠냐?"
"그, 그야···."
"꼬우면 퇴학시키던가!"
절박한 심정이었다. 전쟁터에 가느니 퇴학이 나으니까. 어떻게든 끌려가는 것만은 피하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대한제국 특전사는 최정예 요원들이니까. 성적 우수자가 아니면 불가능할테니 고의적으로 성적을 떨어뜨린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의지는 확고했다.
자기 딸의 복무 태도가 불량하니 극단적인 수를 쓰기 시작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사관학교장 지시를 거친 여성 교관들이 은서의 관물대 정리부터 복장 상태, 훈련 기강까지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아 얼차려를 시켰고, 팔굽혀펴기를 100개씩 시키며 엎어질 때마다 몽둥이로 때렸다.
생도 생활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내리는 진흙탕 속에서 고된 체력단련이 이어졌고, 총탄을 쏘는 사격훈련이 매일같이 반복됐으며,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혹독한 이론수업이 이어졌다. 시험성적이 안나오면 은서는 또다시 어두컴컴한 복도로 불려가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내가 이 나라 공주라고!!"
"엎드려 뻗쳐!"
"으아악!"
사관학교 생활 4년 내내 은서의 잠자리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끓어올랐다.
사관학교 4학년. 생도 생활을 마치고 소위 계급장을 단 은서의 성적은 중하위권. 특전사로 선발되기엔 한참 모자란 성적이었지만 황제는 군부에 압력을 가하면서까지 은서를 특전사로 보냈고 그 다음엔 월남전으로 보냈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인천항의 뱃길에 오른 은서의 나이 24세. 대한제국 특전사만이 쓸 수 있는 검은 베레를 쓴 소녀의 얼굴에 원망이 서려 있었다.
"반드시 복수할거야···."
***
언론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가 아니라 일반인 여성 장교 이은서였지만, 그럼에도 언론사 기자들은 퀴논의 항구까지 쫓아와 열띤 취재열기를 이어갔다.
그녀가 가는 길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최초의 여성 생도 중 한 명이었고, 유일한 여성 특전사였으며, 월남전에 파병된 여성 중 유일한 전투 병과였다.
그래서 붙은 수식어.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 여인의 기개>
4년 동안의 고된 생도생활을 보답이라도 해주듯,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에게 모든 영광과 빛나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있었다. 퀴논의 항구에서 12살 먹은 꼬마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가 꽃목걸이를 만들어와 선물해주는데 이건 좀 노골적이지 않은가?
그렇게 노골적인 환대 속에 도착한 대한제국 월남원정군 백호부대 소속 공수지구대 3팀. 남자 군인이 바글바글한 특전사 본부에서 '그래도 최소한 내가 있을 3팀은 여군들이 가득하겠지'라는 마지막 희망을 품으며 내무반에 도착한 은서에게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은서 소위입니다."
라며 영혼도 군기도 없는 인사를 날린 순간. 그녀의 눈앞에 보인 공수지구대 3팀 내무반의 풍경.
남자, 근육, 마초, 구릿빛 피부, 그리고 아저씨.
문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구릿빛 피부의 근육을 가진 특전 대원 11명이 은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박상사님, 설마 저 여자가··· 이번에 부임한다던 이은서 소위입니까?"
"어쩐지, 이름이 여성스럽다 했더니···."
믿겨지지 않는건 은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사관 10명과 장교 2명이 하나의 팀을 이루는 특전사 1개 중대. 거기의 구성원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마초 아저씨들로 부사관이 10명. 카리스마 넘치는 장교가 1명. 그렇게 11명의 아저씨들이 24살 밖에 안된 이은서 소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날 더러, 아저씨 11명이랑 365일 부대끼며 군생활을 하라고?'
어깨에 매고 있던 더블백을 떨어뜨리고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은서는 그제야 4년 전 육군사관학교장이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황제 폐하의 진노가 하늘을 찌르셨습니다. 2학기에도 이 성적이면 특단의 조치가 내려질텐데 어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래서 다시 생각했다.
대한제국 망해라
***
남베트남 퀴논에 위치한 대한제국 월남원정군 총사령부에서 작은 회의가 열렸다. 장소는 최고사령관 채명진 장군의 집무실. 인원은 세명이었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특전사령관 박승진 소령이 말했다. 월남전에 파병된 백호부대 공수지구대(특전사)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여군을 파견할거면 별도의 여성팀을 꾸렸어야지 꼴랑 한명 보내놓고 남성들과 같이 싸우라니요?"
"어렵겠지?"
채명진 장군이 물었다.
"전력을 다해도 어려울겁니다. 남자와 여자는 태생적인 신체적 차이가 있잖습니까? 하물며 일반 군인도 아니고 특전사인데 이건 도무지···."
"흐음···."
채명진 장군이 옆에 앉아있는 젊은 장교에게 물었다.
"김훈 대위, 3팀의 중대장으로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는 짧게 답했다. 그 이상 말할 뭔가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장군님이다. 군생활 21년차 장군님과 3년차 장교인 자신의 격차는 너무도 커서 사령관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채명진이 무겁게 말했다.
"언론사에선 유관순 열사니 조선 여인의 기개니 하며 잔뜩 호들갑을 떨고 있어.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지 않나 싶네."
"고작 언론사 호들갑에 놀아날 셈이십니까?"
박승진 소령이 물었다.
"아니, 본국의 뜻에 놀아나고 있는걸세."
"본국의 뜻이라 하시면···."
채명진 장군이 박승진 소령을 노려보며 묻는다.
"대한제국에 언론의 자유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유관순 열사? 조선 여인의 기개? 그게 과연 기자들 머리에서 나온 문구일까?"
"상부의 뜻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나도 이은서 소위를 돌려보낼 방법이 없네."
박승진 소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설마, 징병제를 여성으로 확대라도 하려는 걸까요? 이은서 소위를 필두로 자발적인 입대를 확대하고, 그 다음 여성 징병으로 확대한다는···."
추측은 틀렸다. 이은서 소위가 대한제국 공주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생기는 오차였다. 확대된 오차는 채명진 중장의 연륜에서 나오는 정치적 감각에 의해 보정됐다.
"그건 무리야. 대한제국은 입헌군주제 국가니까. 여성들의 자원입대를 독려할 순 있어도 본격적인 징병제 확대는 힘들겠지."
"지지율 때문입니까?"
"그래.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딸래미를 군대로 보내고 싶어 하겠나? 무리하게 징병제 확대를 추진했다간 한독당 지지율이 곤두박질 칠거고, 그렇게 되면 폐하의 권력도 위태로워질 수 있어."
그러자 박승진 소령이 확신을 갖고 말했다.
"그러면 역시 낙하산이군요."
"낙하산?"
"예, 고관대작 중 누군가가 자기 딸을 출세시키고자 어거지를 쓴거지요. 전쟁은 공을 세우기 좋은 기회니 말입니다."
채명진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육사의 입학규정을 뜯어고칠 정도의 힘을 가진 정계의 거물일 가능성이 크겠구만."
"대한제국 공주님은 간호사관학교로 가셨다 하셨으니 아닐테고, 내각총리대신 이범석 장군님이나 한독당 대표 김구 선생, 외무대신 김홍일 장군, 국방대신 손원일 제독님 가문이 아무래도···."
박승진 소령의 말에 채명진 장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분들의 가문 중엔 이은서 소위를 닮은 여식은 없었네. 몇번이고 뵈었으니 믿어도 좋아."
"아무튼, 고관대작쪽은 확실하겠지요."
그 부분에서 모두의 생각은 같았다. '훨씬 더 높은' 고관대작. 대한제국 황제의 딸이라는 생각까진 다다르지 못했지만.
"대한제국의 백작가 따님이셔도 제 생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낙하산 인사는 절대 안됩니다."
"하지만 이은서 소위의 특전사 부임이 군부의 확고한 뜻인 것도 달라지지 않지. 이걸 우리가 어찌 물리겠나?"
"자발적으로 돌아가게 해야지요."
"자발적으로?"
"부하들을 부추겨 하극상을 일으켜보겠습니다.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임무를 잔뜩 주면 제 풀에 지쳐 포기하겠죠. 그러면 장군님께서 선심쓰듯 본국에 기별을 보내는겁니다. 이은서 소위가 군생활을 포기했다고."
그 때 김훈 대위가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박승진 소령이 깜짝 놀라며 김훈 대위를 바라봤다.
"김훈 대위!"
"제 부하입니다. 공수지구대 3팀의 일원이니 제가 책임지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어쩔려고?"
채명진 장군의 물음에 김훈 대위가 당당히 말했다.
"대한제국 특전사는 최고중의 최고만 모이는 정예 부대입니다."
이은서 소위의 사관학교 성적을 알고 있던 박승진 소령이 코웃음을 쳤다.
"이은서 소위는 사관학교에서 중위권을 기어다니던 녀석이야. 그딴 녀석이 무슨 최고가 될 수 있다는건가?"
"그렇기에 말씀드리는겁니다."
김훈 대위가 냉정히 말했다.
"정정당당하게 평가해도 살아남지 못할 녀석이니까요."
"정정당당하게라···."
채명진의 고뇌에 김훈 대위가 말했다.
"이은서 소위가 여자라 해서 적군이 봐주겠습니까? 전쟁터는 냉정한 곳입니다."
"그건 그렇지."
"양반집 자식이건 노비 자식이건 총 맞으면 죽는 것도 똑같지요."
"그렇다는건 설마?"
"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전쟁터라는 환경 자체가 이은서 소위를 심판할겁니다.
지휘란건 결국 신뢰와 인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까? 상관이 무능하면 부하들이 불안해 할거고,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살기 위해서라도 반란을 일으키는 게 전쟁터의 군인이니까요. 부하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면 알아서 들고 일어날겁니다.
또한, 특전사의 세계는 규칙이 있습니다. 강한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강한자가 운까지 따라야 살아남는겁니다. 무능한 전사는 살아남지 못할건데 무엇하러 손을 더럽히겠습니까?"
박승진 소령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부담이 커질텐데?"
"스물네살 소녀 때문에 위태로워질 만큼 무능한 팀은 아닙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강압과 오해가 겹친 은서의 힘든 군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