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숨겨진 권능 아세팔리(Aceph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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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숨겨진 권능 아세팔리(Aceph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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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숨겨진 권능 아세팔리(Acephali)
2023.05.17.
‘무아의 공간’에서 에단과 대적했을 당시의 일이었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스스로 정신의 핵을 파괴한 데바를 보며 에단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파괴하면 어떻게 되는 줄은 알고는 있고?”
“알다마다.”
“정신의 핵이 어떤 구조인지는 파악했다. 언제든지 모조품을 만들어 내면 그만일 뿐. 하지만 에단, 너는 다르지.”
“…….”
“핵을 네가 부수지 못하는 이상 너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어. 비어 버린 정신의 틈새를 영원히 헤매게 되는 것이지.”
파스스…….
데바의 손아귀에서 부서진 핵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곳에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데바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무아의 공간’에 데리고 왔다. 그것은 나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데바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만큼 그자가 소중하기 때문인가?”
에단은 데바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은하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어.”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너는 나와 같은 태초의 별. 공허에서 태어나 공허 속에 사는 존재일 텐데. 어째서 미물 따위를 그토록 감싸고 도는 것이지?”
강한 힘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모래 속에 득실득실 모여 사는 개미나 다를 바 없었다. 손에 조금만 힘을 주고 눌러도 그대로 죽어 버리는 나약한 미물.
결코 같아질 수도, 유대감을 느낄 수도 없는 그러한 존재였다.
“그자가 너를 변화시킨 것이냐. 그자의 무엇이 그리도 특별했던 것이냐.”
‘무아의 공간’과 현실을 잇는 포탈이 열렸다. 거대한 소용돌이 형태를 한 포탈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가면서도, 데바는 끈질기게 물었다.
“너의 무엇이, 나와는 다른 것이냐는 말이다.”
왜, 나는…….
너처럼…….
* * *
“……에단.”
로브에 들러붙은 검은 불꽃을 응시하던 데바는 분한 듯이 이를 뿌득 갈았다.
‘에단?’
놈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던 은하는 익숙한 이름에 살짝 움직임을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곳 별의 나들목에 에단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왜 갑자기 데바는 에단을 부른 거지?
그런 의문을 가지면서도 은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놈을 저지하지 않으면 이제 이 채널은…… 지구 전체가 놈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화르륵!
데바의 주변 땅으로부터 두꺼운 불기둥이 솟아올라 놈을 둘러쌌다.
“큭……!”
제게 날아오는 불꽃 덩이에 신경이 팔려 있던 데바는 재빨리 몸을 비틀었으나, 그중 한 불기둥에 닿아 버렸다.
치지직─
로브에 불길이 옮겨붙은 것을 확인한 순간, 데바의 눈에 선명한 격분의 빛이 스쳤다.
“감히……!”
데바는 확실히 그녀에게 밀리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별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신이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데바는 자신의 핵을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에단의 고유 영역인 ‘무아의 공간’을 강제 해제했다. 그 과정에서 소모한 마력은 자그마치 7할 이상.
에단, 그 녀석만 아니었다면 이 먼지 같은 한낱 인간을 상대로 이토록 밀리지 않았을 텐데.
에단, 너만 아니었다면!
네놈만 아니었다면……!
“에단─!!”
데바가 울컥 쏟아 내듯 포효했다.
평소의 데바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어쩌면 정신의 핵이 파괴된 영향을 서서히 보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
눈앞의 저 우성인자를 조디악으로 만드는 것도, 이 채널을 파괴하여 네뷸러의 양분으로 삼는 것도, 선별도, 낙원도,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휘오오오!
은하의 흑염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만 있던 데바가 돌연 두둥실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 팔을 잃으면서 비어 버린 팔소매가 양쪽으로 펄럭이는 그 모습은 마치 흰 날개를 넓게 펼친 것처럼 보였다.
쿠구구구─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거대한 소음이 귓가를 덮쳤다. 피부에 닿는 공기조차 달라진 듯한 감각에 퍼뜩 고개를 드는 순간, 은하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별들이…….’
광활하게 펼쳐진 검은 융단에 소금처럼 뿌려져 있던 별들이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기라도 하듯 데바에게로 모여들었다. 놈의 로브에 들러붙어 있던 흑염은 어느새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진 뒤였다.
휘이이익!
“……!!”
조각조각 난 유리 조각들이 일제히 은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까 전 부서졌던 방어막의 파편이 칼바람처럼 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읏.”
날카로운 유리 파편에 은하의 얼굴, 팔뚝, 손등 할 것 없이 깊고 얕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지금 데바가 하려는 짓을 저지하는 것은커녕 당장에 이 파편들로부터 몸을 숨기는 것조차 벅찬 상황.
몰아치는 파편들로부터 얼굴을 가린 채 간신히 다리 힘으로 버텨 내고만 있던 찰나,
띠링─
문득 들려온 익숙한 효과음에 은하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었다.
[숨겨진 권능 ‘아세팔리(Acephali)’의 발동 조건이 곧 완성됩니다.]
머리 없는 인형 (Headless Marionette) 스킬 사용까지 남은 체력 : 10%]
검은색 시스템창. 처음 보는 색깔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아세팔리?’
기억났다.
은하에게 쌍아궁 양쪽, 루시와 루나의 가호가 동시에 깃든 순간 주어진 ‘권능’이었다. 그에 따라 ‘머리 없는 인형’ 스킬까지 획득했으나 사용법을 알지 못해 없는 셈 치고 있었던 바로 그것.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아세팔리’에 대해서는 루시조차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연이은 훈련에도 실마리조차 얻지 못했던 은하는 이것이 특수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발동하는 종류의 권능이리라 추측했었다.
살짝 눈매를 좁히고 검은 시스템창을 바라보던 중, 그녀의 눈길이 ‘남은 체력 10%’라는 문자에 닿았다.
‘설마…….’
일정 체력 이하, 즉 생명력이 깎여야 발동 조건을 충족한다는 소리인가?
‘발동 조건은…….’
검은 시스템창을 응시하던 은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자살?’
휘이이익!
데바의 공격이 또 한 번 몰아쳤다. 검은 시스템창을 찬찬히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크읏……!”
[남은 체력 9%]
유리 조각이 손등을 파고들고,
[남은 체력 8%]
허벅지를 후벼 파고,
[남은 체력 7%]
양어깨에 못 박듯 꽂혔다.
공격에 가속이 붙을수록 체력 또한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깎여 나갔다.
툭, 투둑…….
기어코 입을 연 상처로부터 붉은 피가 줄줄 쏟아져 내렸다. 은하는 안간힘을 다해 손바닥을 펼쳤으나, 이제 그곳에서는 아주 자그마한 불씨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력이 고갈됐어.’
피가 터질 만큼 세게 아랫입술을 짓씹는 은하 앞으로, 또 한 번 검은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남은 체력 6%]
호흡이 뜨겁고 시야가 일그러진다. 은하는 거의 다 망가진 양산에 상체를 의지하는 것으로 겨우 선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숨겨진 권능 ‘아세팔리’.
은하가 원래 가지고 있던 ‘고양이의 발톱’이 루시의 권능이라면, 아마도 이것은 언니 쪽인 루나가 부여한 또 하나의 권능일 것이다.
루나는 크고 작은 인형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은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머리 없는 마리오네트’ 스킬이 발동되는 것이라면─.
‘내가…… 그 인형들처럼 된다는 건가.’
‘머리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은, 아마 인형이 된 후에는 더 이상 자아가 남아 있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인형을 부리는 것은 누가 되는 거지?’
루나는 이미 없고, 루시 역시 현재 은하와 분리된 상태였다.
만에 하나 아세팔리가 발동됐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대로 죽어 버린다면? 이대로 죽기만 하고 데바를 처치하지 못한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콰직!
“읏……!”
[남은 체력 4%]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공격에 체력은 계속해서 떨어져 갔다. 온몸이 꿰뚫린 듯한 고통에 시야가 멀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희뿌옇게 흐려지는 정신 사이로, 은하는 그날의 약속에 대해 떠올렸다.
‘죽을 각오로 살아왔겠지만, 이번에는 살아남을 각오로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요한이 바라던 일이었으니까요.’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 선 은하는 부서질 듯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망가진 양산이 바르르 떨렸다.
“그 쓰레기로 이제 와 무엇을 하려고?”
코웃음을 친 데바가 턱을 살짝 들었다. 기이한 문양을 품은 오만한 눈동자가 은하를 깔아 보듯 응시했다.
“이대로 별의 잔해에 섞여 떨어져라.”
슈우우우…….
데바의 너덜너덜한 로브가 크게 펄럭이더니, 그의 머리 위로 커다란 빛의 구체가 생겨났다.
비바람처럼 쏟아지던 유리 파편, 성운을 이루고 있던 별 조각들이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철 가루처럼 구체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거대한 창의 모양으로 바뀌어 갔다.
크리스털처럼 찬란하고 눈부신 그 창은 천칭이 기울 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은하는 흐릿하게 번진 눈을 들었다. 검은 시스템창 너머로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거대한 창이 보였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저는, 선배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문득 저를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조금은 멋쩍은 듯,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빛을 머금고서 저를 바라보던 시우.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다. 그때는, 반드시 대답을 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딸은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가고 싶은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무엇보다도 너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근사한 남자친구도 만나면서…… 그렇게 사는 거야, 우리 딸은.’
‘그러면 엄마는 더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아.’
은하는 자신의 왼쪽 손목에 끼워진 소원 팔찌를 감쌌다.
“미안.”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르륵!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듯 거세게 피어난 흑염이 잔해만 남아 있던 양산 뼈대를 소용돌이처럼 휘감았다. 그리고.
푸욱─!
그것을 높이 치켜세운 은하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복부를 찔렀다. 날카로운 양산 끄트머리가 그녀의 살갗을 꿰뚫는 바로 그 순간,
[남은 체력 1%]
“……?!”
쌔애애액!
데바의 몸이 크게 움찔 떨렸다.
뭐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공허에서 탄생하고 지금까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처음 겪어 보는 낯선 감각. 오감이 압도되고 발이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방금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데바의 턱을 따라 또르륵 식은땀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순간,
털썩─
양산을 복부에 꽂은 그 상태 그대로 은하가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
제자리에 황망하게 굳어 버린 데바는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멍하니 은하를 응시했다.
1초,
2초,
그리고 3초가 지나도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통각에 젖어 바르르 흔들렸던 팔다리도, 끊어질 듯 말 듯 미약하게 이어지던 숨소리도 멎었다.
──죽은 것이다.
“……하.”
데바는 잇새로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슈우우우…….
그의 허무함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데바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던 빛의 창이 안개처럼 공기 중에 흩어졌다.
‘도대체 이자의 무엇이 에단의 결핍을 채웠다는 말인가.’
마침내 선택한 그 끝이 자멸(自滅)이라니. 그만큼 어이없고 허망한 결말이 있을까.
그러나 공허한 눈빛으로 은하의 육신을 응시하고 있던 데바는 끝내 보지 못했다. 은하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그녀에게만 떠올랐던 검은 시스템창을.
[숨겨진 권능 ‘아세팔리(Acephali)’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제 머리 없는 인형 (Headless Marionette) 스킬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명령을 입력해 주십시오.]
“모두…… 를…….”
은하는 붉은 피가 주르륵 새어 나오는 입술을 마지막으로 힘없이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