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블랙 레오파드 2] (9)
백인수는 길동에게 전화를 했다.
“길동, 나 백인수라네. 은우 있나?”
“네, 할아버님. 잠시만요. 은우야?”
“네, 횬아.”
화면 속에서 은우가 아이스크림을 쥔 채 대답했다.
“하뷰지.”
“은우야, 할아버지가 관장님께 물어봤는데 개인전을 하려면 그림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구나. 아까 말한 대로 그림을 더 그리면 좋겠어. 그리고 중요한 건데 말이다. 관장님이 카를로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밝히거나 신비주의를 그만두면 그림의 가격이 더 상승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넌 네가 카를로스인 걸 밝히고 싶니?”
은우는 고민이 되었다.
자신에게 그림 재능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보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난 평범한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게 좋기는 한데.’
한편으론 케미기샤와 아프리카에서 만난 아이들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학교도 필요하고 장난감도 필요하고 깨끗한 물도 필요해. 이 모든 걸 계속해서 주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은우는 고민 끝에 백인수에게 대답했다.
“하뷰지, 더 생가케 보게요.”
백인수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은우야. 그럼 촬영 잘하고 아프지 않게 건강 잘 챙기고. 알지?”
“네네네네네.”
전화를 끊은 뒤 은우가 길동에게 물었다.
“횬아, 이짜냐요. 천재로 사는 건 어떤 걸까요?”
“천재?”
길동은 평상시에 천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코치님이 내가 씨름천재라고 하긴 했었는데. 그 말 들을 때가 좋았지. 근데 사람들이 씨름에 관심이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씨름천재인 걸 대부분 모르더라고. 농구천재인 허순, 축구천재인 박자성은 다 알면서 말이야.
씨름이 유명해져서 내가 씨름천재인 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했는데 말이야.
천재는 좋은 거야. 지금은 씨름을 그만두고 네 매니저가 됐지만, 사람들이 내가 천재인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징짜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길동의 생각에 은우의 마음이 흔들렸다.
“천재갸 조은 거예요?”
“그럼. 다들 천재가 되고 싶어 하는 걸. 천재가 되면 사람들이 널 우러러볼 거야. 그리고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고. 근데 넌 이미 연기 천재, 노래 천재 아닌가? 아, 참 얼굴 천재이기도 하고. 대체 천재가 몇 개야. 부럽다. 은우야. 다시 태어나면 너처럼 살고 싶어.”
모태솔로인 길동은 그중에서도 은우의 외모가 가장 부러웠다.
‘은우야, 네가 너처럼 생겼으면 예쁜 여자를 백 명을 만났을 텐데.
형은 얼굴 천재가 아니라 백 명이 아니라 한 명도 못 만나는구나.
넌 이담에 크면 좋겠다.
지금도 여자 팬들이 너만 따라다니는데.’
은우가 하트를 만들어 날린 뒤 길동의 품에 안겼다.
“아이, 횬아도 챰. 횬아갸 얼마냐 머찐데. 횬아, 따랑해요.”
길동은 작고 말랑말랑하고 아이스크림 냄새가 나는 은우를 안으며 생각했다.
‘여자가 없어도 여자보다 귀여운 널 매일 봐서 매니저 일이 신나기는 해.’
은우는 길동에게 안겨서 생각했다.
‘파리넬리일 땐 화장실까지 팬들이 따라다니고 팬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는데.
그리고 공연을 할 때마다 천재라는 말이 따라다니니 그것도 부담이 됐었어.
그런데 길동이 형아 말을 들으니 천재는 좋은 건가?
내일 촬영장에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야지.’
***
은우는 촬영장에 가자마자 큰소리로 외쳤다.
“조은 아치미예요.”
은우는 신맛이 나는 젤리를 주머니에 잔뜩 넣어왔다.
‘강라온 대표님한테 했던 것처럼 또 장난을 쳐야지.’
은우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루시가 커피를 들고 출근하고 있었나.
“루시 눈냐. 젤리 머글래요?”
“오, 좋지.”
은우가 신맛이 나는 젤리를 루시에게 주었다.
루시는 젤리를 씹어먹었다.
“고마워. 은우. 덕분에 잘 먹었어. 맛있다.”
은우는 생각지 못한 반응에 놀랐다.
‘이게 아닌데, 시다고 인상 쓰면서 뱉어야 하는 건데.’
은우는 촬영감독 룬다를 발견하고 룬다에게 다가갔다.
“룬댜, 젤리 머글래요?”
“그래.”
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룬다에게 젤리를 주었다.
룬다 역시 루시처럼 평화로운 표정으로 젤리를 먹었다.
‘이상하다. 왜 다들 놀라지 않지? 오늘은 장난이 안 먹히는 날인가? 이상한 날이야.’
은우는 준비해 온 장난에 대한 호응이 없자 시무룩해졌다.
‘그럼, 아프리카식 이름짓기라도 해봐야 하나?’
은우는 새로운 장난을 장전하고 채드윅 감독에게 갔다.
“감독님, 아프리카식 이름짓기 할래요?”
“좋지. 근데 그게 뭐니? 아프리카식 이름이라니?”
“재민는 거예요. 심심할 때 하면 재미떠요.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식 이름짓기를 꼭 하고 시퍼떠요.”
은우는 나중에 어린이집에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스태프들과 아프리카식 이름짓기를 한 것을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채드윅 감독이 신기한 듯 물었다.
“내 이름은 아프리카식으로 하면 뭐가 되는데?”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함께하던 아프리카식 이름짓기 놀이는 표에 적힌 단어들을 김마리아 수녀님이 읽어주시는 것이었다.
‘내 이름은 용감한 양의 환생이었지. 이름에도 환생이 들어가다니 정말 놀랐어.’
환생이라는 단어 때문에 아프리카식 이름짓기를 강하게 믿게 된 은우였다.
‘그치만 나한텐 표가 없으니까 감독님 얼굴을 보고 그럴싸하게 지어내야지.’
은우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채드윅 감독니믄 말 마는 태양의 왕?”
“말 많은 태양의 왕? 내가 말이 많긴 한데. 왕이라니 기분이 좋은데.”
채드윅은 스태프들에게 은우가 지어준 이름을 자랑했다.
“은우가 아프리카식 이름을 지어줬는데 말 많은 태양의 왕이래. 앞으로 날 그렇게 불러.”
“잘 지었네. 감독님이 늘 촬영을 지휘하시니 왕이죠. 말이 많긴 해. 풉.”
“내가 그렇게 말이 많아?”
“모르셨어요?”
“혼잣말도 많이 하시고 우리한테도 많이 하시고.”
채드윅 감독은 촬영이 잘 풀리지 않으면 혼자서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음향감독인 사이먼이 은우 앞으로 왔다.
“나도 나도.”
“음.”
은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리듯 근엄하게 대답했다.
“횬아는 부드러운 달비체 노래?”
“오~~~. 좋은데. 낭만적이야. 내가 노래 좋아하는 거 어찌 알았어? 자, 들었지? 앞으로 날 부드러운 달빛의 노래라고 불러.”
주변 스태프들이 환호했다.
조명감독 룬이 은우의 앞으로 오면서 말했다.
“채드윅 감독님보다 더 좋은 이름 같은데. 은우야, 나도 지어줘. 나도.”
은우는 예상치 못한 인기에 신이 났다.
‘다들 내가 지어준 이름을 좋아하네. 재밌다.’
은우는 또 근엄한 표정을 하고 이름을 지었다.
“음, 횬아는 하얀 불꼬체 그림쟈.”
“오, 멋있다. 멋진 시에 등장하는 구절 같아. 은우 천재인데. 이렇게 매력적인 이름을 어떻게 생각해 냈어? 자, 들었지. 모두 난 앞으로 하얀 불꽃의 그림자다. 이 이름으로 불러줘.”
“횬아, 천재는 좋은 거예요?”
“좋은 거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은우는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을 찾을 것만 같았다.
***
촬영 중간중간 짬이 날 때마다 은우는 가져온 스케치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은우는 배우들이 쉬는 중에도 모니터를 하고 있는 채드윅의 모습을 크레파스로 그리기 시작했다.
‘채드윅 감독님은 늘 열정적이야. 멋있어.’
혼자서 중얼거리는 채드윅의 습관도 뭔가 그를 더 전문적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은우였다.
‘나도 자라서 감독이 돼 보고 싶다.’
[블랙 레오파드 2]를 촬영하면서 은우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상력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배우 역시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할 뿐이니까.’
은우는 언젠가 감독이 되어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통해서 하지 못한 내 이야기들을 만든다면 정말 멋질 거야.’
은우는 검은색 크레파스를 들어 채드윅을 그렸다. 모니터 앞에서 턱을 괴고 있는 채드윅이 은우의 그림 속에 나타났다.
길동이 은우에게 어린이용 주스를 주려고 오다가 은우의 그림을 발견했다.
“은우야, 이거 네가 그린 거야? 너무 잘 그렸다.”
어딘가 모르게 거친 선. 분명히 매끄러운 그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특징을 너무 잘 잡았어. 누구나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채드윅 감독을 떠올릴 테니까. 채색이 없는 그림인데도 너무 잘 그렸잖아.’
은우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이제부터 그리믈 그려 보려고요.”
“은우야, 너 그림 천재였구나.”
“횬아도 그려주까요?”
“좋지.”
길동이 모델이 되어 포즈를 잡았다.
“난 재밌는 게 좋으니까 할크처럼 그려줘.”
길동이 어깨를 구부리고 상체 근육을 부풀렸다.
“우와! 진짜 할크 같아요.”
“으아,으으으으~”
길동이 포효했다.
은우가 크레파스로 길동은 울끈불끈한 근육을 그렸다.
“헤헤헤헤. 다 됐어요. 여기떠요. 횬아.”
은우가 길동에게 그림을 주었다.
그림 속 길동은 할크처럼 변신한 모습이었다.
“티셔츠가 찢어진 걸로 그랬네.”
“그게 할크자나요. 횬아도 할크처럼 머쪄요.”
길동은 은우가 그려준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조명감독 룬이 은우와 길동에게 다가왔다.
“용감한 용의 환생. 뭐 하고 있어?”
“횬아 그려주고 이떠더요.”
“이야, 그림 멋진데. 은우 그림 잘 그린다. 어디서 배웠어?”
“그냥 혼자서 그려떠요.”
“혼자서 그렸다고? 천재 아니야? 나도 한 장 그려줘.”
“그럴까요? 부드러운 달비체 노래 횬아.”
룬이 은우의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난 뭐로 하지? 할크는 길동이 해 버렸고. 포즈를 잡아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헬리콥터 하까요? 포크레인? 기차? 소방차? 경찰차?”
룬은 길동이 변신놀이하는 것을 기억해 냈다.
“소방차 할게.”
룬이 빨간색 테이블보를 가지고 와서 어깨에 두르고 입으로는 소방차 소리를 내렸다.
“위용 위용 위용.”
“조아요.”
은우가 크레파스로 룬을 그리기 시작했다.
룬은 소방차가 되었다. 소방차의 몸에 룬의 얼굴을 가진 멋진 룬 소방차가 탄생했다.
“다 됐어?”
“네네네네네네.”
룬은 은우의 그림을 보고 빵터졌다.
“내가 소방차가 된 거야? 변신로봇처럼?”
“네네네네네.”
“하하하하하. 은우 덕분에 소방차도 돼 보는구나.”
멋있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은우의 귀여운 상상력 때문에 룬은 그 그림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은우, 이 그림 내가 가져도 되지?”
“네네네네네.”
룬은 소방차로 변신한 자신의 그림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촬영감독 룬다는 은우가 그리는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
‘은우가 저런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니 저걸 영상으로 찍어서 팬들에게 공개해야겠어.’
룬다가 그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