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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머리 없는 인형 (291/306)


#291. 머리 없는 인형
2023.05.18.


“언니가…… 죽었, 어?”

챙, 챙그르르…….

아연의 손에서 단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차게 식은 금속음이 정적 위에 고요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 그런…… 일이…….”

저 멀리 수현 근처에 있던 준환의 얼굴 역시 새하얗게 질렸다. 믿을 수 없었다. 흑염의 프린세스가, 차 헌터님이 죽었다고……?

“치유 헌터! 치유 헌터 없어?!”

번쩍 고개를 든 아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비명을 지르듯 날카롭게 외쳤다.

여기 모인 헌터들 중 치유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그나마 안드레아가 유일했으나, 그는 이미 정신을 잃고 사지를 헤매는 상태였다.

아연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X발, 아무나 괜찮으니 치유 헌터 없냐고!! 제발……!”

아연은 널브러지듯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분한 듯 꽉 눌러 쥔 주먹 아래로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데바.”

은하를 끌어안고 있던 이준이 말라붙은 입술을 천천히 달싹이는 순간,

파아아앗─!

그의 주변으로 선명한 진홍빛의 기운이 포효하듯 퍼져 나갔다. 거대한 괴수의 발 형상을 띤 그것은 날 선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데바를 향해 뻗쳤다.

그 기운이 데바의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 그를 휘감았을 때,

촤악!

데바의 주변으로 황금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그를 위협하고 있던 선홍빛 기운은 수증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이준은 멈추지 않았다.

파아아앗─!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 번.

이준은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끊임없이 마력을 쏟아 냈다.

“【보스…….】”

뒤쪽에 선 바르나바의 시야로서는 현재 이준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찌나 강한 힘을 주고 있는지 이준이 붙잡고 있는 은하의 드레스가 꾸깃꾸깃하게 주름져 있는 것만은 보였다.

보스를 말려야 했다.

현재 그의 상태는 은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반 시체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다리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GIA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염의 프린세스. ‘차은하’라는 그 여자가 보스에게 어떤 존재인지.

“죽여 버리겠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떨구고 있던 아연이 뿌득, 이를 갈더니 격분한 얼굴을 번쩍 들었다.

“죽여 버리겠어!!”

체인 로프를 생성한 아연은 예고도 없이 데바에게 그것을 던졌다. 고작 그 움직임만으로도 복부의 상처가 벌어져 옷이 젖을 정도였으나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

차르륵─!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진홍빛 기운을 막아 내는 것에 벅찼던 것일까. 데바는 아연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하지 못하고 그만 오른쪽 어깨를 내줘 버렸다.

아연의 체인 로프에 휘감긴 어깨가 으드득 부러졌다.

매끄러운 사슬 표면에 챙! 하며 가시가 돋아나는 순간 마치 인간의 것과 같은, 붉고도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먼지 따위가.”

데바는 자신의 어깨를 칭칭 휘감고 있는 체인 로프를 이로 강하게 깨물었다. 목에서부터 입 주변으로 굵직한 혈관과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고,

콰직!

놈의 믿을 수 없는 치악력에 아연의 체인 로프는 유리 조각처럼 박살 났다.

“말도 안……!”

아연의 눈이 크게 뜨이는 순간.

슈욱……!

작게 속삭인 데바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아연이 주변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비트는 것과 동시에, 데바가 아연의 등 뒤에 나타났다.

‘방금 그건…… 순간 이동인가?’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언니는 이런 괴물과 싸웠다는 말인가? 아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데바의 손이 콱! 하고 아연의 목뒤를 움켜쥐는 바로 그때였다.

퍼어어어엉─!!

“크윽……!”

갑작스럽게 엄청난 폭발이 일더니, 데바가 크게 휘청거렸다. 잡고 있던 아연의 목을 놓쳐 버린 그가 안광을 번뜩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철컥!

바주카를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록켈록 기침을 토해 내던 아연 역시 이끌리듯 그곳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속, 일곱 개의 별이 수놓인 진녹색 망토가 펄럭이고 있었다.

“송민─.”

“마스터!”

아연보다 먼저 준환이 외쳤다.

평소였다면 죽을상을 하고 있는 아연을 향해 빈정대는 말 한마디 정도 건넸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그럴 겨를 따위 없었다.
민주는 재빨리 주변을 확인했다.

피투성이가 된 수현을 끌어안고 젖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준환, 데바의 맞은편에서 괴로운 듯 목을 부여잡고 있는 아연 등을 가볍게 훑던 민주의 시선이 어딘가에서 뚝 멈추었다.

‘마에스트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압도적일 만큼의 마력을 살벌하게 뿜어 대고 있는 저자는 분명 마에스트로였다. 살아 있었던 건가? 아니, 그보다 품 안에 저건…….

“……누나?”

스코프에 눈을 가져가려다가 멈칫 굳어 버린 민주. 그의 곁으로 말 울음소리가 홱 하니 가까워졌다.

히이잉─

“정신 차려!”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백색의 유니콘이 빠르게 지나갔다.

헤드 헌터 ‘발키리’. 치유 헌터의 합류로 이제 막 정신을 차린 그녀였다.

“젠장…….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가관이군.”

이어서 등장한 뮤턴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뜯어냈다. 훅, 하고 입김을 불어 넣자 그것은 빳빳하고 굵은 가시로 변모했고 일제히 데바를 향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오느라 아직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그들이었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눈앞에 선 기괴한 홍채를 가진 저 녀석. 쓰러트려야 할 적은 바로 저놈이라는 것.

“감히…….”

콰득.

데바는 자신의 복부에 꽂힌 뮤턴트의 모발 가시를 거칠게 뽑아냈다. 놈의 손아귀 속에서 그것들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권태하고 공허하던 놈의 눈동자는 이미 분노에 사로잡혀 그 빛을 달리하고 있었다. 홍채에 새겨진 듯 박힌 별자리 문양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기이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감히 내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몸을 떨어 대는 놈의 모습에서는 이제 여유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먼지처럼 여기던 하찮은 존재들의 마지막 발악에 기어코 피를 흘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놈을 격분케 했다.

꾸륵, 꾸르르륵…….

데바의 피부 표면이 기괴한 형태로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옷가지의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솟아오르더니,

파아아앗!

천을 뚫고 나온 빛의 창이 사방으로 빗발쳤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체내에서 생성해 낸 그것들은 데바의 마력이 아닌, 생명력을 깎아 빚어낸 그것들은 위험을 수반하는 만큼 기존의 창보다 크기도 컸으며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피해!”

민주가 소리쳤다.

피해야 한다는 것은 그곳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절반은 저것을 피할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고, 나머지 절반은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보스!】”

이준은 공격이 쏟아지기 직전인데도 불구하고 멍한 얼굴로 은하를 끌어안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둥글고 긴 포물선을 그리며 금빛 꼬리와 함께 날아드는 빛의 창이 일순 느릿하게 보이는 듯했다.

“……괜찮아, 은하야.”

허무한 눈빛으로 그것을 응시하던 이준은 꼭 쥐고 있던 은하의 손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고, 피딱지가 달라붙은 입술을 조용히 그녀의 손등에 가져갔다.

“……괜찮아.”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빛의 창은 이제 목전에 도달해 있었다.

단념한 기색으로 조용히 눈을 감으려던 바로 그 순간.

꿈틀─

“……!”

손바닥 표면으로부터 미약한 감각이 느껴졌다. 움찔 어깨를 떤 이준이 서서히 은회색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과 동시에,

화아아악!

새까맣고 거센 불길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그것은 그들을 덮치려던 빛의 창을 그대로 꿀꺽 삼켜 버렸다.

불길에 타들어 간 빛의 창은 순식간에 시커먼 재가 되어 바스스 바닥 위에 떨어져 내렸다.

흑염. 흑염이었다.

휘오오오오…….

재를 머금은 바람이 마치 새까만 안개처럼 널리 흩어져 시야를 가렸다. 이준은 뒤늦게 자신의 팔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또각─

맑은 구두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시야를 방해하던 새까만 잿바람이 서서히 멎어 갔다. 그리고.

“……은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준에게 안겨 있던 은하가 어느새 그의 팔을 빠져나가 온몸에 흑염을 휘감은 채 두 다리로 서 있었다.

고오오오…….

불길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마치 살아 있는 뱀의 혀처럼 느릿하게 흩날렸다.

“그럴 리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데바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저자의 숨통을 끊었다. 확실히 심장이 멎은 것도 확인했다.

적잖이 당황한 데바가 처음으로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을 뿐. 뿌득, 살벌하게 이를 간 데바는 다시 자신의 몸으로부터 빛의 창을 무수히 뽑아냈다.

쌔애액!

바람을 가르고 화살처럼 빗발치는 빛의 창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은하에게로 쏟아졌다. 그러나 은하는 제자리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슈와아아악!

은하로부터 보자기처럼 넓게 펼쳐진 까만 불길은 달려드는 빛의 창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단숨에 집어삼켰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감지한 낯설고도 기묘한 감각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차, 은하……?”

“…….”

은하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아니, 대답은커녕 이준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차 헌터님이 살아 계셨던 거군요!”

한편 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준환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의 곁에서, 민주는 굳은 얼굴로 바주카를 살짝 내렸다.

‘뭔가 이상해.’

미심쩍은 기색을 품은 민주의 밤색 눈동자가 은하를 훑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은하는 시체처럼 창백하게 식은 안색으로 이준의 품에 힘없이 안겨 있었다.

여기저기에 깊고 얕은 상처가 셀 수 없이 빼곡했으며, 무엇보다 그녀의 복부에는 뼈대만 남은 양산이 깊숙이 꽂혀 있기까지 했다.

‘아무리 누나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기적에 가까운 자가 치유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비단 민주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휘리릭! 말에서 내린 발키리도 굳은 얼굴로 눈매를 좁혔다. 은하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조차 현재의 은하가 평소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톡, 톡, 톡, 톡…….

솜덩이가 가볍게 땅을 치는 듯한 발소리가 기묘한 정적 위를 걸었다. 고양이 인형 모습을 한 루시는 달리다시피 은하에게 다가가 그녀의 종아리에 살짝 손을 가져갔다.

「……니?」

그대로 은하의 다리를 껴안고 눈물을 흘릴 줄로만 알았던 루시는 돌연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루, 나…… 언니?」

그리고 다음 순간.

화르륵!

잠시 잠잠해졌나 싶었던 은하의 흑염이 다시금 살벌하게 피어올랐다. 가시처럼 뾰족한 형태를 한 그것은 평소에 보아 왔던 은하의 흑염과는 사뭇 달랐다.

촤아아악─!

마치 수중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빠르고 유연하게 주변으로 뻗어 나간 검은 불꽃. 밤이 내려앉은 듯 이 공간 전체가 새까맣게 물들였다.

슈와아아……!

주변에 피어난 흑염 일부가 은하의 몸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검은 드레스 위로 검은 불꽃이 겹치며, 불길의 움직임에 따라 검고 긴 머리카락 역시 일렁이듯 느릿하게 휘날린다.

온통 까맣게 물든 그녀가 유일하게 가진 색은 단 하나, 황금 빛을 머금은 눈동자 한 쌍이었다.

“……지저분한 발악을.”

슈우우욱!

빛의 창이 어둠을 베어 내며 날아들었고, 누군가 말릴 새도 없이 은하에게 꽂혔다.

왼쪽 가슴. 정확히 심장 부근이었다.

“차은하!”

기우뚱…….

창이 꽂힌 반동으로 인하여 몸이 크게 흔들리면서 허리가 아치처럼 뒤로 젖혔다.

그러나 잠시 후,

“…….”

푸슉─

가슴에 꽂힌 창을 맨손으로 거머쥔 은하는 그것을 단숨에 뽑아내 정면을 향해 내던졌다.

쌔애애액!

빛의 창은 데바에게서 날아왔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은하의 손을 벗어났고,

푸욱!

“……커헉!”

은하에게 그랬듯이 데바의 왼쪽 가슴을 똑같이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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