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9. 별의 나들목 (289/306)


#289. 별의 나들목
2023.05.16.


회전 계단 끝자락에 도달한 은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여기가…… 별의 나들목?’

검은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새까만 하늘에 모래처럼 촘촘하게 뿌려진 별들이 반짝였다. 간혹 별들이 유독 빼곡하게 모여든 곳은 거대한 띠 형태를 하고 환상적이면서도 아득한 빛을 뿜어 댔다.

셀 수 없이 많은 별 아래로 융단처럼 깔린 계단. 그곳에 서 있자니 마치 우주의 한복판을 두둥실 부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

소리 없이 힐끗 돌아간 은하의 검은 눈동자가 데바에게 닿았다.

언제까지고 눈앞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은하에게는 목적이 있었으니까.

‘……이곳에서라면.’

비로소 놈과 단둘이 남았다. 지켜야 할 사람이 없는 이곳이라면 어떤 걱정도 거리낌도 없이 마음껏 전투가 가능할 것이다.

한쪽 손에 마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그녀가 슬그머니 주먹을 말아 쥐는 순간이었다.

“이곳은 오래전 나와 에단, 두 태초의 별이 탄생했던 장소다.”

불현듯 데바가 입을 열었다.

까만 은하수 위로 수증기처럼 흐릿한 안개가 뭉치더니 곧 넓게 펼쳐지며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보아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채널들이다. 너희의 언어를 빌리자면 ‘차원’이겠지.”

……차원?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은하가 이끌리듯 시선을 돌렸다.

‘저건…….’

밀짚모자를 쓰고 허리를 굽혀 밭을 일구고 있는 사람, 만원 지하철을 타고 졸린 눈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사람,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있는 사람……. 저마다 다른 복장에 다른 모습을 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나와 에단은 이곳에서 수많은 채널을 보아 왔다. 각 채널에는 우리와 닮은 외형을 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셀 수도 없이 빼곡했지. 어느 채널을 보아도 여기만큼 공허하고 쓸쓸한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네뷸러로 인간들을 데려온 건가?”

“그렇다. 하지만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지.”

먼눈으로 은하수 위 사람들의 모습을 응시하던 데바는 혼잣말을 되뇌듯 중얼거렸다.

“미개하고 나약한 존재와 나는 섞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을 사육하고 관리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나 그들로는 결코 나의 결핍을, 이곳의 공허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공허?”

“그래, 공허. 그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나와 닮은 이들을 유심히 선별하기로 했다. 그들은 조디악이라는 이름의 강력하고도 찬란한 별이 되어 내 곁에 섰지. 그러나…….”

거기까지 말한 데바는 은하를 향해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기이한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그럼에도 나의 공허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너라면 무언가 다를지도 모르겠구나.”

너는 나와 같은 태초의 별, 에단이 선택한 자니까. 그렇게 말하는 데바 앞에서 은하는 스르륵 입술을 다물었다.

훌쩍…….

어디선가 들려온 울음소리에 은하는 반사적으로 힐끗 눈을 돌렸다.

은하수 위 별들을, 그 안의 생명체들을 비추고 있는 그곳에, 한적한 공원 그네에 앉아 울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지구 어딘가에 살고 있는 아이인지 아주 다른 채널의 아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은하는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를 그 아이에게서 문득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 말수도 없고 표정 변화도 많지 않았던 은하는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당시를 떠올려 보면, 집 근처 놀이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뛰어노는 것보다 모래밭에 혼자 앉아 개미굴을 빤히 들여다보곤 했던 기억이 났다. 혼자인 것이 신경 쓰여 말도 못 하는 개미들에게 괜스레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 보기도 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개미들이 은하의 말에 대답해 주는 일은 없었다.

은하는 놀이터를 뛰노는 또래들과도, 모래 속 개미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이 생기긴 했지만, 이후 성인이 되고 게이트가 나타나며 세상이 한순간에 뒤바뀌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적인 고유 능력, 몬스터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적의, 죽어 버린 감정 탓에 한동안 훈련소의 누구도 은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어쩌면 은하 스스로 그러길 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하는 그곳에서 이준과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매일매일 목숨을 걸었고, 서로의 등을 지켜 주기도 했다.

비로소 지금에서야 은하는 깨달았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당시의 나는 외로웠던 거구나, 하고.

그리고…… 눈앞의 데바 역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은하는 아랫입술을 질끈 짓씹었다.

“─고작.”

데바에 의해 완전히 망가져 버려 손잡이와 뼈대만 겨우 남은 양산. 그것을 부러질 듯 쥔 은하의 손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너는……!”

쌔애애액!

은하의 주변으로 피어난 흑염이 순식간에 새까만 꼬리를 그리며 데바를 향해 돌진했다.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은하는 양산을 쥐지 않은 손바닥을 조준하듯이 데바를 향해 펼쳐 들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끌어모은 마력이 검게 요동치더니,

슈르르르…… 퍼엉!

강한 폭발음과 함께 불꽃 구체가 방출되었다.

“……그렇군.”

작게 중얼거린 데바 앞에 두껍고 투명한 유리 막이 나타났다. 놈이 공격을 방어할 방패를 ‘창조’한 것이다.

“네게는 그것이 ‘고작’인가.”

티잉─!

은하가 쏜 흑염은 그것에 의해 보기 좋게 튕겨 나갔다. 하지만.

파직, 파지지직…….

확실히 보았다. 데바가 ‘창조’한 유리 방패에 금이 가는 것을.

당황한 데바의 눈이 살짝 커지는 틈을 타고, 은하는 쉬지 않고 몇 차례 더 불꽃을 쏘아 붙였고─.

쨍그랑!

거듭된 충돌 끝에 방어막은 결국 산산조각이 났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방어막 파편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너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마치 별 가루 같기도 하고 유리 조각 같기도 한 파편들 가운데, 새까만 은하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데바.”

* * *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윽…….”

은하가 데바와 함께 사라지고 꽤 긴 정적이 지난 뒤, 작은 신음을 토한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꿈틀 움직였다.

흐트러진 금발 아래 초점 없이 멍한 은회색 눈동자가 몇 번이고 느릿하게 깜빡임을 반복했다.

“읏…… 하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준은 자신의 위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대신해 창에 찔린 안드레아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이준의 흰 셔츠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안드, 레아……? 윽.”

미간을 좁힌 이준이 쿨럭 피를 토해 냈다.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무기로 몸을 찔린 듯한 상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안드레아 이상으로 피투성이인 몸을 멀거니 내려다보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스!】”

이준이 깨어난 것을 본 바르나바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늘 끼고 다니던 안경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로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저 멀리 쓰러져 있던 아연이나 준환 등의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물론 그중에 제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보, 보스……. 다행, 입니다……!】”

바르나바의 두 눈에 환희와 안도를 담은 뜨거운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보스가, 보스가 살아 계신다. 안드레아가 어설프게나마 치유 스킬을 사용한 보람이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준은 아직 초점이 돌아오지 않은 멍한 눈빛으로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헌터들은 다들 어딘가에 크게 다친 것처럼 보였다. 개중에는 빛을 잃은 창에 꿰여 축 늘어진 자도 있었다.

느릿하게 주변을 응시하던 이준의 시선이 문득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기묘한 회전 계단. 그 아래 조그맣고 까만 그림자가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고양이. 고양이 인형이었다.

「언, 니…… 히끅, 가지 마아…….」

찌릿─

인형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이준이 돌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잔뜩 안개가 낀 머릿속에서 흐릿한 광경이 얽히고설켰다.

무너지는 제주도의 모습.

저를 덮치는 미노타우로스 무리.

우뚝 솟은 백색 성.

위협스레 이빨을 드러내던 사자 한 마리와 흰 로브를 쓴 조디악…….

정돈되지 않은 머릿속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 오는 복잡한 기억들. 그 끝에서 이준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은하…….”

마치 그렇게 입력되기라도 한 것처럼 기계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그의 두 눈에 초점이 살아났다.

벌떡!

“은하! 차은하! 읏…….”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준은 전신을 꿰뚫는 듯한 날 선 통각에 그대로 다시 고꾸라져 버렸다.

그 와중에도 무너지는 자신의 몸을 두 무릎으로 버티며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들었다. 고통에 젖은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정면에 위치한 회전 계단으로 향했다.

워낙 흐릿한 기억이라 긴가민가했지만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다.

은하는 저곳으로 사라졌다.

데바와 함께 말이다.

“【보스!】”

바르나바가 헐레벌떡 다가와 이준을 부축했다. 그러는 그 역시도 부상과 출혈이 심각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 따위 없었다.

“【보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X발, 이거 놔!”

답지 않게 살벌한 욕설을 뱉은 이준이 바르나바를 거칠게 밀쳐 냈다. 온전치 않은 몸 상태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바르나바는 이준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바르나바는 이준의 허리를 부여잡다시피 껴안으며 그를 저지했다.

“【보스! 이미 늦었습니다! 그녀는 벌써 한참도 전에 사라졌─.】”

“은하야! 제발! 은하야!”

이준은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회전 계단을 향해 실성한 것처럼 외쳤다.

바르나바가 기억하는 보스의, 이준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설었다.

“차은하─!!”

목이 찢어질 듯 그녀를 부르짖던 중, 결국 이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젠장……!”

쿵!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은 이준이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는 순간,

사아아아─

환한 빛 무리가 다시금 그곳을 덮쳤다.

땅에 이마를 파묻고 있던 이준은 이끌리듯 서서히 젖은 뺨을 들었다.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회전 계단. 그 가장 높은 곳에서 무언가 검은 그림자가 휘익! 떨어졌다.

툭─

이준은 그 물체를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관절이 힘없이 꺾여 있는 그것은, 이준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은…….”

흑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검은 드레스. 한 번도 제대로 만져 보지 못한 부드럽고 긴 흑발.

거의 다 망가져 버려 뾰족한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은 양산은 무슨 일인지 그녀의 복부를 꿰뚫은 채였다.

「언, 니……?」

루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눈앞으로 싸늘하게 식은 은하의 시체가 던져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단지 거기까지였다면 이준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준은 은하와 같은 얼굴을 한 몬스터를 몇 번이고 목격했으니까.

눈앞에 던져진 이것이 은하와 닮은 얼굴을 한 몬스터거나 인형일 것이라고, 데바의 함정일 거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

한쪽만 남은 그의 팔이 바들바들 앞으로 뻗어 나가 그녀의 팔목에 닿았다.

‘나보다는 네가 사는 것이 나을 테니까.’

실을 엮어 만든 두 개의 소원 팔찌가 이준의 손가락과 겹쳐지는 순간,

“제안은 끝이다.”

회전 계단 위에서 데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체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도 않을 정도로 높낮이 없고 무미건조한 말투.

휘이이잉─

불에 타들어 가 형체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흰 로브가 바람이 휘날려 멀리 사라졌다.

찢어진 이마 아래로 별자리 문양이 새겨진 황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지금부터, 이 채널을 파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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