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 Ep1. 공주 이야기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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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쓰기 전에 주의사항을 남긴다.
첫 번째 인사는 거짓이다.
손발이 떨릴만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만, 역사학자들에게 읽힐 공주의 유서이므로 심사숙고하여 적는다.
사랑하는 아버지.
***
1965년 1월 25일 대한제국 덕수궁
“비서관님!”
“공주님이 마지막으로 수라를 드신 시간은?”
“하루 하고도 12시간 전입니다!”
“열쇠 가져와!”
“네!”
덕수궁 비서실이 전쟁터 같았다. 대한제국의 공주가 수라상을 물리고 단식투쟁을 시작한지 36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사유는 간단했다.
'내 딸을 육군사관학교로 보내겠다.'
대한제국 제4대 황제 이연의 선언이 있고나서부터 딱 5시간만에 벌어진 투쟁이니 입으로 떠들지 않아도 뻔할 뻔자였다.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남자의 외동딸로 태어났다는 건 공주 다운 삶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니까.
독립운동가 출신의 전쟁영웅. 대한제국 황제 이연(李淵)
그가 태어난 1917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 의친왕과 의친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2남 중 장남. 그는 미국 워싱턴에 주재한 대한제국 망명정부에서 태어난 망국의 황태자였다. 쉽게 말하면 고종황제의 손자다.
그에게 전쟁터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야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미국 해병대로 들어간 그는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여 은성무공훈장을 받았고, 1945년엔 미국 OSS 요원이 되어 독립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에 참가. 조선총독부에 태극기를 꽂으며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미국에겐 검증된 친미인사로 통했고, 식민지배로 고통받던 조선인에겐 독립영웅으로 통했으니, 1948년 8월 15일 부활한 대한제국은 그의 작품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그가 1950년 한국전쟁조차 승리로 이끌었을 때, 이 남자는 말 그대로 살아 숨쉬는 민족의 영웅.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귀하여 이순신 장군이나 광개토대왕에 버금가는 한 민족의 최고 영웅 반열에 올라간 것이다.
식민지배를 당하며 착취와 억압의 세월을 보낸 조선 민중에게 혜성처럼 나타난 이 남자는 아직 황제조차 되지 않은 젊은 황태자. 모든 공을 아버지에게 돌리며 의친왕을 국부(國父)의 반열에 올린 사나이는 영웅을 갈망하던 시대에 갈증을 풀어줄 신의 선물 같았으리라.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독립 전쟁의 영웅, 한국전쟁에서 북진통일을 달성한 냉전시대의 영웅까지. 조선인으로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업적을 달성한 이 남자가 고종, 순종, 혜조(의친왕)의 뒤를 이어 네번째 황제가 되었을 때 슬하에 딸이 한명 있었으니 조선 공주 이은서.
이 이야기는 영웅이 아니라 영웅의 딸로 태어난 한 소녀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두가 ‘그분의 따님이시면 군대도 가시겠지’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방구석에 틀어박혀 투쟁을 벌이고 있는 공주님의 이야기. 때는 1965년 1월 25일. 사건의 배경은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에 위치한 석조전이다.
1897년. 500년 묵은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개혁하며 지었던 근대화의 상징. 동양식 목조 궁전이 가득한 덕수궁에서 유일한 서양식 건축물. 미국 백악관을 빼닮은 이 궁전에서 공주는 모두가 아침준비로 바빴던 새벽 5시에 기상해 자기 방을 못으로 봉해버렸다.
그 다음 탁자와 의자, 옷장이나 거울 따위를 있는대로 가져와 문 뒤로 쓰러뜨려 바리케이트를 구축했으며, 창문에도 못질을 해놔서 밀실로 만들어버리니, 이 소녀는 지금 황궁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었다.
“공주님! 제 말 들리십니까?”
비서관이 방문을 한참 두드려보지만 미동조차 안했다. 분명 방 안에 계실건데 왜 이리 조용한건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옥체라도 상하시면 어쩔려고 이러십니까?"
반응이 없자 딜을 걸어보기로 한다.
"폐하께선 포항의 제철소를 보러 가셨습니다. 비밀은 지켜드릴테니 딱 한숟갈만 드십시오."
그래도 대답이 없다. 공주방에는 화장실도 없는데. 사람은 물이 없으면 3일을 못버틴다고 했으니 정말 이대로 실신이라도 한 건 아닌지 비서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서관님! 여기 열쇠를 가져왔습니다!”
비서관이 지시해놨던 열쇠가 왔다. 급한대로 잠금 장치라도 해제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느껴져선 안될 단단한 촉감이 손끝에서 느껴진다. 비서관은 그제야 열쇠구멍을 바라봤다. 방문에 안 맞는 열쇠를 꽂아놓고 일부러 부러뜨린 것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겁에질린 손이 하염없이 떨려온다. 대한제국 덕수궁 제2부속비서관. 대한제국 공주를 보좌하는 총책임자가 하염없이 몸을 떨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비서관님!”
"황후 마마도 돌아가시고 황태후 마마도 돌아가셨어. 우리 비서실에 남은 황실의 마지막 여인은 공주님 뿐이신데···."
비서관의 얼굴에 그늘이진다.
"공주님 마저 돌아가시면 덕수궁 제2부속비서실은 끝이야. 공주님 없는 우리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어. 그치?"
부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망치 가져와. 황궁이고 나발이고 공주님 옥체가 먼저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한 남자가 나타나 말했다. 대한제국 친위대의 제복. 47세의 남자 김종규. 한 손에 들려있는 산탄총이 제2비서관의 시선을 끌었다.
“설마?”
"물러서시오."
친위대장은 공주의 방에 총을 갈겼다. 거침없는 총알 세례에 굳게 잠겨있던 문이 버티질 못해 길을 연다. 손잡이는 부서지고, 못질된 곳엔 구멍이 났으며, 문 뒤를 막던 가구들은 단련된 병사들의 완력으로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공주의 단식투쟁을 유지하던 모든 장애물이 걷혔다. 실로 군인다운 해결법이었다.
"뭘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비서관님도 망치로 부수려 했으면서."
비서관은 떠올렸다. 지금은 친위대장을 상대할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이틀동안 수라를 못드신 공주님의 옥체가 먼저다.
“공주님!”
그곳에 공주가 있었다. 꽃무늬가 은은하게 새겨진 화려한 한복을 입고 댕기머리를 딴 예쁜 소녀.
독립운동가이자 전쟁 영웅이며 대한제국의 황제인 이연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고귀하신 황실의 마스코트 같은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대한제국의 공주 이은서.
붉은 양탄자가 깔린 서양식 궁전에 앉아 이화꽃이 새겨진 쿠션을 끌어앉고 있는 한떨기 꽃과 같은 소녀가 총기넘치는 눈으로 비서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항 내려갔다며."
공주의 말은 뒤따라온 남자를 향해있었다.
47세의 남자 김종규. 대한제국 수도 서울과 덕수궁의 경비, 황제의 근거리 경호까지 지켜야 할 모든 것을 책임지는 친위대장. 군부의 실세이자 황제의 오른팔이 공주에게 답했다.
“제철소가 더워서 말이지요.”
능청맞게 답하는 김종규 대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사관학교에 가실 분이 단식을 하시면 어찌합니까?”
“안 간다고 했잖아.”
“황제 폐하의 뜻에 따르십시오.”
“싫어.”
“황명을 어기실 셈입니까?”
황명이라는 말에 공주가 비웃으며 말했다.
"너한텐 황명이지만 나한텐 아버지 잔소리거든?"
김종규가 웃으며 말한다.
“하늘 아래 지존이신 폐하의 명령을 잔소리로 취급하시다니. 역시 영웅의 딸이십니다. 하오나, 도의적으로 생각해도 군대에 가시는 게 맞지요."
“어째서?”
“대한제국은 징병제 국가입니다. 모든 성인 남성이 3년간 의무복무를 하고 있고, 우린 이를 국방의 의무라 합니다.”
“난 여자야.”
“고귀한 신분엔 책임이 따르는 법.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으로 제국 신민의 모범이 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그 뜻을 익히 알고 있던 공주는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다. 빌어먹을 김종규.
"간호사관학교면 가겠다고 했잖아. 대체 여자가 왜 육군사관학교를 가냐고."
"특전사가 되어야 하니까요."
특전사.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줄임말로 대한제국의 특수부대를 일컽는 말이다. 공수부대라고도 하는데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로 유명한 제국의 최정예 요원들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들은 특수부대. 육군 중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이곳에 보내겠다는 황제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친놈들···."
김종규 대장이 여유를 부리며 말한다.
“멋지지 않습니까? 제국 최고의 정예 요원입니다. 여자라고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요.”
"육군사관학교는 남자만 받잖아."
“아, 실례. 법이 있긴 했죠. 일주일 전에 폐지했지만.”
썰렁한 웃음에 공주가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남자만 가던 육사를 여자도 갈 수 있게 고치고 공주를 거기로 보낸다. 그 다음엔 특전사. 그 다음엔 무엇이 있을지 내가 맞춰볼까?"
공주가 말한다.
"월남전이겠지."
그랬다. 그녀는 군대가는 것을 거부하는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군대를 통해 가게 될' 월남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1965년 1월. 이쯤되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도 알법한 시대적인 이야기.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가 공주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돼···.”
비서관이 중얼거렸다. 월남이라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군대만 가는 것도 아니고 전쟁터를 가는 것이다. 군복무와 참전은 격이 다른 이야기다. 전쟁터에 갔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이러는가?
“대한제국은 월남전에 군대를 보내지 않을겁니다.”
김종규 대장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거짓말하지마.”
“미국에도 전달한 내용입니다. 대한제국은 월남전에 군대를 파병할 능력이 없다고 말입니다.”
“미국 대사가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덕수궁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어. 그딴 소리를 믿으란거야 지금?”
김종규 대장이 약간의 바램을 담아 말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15년도 안됐습니다. 통일했다고 만사가 다 해결됐답니까? 북방의 치안은 여전히 불안하고, 국경에는 중공과 소련이 수백만의 군대를 배치하여 우리를 노릴진데, 무슨 능력이 있다고 월남전에 보내겠습니까?"
"협상을 질질 끌어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거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건 미국이니까. 영국, 프랑스, 서독, 캐나다. 미국의 이름난 동맹이 다 거절한 월남전이야. 놈들에게 남은 동맹은 우리밖에 없는데, 미국에게 잘 보일 좋은 기회를 니들이 걷어찬다고?"
김종규 대장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진다.
“여전히 정치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병사들에게 눈짓을 날린다. 무언의 명령을 받은 친위대 병사들이 성큼성큼 다가와 공주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는다.
“무엄하다! 감히 어딜!”
김종규 대장이 말했다.
“가지 않으시겠다면 무력을 쓰겠습니다. 미천한 신하의 몸이나 황제 폐하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요."
김종규 대장이 품에서 가위를 꺼냈다. 공주도, 비서관도, 비서들도 하나같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말과 손짓, 도구가 무엇을 할지 뻔히 알고 있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김종규 대장의 가위가 천천히 공주의 머리로 향한다.
비서관이 외쳤다.
"친위대장!!!"
절규를 뒤로한 채 김종규 대장이 공주의 댕기머리를 싹둑 잘라버린다.
힘없이 떨어진 머리카락에 공주는 눈물을 터트렸다. 절망하는 비서와 고개를 떨구는 병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비서관은 분노했다. 감히 일개 신하 따위가 공주님의 옥체에 손을 대다니. 하늘 아래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너, 이게 무슨···.”
김종규 대장이 말했다.
"여자는 황위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이건 조선왕조 500년의 전통이고 동아시아 모두의 전통이지요. 유럽의 살리카법조차 여자의 제위 계승을 거부할진데. 그래도 정치를 하시렵니까?"
"그딴건 관심 없었어!"
공주의 항변에 김종규 대장이 답했다.
"저희는 관심이 많습니다. 황제 폐하께 쓸모있는 공주가 되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많은 고민을 했으니까요."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그래서 전쟁터로 보내겠단거야? 가서 공이라도 세우라고?"
"그게 공주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효도입니다."
"빌어쳐먹을 황제에게 효도라니. 씨발새끼들···."
“지금은 냉전 시대입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난세죠. 여기서 살아남아 모두에게 인정받는 여인이 되려면 어찌해야겠습니까?
반공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장에 나가십시오. 그러면 공주님의 모습에 신민들이 크게 감동할 겁니다. 지지율이 오르고, 폐하의 권력이 굳건해지고 총애도 받으실텐데. 공주님께도 좋은 결말이 아닙니까?"
"다들 미쳤어···."
“시대의 흐름을 올바르게 읽었을 뿐이죠.”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눈물 섞인 분노를 뱉어내는 공주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김종규 대장은 그런 싸늘한 눈초리를 피하기위해 애써 고개를 돌렸다.
"공산당을 때려잡는 철의 여인이 되십시오. 대한제국의 공주가 아닌 반공소녀 이은서로 불리는 그날이 되면 공주님도 영웅이 되시는겁니다."
“죽여버릴거야···.”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길."
“용서 못해!!!”
그렇게 공주는 친위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육군사관학교로 던져졌다.
대한제국이 월남전(베트남 전쟁)으로 전투병력을 파견한건 1966년 3월이었다. 총 병력은 8만 5천명이고 총사령관은 한국전쟁의 영웅 채명진 장군이다. 전쟁은 모두가 생각한 것보다 어렵고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