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2)화 (224/306)


#222. 단서
2023.03.10.


주변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하급 몬스터 다섯 마리쯤 은하에게는 맨손으로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쿠웅─!

마지막 몬스터 한 마리가 땅에 내동댕이쳐지고, 은하가 놈의 신체를 뚫었던 주먹을 스르륵 거두었다.

“괜찮으세요?”

제휘와 그루를 향해 묻자, 그루를 감싸고 있던 제휘가 고개를 빠르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얼굴이나 몸 곳곳에 생채기가 가득하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우렁찬 것을 보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제야 날카롭게 치솟아 있던 은하의 눈매가 일순 부드러운 기색으로 돌아왔다.

“그쪽은…….”

은하는 제휘에게서 그루를 향해 또르륵 시선을 옮겼다. 처음 보는 여자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경황상 아마 이 사람이 의혁의 사촌 동생이겠지.

은하가 그루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제휘가 나서서 그녀를 소개했다.

“아, 헌터님. 이쪽, 표그루 씨가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제휘의 말에 그루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니, 나는…… 아무것도…….”

“그루 씨, 왜 얼굴은 빨개지고 그러세요?”

“시, 시끄러워.”

은하는 말을 더듬는 그루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매니저님을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난 그냥, 정말로 아무것도 못 했는데…….”

“무슨 소리십니까, 그루 씨. 그루 씨가 아까 방패를 들고 나서지 않으셨으면 전 죽었을 겁니다. 죽지 않았더라도 크게 다쳤겠죠.”

그루 씨 덕분입니다. 제휘는 배시시 웃었다.

“…….”

하지만 그루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아 제 손에 들린 붉은 방패 ‘적룡의 가호’를 허망하게 응시했다.

망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번쩍번쩍하던 방패 표면이 닳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마 깡통처럼 찌그러져 버렸겠지.

“그냥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달려들었을 뿐이야. 당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개죽음을 당했겠지.”

방패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그루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은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알고도 감싸 줬잖아요.”

……뭐? 그루가 고개를 들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감싸는 일,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은하의 새까만 눈동자에 그루의 멍한 얼굴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고맙습니다, 목숨을 걸어 줘서.”

“……아.”

그루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는 그 순간,

“표그루!”

한 발짝 늦게 의혁이 도착했다. 그는 주변에 널브러진 몬스터의 사체를 뛰어 넘어 그루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다친 곳은?”

“……난 멀쩡해.”

평소의 퉁명스러운 얼굴로 돌아온 그루는 의혁을 향해 툭 내뱉듯 대꾸했다. 다른 곳으로 휙 고개를 돌리기 전, 그녀의 시선이 잠시 은하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한편 그루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의혁은 그제야 찬찬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몬스터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그리고 형태와 덩치를 보았을 때 예측할 수 있는 레벨은 기껏해야 10에서 20 정도. 이쯤이야 의혁이었더라도 금방 정리할 수 있었을 테다.

다만 그루와 제휘를 지키면서도 몬스터의 중심부, 그러니까 손바닥 중앙의 눈알만을 깔끔하고 정확하게 노린 솜씨는 상당히 놀라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분명 같이 출발했었는데.’

단말기에서 경보가 울린 직후, 은하와 의혁은 동시에 망치 길드 본부를 뛰쳐나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점 거리가 벌어지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 의혁의 시야에서는 은하가 사라지고 없었다.

실제로 은하는 의혁보다 훨씬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몬스터를 처리했다.

의혁은 그녀의 신체 능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서질 않았다.

‘화신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각성자, 아니 S급 헌터라고 하더라도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신체 능력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한민국 출신 헌터 중 신수의 화신으로 알려진 건 늑대의 현 주인 백랑 외에는 없어.’

전투 현황을 지켜본 것도 아니고 그녀와 직접 겨루어 보지도 않았으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그가 봐 왔던 어떤 헌터와도 수준이 다른 것 같았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의혁은 은하에게 다가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은하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제휘와 그루가 어떻게 됐을지는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뒤늦게 의혁이 도착했을 테고, 하급 몬스터이니 단번에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중상은 면치 못했겠지.

“인사는 필요 없어. 이미 받고 싶은 걸 받은 것 같거든.”

받고 싶은 것……? 의혁이 슬쩍 시선을 들자,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은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비로소 걸음을 멈춰선 은하는 상체를 숙여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그건…….”

의혁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휘리릭, 탁!

은하는 길고 가느다란 물체를 허공을 향해 익숙한 손짓으로 휘둘렀다.

“의뢰 물품, 확실하게 전달받았다.”

그녀는 한 손에는 검은 양산을, 다른 한 손에는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찢어진 종이 가방 사이로 드레스의 검은 천이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의혁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그루를 향해 힐끗 고개를 돌렸다.

“표그루, 너…….”

그가 뻐끔뻐끔 입을 여는 순간,

“이곳입니다!”

협회에서 출동한 요원들이 도착했다.

이후 그들이 상황을 정리하며 게이트 등장에 휩쓸렸을 민간인을 수색하는 동안 해당 게이트를 낙찰한 ‘백일홍’ 길드의 토벌대가 이어서 현장에 도착했고, 해당 게이트 부근이 일시적으로 폐쇄되며 상황은 무사히 일단락되었다.

* * *

망치 길드 본부에 돌아온 은하와 제휘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마쳤다.

제휘는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트렁크에 모두 싣고 문을 닫았다.

“차가 망가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네요. 산 아래에 주차해 두었던 것이 천운이었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제휘는 은하를 지나쳐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은하가 자연스럽게 앞좌석에 올라타려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루가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아…….”

제휘 역시 그루를 발견한 모양인지 차 문을 다시 닫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루 씨, 감사했습니다.”

“어, 뭐…… 그래. 잘 가고.”

짤막하게 대꾸한 그루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끝으로 툭툭 땅을 건드리기만 할 뿐 자리를 떠나지 않는 그녀는 어쩐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형씨, 술 좀 마시나?”

“네?”

“아까는 운전한다고 안 마셨잖아.”

제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루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루는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시선을 들어 제휘를 응시했다.

“나 곧 퇴근인데, 오랜만에 서울 가서 한잔할까 싶어서.”

“그러시군요.”

제휘는 그제야 그루의 말귀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는 원래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거든요, 하핫.”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리는 제휘 앞에서 그루의 미간이 얼핏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기분 나쁜 표정이라기보다는…… 조금 무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라면 ‘아, 그래?’ 하며 휙 돌아섰을 그루였지만,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애꿎은 돌멩이만 휙휙 걷어차고 있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은하는 생각했다.

‘매니저님이랑 같이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은하는 그루에 대해 아는 점이 없었지만 착각이 아니라 확신할 정도로 그녀의 얼굴에 속마음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제휘도 쉽게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미련이 있어 보이긴 했다. 은하가 함께 있는 데다, 서울까지 그녀를 데려다줘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거절하고 있는 것이겠지.

힐끔힐끔 두 사람의 낯빛을 살피던 은하는 망설이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주는 잘 만드시잖아요, 매니저님.”

“예?”

깜짝 놀란 제휘가 고개를 들어 은하를 쳐다보더니 “아, 그, 그렇죠!” 하며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사 둔 재료가 많이 없을 텐데……. 음, 저기, 라면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말끝을 흐리며 그루를 힐끔 쳐다보는 제휘. 조금 놀란 기색으로 눈을 깜빡거리던 그루는 얼떨떨하게 눈을 내리깔며 답지 않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국물은 적게 부탁해.”

“예, 국물 적게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기분 탓일까. 주변 기온이 살짝 따듯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표현하자면 마치 이곳에만 봄이 내려앉은 듯한 감각.

그들로부터 살짝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서 있던 은하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 몽글몽글하고 간지러운 분위기는 뭘까.

아무래도 은하가 없는 사이 둘 사이에 무언가 피어난 것 같았다. 빨갛게 물든 두 사람의 귀를 못 본 척하며, 은하는 먼저 차에 올라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왜 우리 집에 온 거지?’

은하는 자신의 앞에 놓인 라면 그릇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송송 썰어 넣은 파에 아삭한 콩나물, 적당히 익힌 계란까지, 환상적으로 완성된 라면은 절로 침이 꿀꺽 삼켜질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제휘는 미리 냉동고에 보관해 두었던 수제비 반죽까지 꺼내 라면에 넣어 주었다. 그야말로 초호화판 인스턴트 라면에 그루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오, 굉장한데.”

“더 끓여 드릴 수 있으니 많이 드세요.”

자, 헌터님도 얼른 드십시오. 제휘는 은하 앞에 라면을 덜 만한 작은 그릇과 수저를 놓아 주었다.

“매니저님.”

은하가 작게 제휘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제휘가 펄쩍 뛰더니 붕붕 고개를 젓는 것이 아닌가.

“……네?”

은하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깜빡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루도 이상한 눈초리로 제휘를 응시했다.

“그냥…… 깍두기도 좀 꺼내 달라는 말이었는데.”

“앗.”

까, 깍두기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제휘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가 싶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냉장고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 제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루까지 집으로 온 것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즐거워 보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맛있는 라면과 술 한잔하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은하도 만족이었다.

아르헨티나에 길게 머무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이 인스턴트 라면과 신 김치, 그리고 소주의 맛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한 잔, 두 잔, 세 잔……. 그렇게 잔을 비워 가다 보니 어느새 은하도 그루와 말을 트게 되었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아. 이 매니저 형씨가 왜 그렇게 목숨 걸고 양산이랑 드레스를 고치려고 했는지 말이야.”

잔에 소주를 따른 그루가 식탁 위에 탁! 소주병을 놓고는 실실 웃었다.

“당신이 루루였기 때문이지.”

그녀는 아까부터 은하를 ‘루루’라고 부르고 있었다.

빈 소주잔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던 그루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임세온, 그 녀석이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 당신 사인이라도 받아 갔을 텐데. 걔가 맨날 노래를 부르던 ‘영웅’이라는 존재가 아마 당신 같은 사람을 칭하는 말이었을 테니까.”

“세온 씨라는 분이 바로 그…….”

제휘가 조심스레 그루의 안색을 살폈다. 소주잔을 새롭게 채운 그루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2년 전에 의리도 없이 먼저 뒈져 버린 내 친구.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였지.”

오늘이 그 녀석 기일이야. 그루는 그렇게 세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짝꿍이 되며 친해졌고, 집 근처의 같은 태권도장을 다니며 단짝이 되었다고.

술기운이 오른 탓에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줄줄 늘어놓기는 했지만, 제휘와 은하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그루는 어느 순간부터 술을 마시는 것을 관두고 친구의 이야기에 몰두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비교적 늦게 각성하기는 했지만 꽤 잘나가는 헌터였어. 조금만 더 있으면 A급으로 승급을 했을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S급이 될 거라면서, 자기 랭크에 맞지 않는 게이트에도 겁도 없이 따라 들어가는 녀석이었어. 미쳤냐고 욕했지만 사실은…… 꽤 응원했지.”

메마른 웃음을 피식 흘리는 그루의 귓가에는 아직도 세온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내가 언젠가 엄청 유명해져서 길드를 세운 다음에 널 스카우트할게. 그루 넌 최고의 제작 헌터니까, 나도 최고가 되어서 환상의 콤비가 되는 거야.’

“그랬던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뒈져 버린 거야.”

“사고…… 였나요?”

제휘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루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그날은 녀석이 있던 길드가 게이트를 낙찰한 날도 아니고 그저 파견 조사를 나갔던 날이었는데…… 거기서 크게 다치고 돌아왔어. 내가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늦었지. 수술을 한다 한들 살리지 못할 수준이었어.”

그루는 꾹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위험한 일도 아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임무였다면, 당시 B급이었던 세온에게 그런 걸 언질도 없이 맡겼을 리가 없을 테니까.

“각성자가 그 정도로 크게 다친 거라면 단순히 실족을 했다거나 사고를 당한 건 아닐 것 같은데, 몬스터와 조우한 걸까요?”

“나도 모르겠어. 그 녀석이 했던 말은 그냥…….”

살짝 미간을 좁힌 그루는 그날, 친구의 죽음을 두 눈으로 지켜봤던 날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었다.

“──어깨 쪽에 별자리 모양의 타투를 새긴 사람을 봤다고 했던 것 같아.”

그 사람과 싸운 것인지, 다른 누군가와 싸운 것인지 같은 자세한 이야기까지 듣지는 못했다. 그런 말을 하기도 전에 숨을 거둬 버렸으니까.

적이 누가 됐든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더라면 도망쳤으면 됐을 테다.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때 세온에게 투쟁심을 불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그루가 선물했던 무기일 테다.

‘그 붉은 검만 없었더라면 임세온은 진즉에 도망쳤을 거야.’

그루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겁 없는 녀석이라고 한들, 그루가 아는 세온은 이기지 못할 것이 뻔한 적을 향해 맨몸으로 달려들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즉 승패가 분명한 싸움에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무기…… 아니, 그루 자신이었다.

세온의 죽음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루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어?”

지금까지 가만히 그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은하가 사뭇 굳은 얼굴로 물었다.

“별자리 모양의 타투?”

그뿐만이 아니었다. 덜컥! 의자를 젖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상념에서 벗어난 그루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아마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거기가 어디지?”

은하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갖다 둔 채 그루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답지 않게 조금 큰 목소리로,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그루 쪽으로 목이 길게 쭉 뻗었다.

“그 친구가 파견 조사를 나갔다는 거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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