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4)화 (223/306)


#224. 인형의 저택 (1)
2023.03.12.


은하는 인천항 근처에서 만났던 괴담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때 괴담의 존재는 분명 이준에 의해 말살되었다. 은하 역시 그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그때 그 녀석은 쓰러지자마자 픽셀화되어 공중에 흩어졌어.’

따라서 은하는 그것이 높은 확률로 ‘본체’가 아닐 것이라 예상했다. 껍데기뿐인 꼭두각시이거나 복사본, 그것도 아니면 환영, 셋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 예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후에도 괴담의 존재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시시때때로 이어졌다. 더구나 오늘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을 보면…….

‘역시 본체가 따로 있는 거야.’

즉 눈앞의 이 녀석도 복사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휘이익!

은하는 나무에서 아래로 내려가 ‘그것’의 눈앞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시험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이준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어쩌면 녀석과 대화가 통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너는 누구지?”

은하의 기대와는 달리 눈앞의 존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각선으로 작게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니 은하의 말이 들리기는 하는 것 같지만 그뿐이었다.

그때였다.

“찾, 았다.”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던 ‘그것’이 멍한 기색으로 입술을 뻐끔거리는가 싶더니,

“……?!”

은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휙!

은하는 반사적으로 공중으로 튀어 올라 거리를 멀리 벌렸다.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착지자세를 취한 은하가 작게 욕설을 읊조렸다.

역시 이준의 말이 옳았던 걸까. 놈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찾, 았다, 찾았…… 다……!”

번쩍 고개를 들자 녀석이 벌써 거리를 상당히 좁힌 상태였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는 공격당한다.

단순하기까지 한 일직선 돌진이다. 다시 한번 회피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 봤자 녀석은 다시 쫓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방어는 공격.

휘이익!

은하는 양산을 크게 휘둘렀다. 녀석이 멈칫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둥근 포물선을 그린 양산이 일격에 ‘그것’의 목을 내리쳤고,
빠각!

나무토막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녀석은 곧 땅 위로 풀썩 쓰러졌다.

조금 놀란 듯 은하의 눈이 커졌다.

일격에 해치울 생각이었지만, 손에 담은 힘 이상으로 강한 타격을 준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수박을 반으로 쪼개려다 산산조각을 내 버린 느낌이랄까.

그루가 기존보다 양산이 더 단단해지게끔 수리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녀석이 보기보다 단단하지 않은 것일까.

“찾았, 다, 찾았…….”

부서진 낙엽 위에 내동댕이쳐지듯 쓰러진 녀석은 그럼에도 뻐끔뻐끔 입을 움직여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은하는 양산에서 시선을 거두고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기괴한 각도로 목이 꺾인 녀석은 마치 살충제를 뒤집어쓰고 엎어진 바퀴벌레처럼 팔다리를 움찔움찔 떨어 대고 있었다.

은하는 녀석의 숨통을 완벽히 끊기 위해 대검을 쥐듯 양산을 두 손으로 잡고 높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파스스…….

같은 말을 반복하던 녀석은 곧 픽셀화가 되어 마치 입자가 고운 가루처럼 공중으로 파스스 흩어졌다.

‘그때와 같아.’

인천항에서 괴담 속 존재와 조우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가루가 되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사체. 그러나 안심하기는 이르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아직 더 남아 있다고.

은하는 발길을 옮겨 산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갔다.

숲이 깊어질수록 나무가 우거진 탓에 햇살이 잘 들지 않았다. 분명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한밤중인 것처럼 어두웠다.

검은 균열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중 은하는 또 한 번 괴담 속 존재와 조우하게 되었다.

“찾았, 다…….”

한 마리.

“찾, 았어…….”

두 마리.

“찾았─.”

그리고 세 마리째 해치웠다.

어딘가 본체가 따로 있을 것이며, 은하를 닮은 모습을 한 이 존재들은 복사본 같은 것이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뭔가 이상하군.’

은하는 눈앞에서 픽셀화되어 사라지는 ‘그것’의 사체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불멸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인 모양이다. 동두천, 그러니까 검은 균열 주변에서 괴담의 존재가 유독 많이 목격되고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은하가 숲에 들어오고 만난 건 총 네 마리였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확실히 이상하다.

검은 균열에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은하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자극하여 이쪽으로 이끌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하를 보자마자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미친 듯이 돌진해 오는 녀석들의 태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대사를 입에 담았다.

─찾았다, 라고.

‘나를 찾고 있었던 건가?’

즉 은하의 존재를 파악한 녀석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다.

다행히 다섯 번째 괴담의 존재를 조우하기 전에 목표 지점인 검은 균열을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근처에 조사원은 보이지 않았다.

은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살펴보기로 했다.

검은 균열은 스파크를 튀기다 못해 마치 은하의 흑염처럼 타오르는 것에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그 크기가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은하의 신장과 엇비슷할 정도.

불멸을 통해 이 검은 균열이 게이트로 이어지는 일은 없다고 전해 들었다. 다만 문제는…….

‘하나가 아니잖아.’

은하는 어안이 벙벙해 주변을 살펴보았다.

검은 균열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불이 옮겨붙는 것과 비슷했다.

낙엽 더미 위, 주변 나무의 뿌리 부근, 굵은 나뭇가지 등 곳곳에서 크고 작은 검은 스파크가 튀겼다. 개중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은하를 삼킬 것처럼 생생하게 일렁이고 있는 곳도 보였다.

‘분열하고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그냥 둘 수 없는 문제다.

불멸에서는 아니라고 했지만 만에 하나 이게 게이트의 전조 증상 같은 것이라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균열의 개수만큼 여러 개의 게이트가 한 번에 생성된다는 소리일 테니까. 어쩌면 하나로 합쳐서 거대한 균열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주변만 확인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은하는 눈앞의 수많은 검은 균열들을 보며 망설였다.

‘차 헌터님, 제 말 잘 아시겠지요? 헌터님께서는 이제 이전과는 다릅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터이자, 헤드 헌터 1위이시니까요. 그러니까 이전처럼 함부로 위험한 상황에서 몸을 던지시면 안 됩니다.’

최근 들어 질릴 만큼 같은 소리를 해 대던 제휘가,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허리춤을 짚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헌터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소립니다. 그러니 제발, 무엇보다 헌터님 스스로를 가장 우선시해 주세요.’

……알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대로 서울로 돌아갔다가, 만일 그사이에 이 균열이 폭주하기라도 한다면? 게이트가 출현하기라도 한다면? 만일 그게 남해안 때처럼 초대규모 언노운 게이트가 되어 버린다면?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원래라면 결론을 내리자마자 행동에 옮겼을 은하였겠만…….

‘문자라도 남겨 두는 게 좋겠어.’

은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제휘에게 짧게나마 상황을 설명하고,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를 대비해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 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은하가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액정을 두드리려던 순간이었다.

파직, 파지지직─

검은 균열을 휘감고 있던 스파크가 거센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디지?’

은하는 메시지를 보내려다 말고 주변을 빠르게 확인했다. 수많은 검은 균열 속, 유독 강한 스파크가 튀는 방향.

‘저기다.’

구부러진 나뭇가지 사이에 반쯤 형상을 숨기고 있는 검은 균열. 미세한 정도였으나 다른 균열에 비해 아주 약간 더 짙은 검은색을 띤 그것.

파직, 파지지직─

은하가 그것을 향해 정확히 시선을 꽂는 순간, 검은 균열이 마치 그 시선에 반응이라도 하듯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몇 차례나 직접 조사를 나가 봤는데, 그냥 검은 연기가 뭉친 상태로 작게 스파크가 튀고 있을 뿐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더라고.’

가장 최근 검은 균열 조사단으로 파견되었던 재민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눈앞의 검은 균열은 마치 은하를 위협하거나, 혹은 초대하는 것처럼 점차 거센 스파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은하가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것은 마치 블랙홀처럼 은하를 빨아 당겼다. 회피는 불가능했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찰나.

은하는 검은 균열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그녀가 서 있던 축축한 흙 위에는 휴대전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 *

갑자기 시야가 밝아져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은하는 뺨을 간질이는 바람에 서서히 눈을 떴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아직 겨울이 온전히 가시지 않은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바람이 봄의 그것처럼 따스했다.

이곳은 은하가 있던 어두컴컴한 숲속 한가운데가 아니었다.

‘휴대전화랑 양산은?’

퍼뜩 정신을 차린 은하가 양손을 확인했다. 다행히 양산은 꼭 붙들고 있었지만, 균열에 빨려 들면서 휴대전화는 손에서 놓쳐 버린 모양이다.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제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이제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은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검은 균열이 자신을 빨아 당긴 것으로 보아 이곳이 균열의 내부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인데…….

게이트라고 하기에는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몬스터의 기척도 아직까지는 없다.

그렇다면 아스트나 예가임이 있었던 곳처럼 탑의 내부, 즉 네뷸러일까? 하지만 이곳의 풍경은 은하가 겪어 왔던 네뷸러의 풍경과도, 게이트의 풍경과도 사뭇 달랐다.

고급스러운 대리석이 깔린 바닥. 높은 천장에는 새하얀 날개를 펼친 천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유화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보아하니 서양 건물처럼 보이는데…….’

내부 인테리어만 보아서는 어느 이름 모를 옛 귀족의 저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은하는 고개를 돌려 금장 장식이 박힌 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창문 대신 누군가의 초상화가 복도의 시작부터 끝까지 주르륵 전시되어 있었다.

저택 주인의 초상화라기에는 인물들이 액자마다 달랐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그 모두가 드레스를 입은 소녀 혹은 여인이라는 점이었다.

홀린 듯이 초상화를 응시하던 은하가 문득 오른쪽을 확인했다.

“…….”

일자로 쭈욱 이어진 복도.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기만 한 복도였지만, 그 방향을 주시하는 은하의 눈매는 일순 가늘게 변했다.

희미한 먼지 냄새, 그리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인 복도와는 달리 저 방향에서는 아렴풋한 향기가 났다. 꽃 내음 같기도 하고 향유 같기도 한 낯선 냄새.

‘이곳에서 가만히 저택 풍경만 바라보고 있는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겠지.’

은하는 냄새를 따라 걸어가 보기로 했다.

또각, 또각─

청명한 구두 소리가 고요한 복도 위로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

‘이 방인 것 같은데.’

문 앞에 서자 은하의 코끝을 맴도는 향기가 사뭇 짙어졌다.

진한 향기 탓인지 후각이 둔해져 다른 미세한 냄새까지는 인식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문 너머에 몬스터가 있을지 없을지, 후각으로는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현재까지 딱히 살의 같은 것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은하는 양산을 바로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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