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3)화 (222/306)


#223. 검은 균열
2023.03.11.


이틀 뒤, 불멸 길드 본부.

“언니이이!”

은하를 발견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작은 그림자. 아연이었다.

“언니, 보고 싶었어요, 으헝헝. 언니는 요니 안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가? 은하는 머릿속에서 날짜를 떠올려 보다가 이내 관두고 물었다.

“성윤 씨는?”

오늘 은하가 불멸 길드를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도성윤의 부름 때문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시간을 내서 본부에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은하를 호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꽤 심각한 일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설마 아연이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아연은 불멸 길드의 현 부마스터인 허재민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곳에 있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가요, 가요!”

아연은 마치 제 안방 드나들 듯 불멸 길드 내부로 들어섰다.

탑을 봉쇄했다는 건 들었다, 왜 나를 부르지 않았냐, 얼마나 서운했는 줄은 아느냐, 다친 곳은 없냐…… 아연이 쉴 새 없이 떠드는 사이, 성윤이 기다리고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 오셨군요.”

그곳에는 허재민도 함께였다.

은하는 성윤의 안내를 받고 직사각형의 기다란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그들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근 들어 수도권을 중심으로 싱크홀 현상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뉴스에서 보긴 했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번에 대한민국의 탑이 봉쇄되면서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라 본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협회 측으로부터 아직 들은 이야기가 없기에, 은하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걸까. 성윤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정부와 협회는 검은 균열 조사를 의뢰할 만한 길드를 찾고 있었는데, 유환의 죽음 이후 수입이 변변치 않았던 불멸은 다른 길드보다 한발 앞서 의뢰를 수주했다.

즉 현재까지 검은 균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성윤과 재민, 그 밖의 불멸 길드원들과 아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수수께끼의 검은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알고 계실까요?”

“검은 균열…… 이요?”

은하의 표정이 변했다.

게이트의 난이도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색깔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흰색이 C급, 녹색이 B급, 붉은색이 A급, 그리고 언노운 게이트가 검은색. 간혹 게이트 입장 후 난이도가 급변하는 등의 예외도 있기는 했으나, 이것이 일반적인 분류 방법이었다.

은하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성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 처음에는 협회 측에서도, 저희도 언노운 게이트의 전조 증상…… 즉 ‘게이트 시드(Gate Seed)’가 아닐까 하여 비밀리에 조사를 해 왔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만 보자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성윤은 은하에게 종이 뭉치로 된 자료를 건넸다. 보고서 형태로 된 그 자료집에는 그들이 지금까지 검은 균열을 조사하면서 기록해 둔 내용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축약하자면 검은 균열은 내부에 진입이 불가하며, 내부에서 바깥으로 낙수 몬스터가 등장하는 현상도 전무, 현재까지 이렇다 할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몇 차례나 직접 조사를 나가 봤는데, 그냥 검은 연기가 뭉친 상태로 작게 스파크가 튀고 있을 뿐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더라고.”

실제로 가장 최근에 검은 균열 조사단으로 파견되었던 재민이 곁에서 증언했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는 손에 쥔 자료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날 여기까지 부르지 않았을 텐데요.”

은하가 고개를 들어 성윤을 바라보았다.

“……네. 협회를 통해 공유받은 기록을 확인해 보면, 처음 검은 균열이 발견된 건 약 3년 전입니다.”

“3년 전이라면.”

“헌터님께서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에 갇히셨던 시점 즈음이죠. 게다가…….”

성윤이 재민으로 향해 힐끔 눈짓했다. 끼고 있던 팔짱을 스르륵 푼 재민은 의자 등받이에 대고 있던 등을 곧추세웠다.

“흑염의 프린세스 괴담이 이전보다 훨씬 더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쯤부터지.”

“그건, 그 검은 균열과 괴담이 관련이 있다는 소린가?”

“확실하지는 않아. 말했듯이 검은 균열 자체에서는 아직 어떠한 현상도 반응도 일어나고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재민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은하가 앉아 있는 의자, 그 곁에 바로 세워 둔 검은 양산을 눈에 담은 그가 입을 열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목격담이 유독 한군데에서만 뚜렷하게 이어지고 있어.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장소에서 검은 균열이 잦게 출현하고 있지.”

“……뭐?”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어. 괴담 속 그놈은 워낙 전국 각지에 귀신처럼 출몰했으니. 하지만 우연이 아닐 경우도 대비해야 하니까 당신을 부른 거야. 협회 측은 아마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 당신에게 전하지 않을 거거든.”

거기까지 말한 재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웅인걸. 확실시되지 않은 사건에 투입하기에는 이미 몸값이 불어날 대로 불어나 버렸으니까.”

“인정. 우리 언니가 이제 그런 잡일을 도맡을 레벨은 아니긴 해.”

아무렴 그렇고말고. 고개를 연차 끄덕이는 아연의 곁에서 성윤이 테이블을 향해 검지를 내밀었다.

“헌터님, 이것을 보십시오.”

테이블 위에는 커다랗게 인쇄된 대한민국의 지도가 놓여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를 표시해 두기라도 한 듯 군데군데에 빨간 압정이 꽂혀 있었다.

“압정이 꽂힌 자리는 최근 3년간 검은 균열의 등장이 확인된 지역입니다.”

대충 눈으로만 세어 봐도 20군데 정도는 되어 보였다.

“첫 한 해 동안은 한 해에 3, 4회 정도 출현하던 것이, 최근 들어 더욱 잦아지면서 한 달 주기로 출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자료가 쌓이다 보니 점차 명확해지더군요. 정확하게는 수도권 중심이 아니라 이곳.”

탁.

성윤의 검지가 한군데를 정확히 가리켰다. 은하의 시선이 그에 따라 소리 없이 움직였다.

성윤이 가리키는 지역을 눈에 담은 그 순간, 이틀 전의 그루와 나누었던 대화가 은하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거기가 어디지? 그 친구가 파견 조사를 나갔다는 거기 말이야.’

그때 분명 그루는 이렇게 답했다.

“……동두천.”

지도에 시선을 고정한 은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예. 최근 1년간 동두천 주변에서 제보된 흑염의 프린세스 목격담은 현재 정리 중인데, 인터넷에는 워낙 가짜 정보가 많다 보니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일곱 건이 넘더군요.”

동두천 주변에서만 1년에 최소 일곱 건이 넘는 목격담이 제보되었다. 그 목격담이 단순히 허풍이나 날조가 아니라면,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무엇 하나 확실한 정보는 없습니다만……. 협회와는 별개로 저희 쪽에서도 조사를 이어 갈 생각이니, 헌터님께서도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따로 조사해 보도록 하죠.”

은하는 지도에 꽂힌 빨간 압정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바스락…….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가 몇 번 이어지더니 우뚝 멈추었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늘 일정을 마친 은하는 제휘에게 볼일이 있다고 양해를 구하고는 여기까지 혼자 찾아왔다.

은하가 있는 곳은 경기도 동두천시. 동두천에서도 동쪽, 포천과 마주하고 있는 산의 경계 부근이었다.

이 근처에 최근 검은 균열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성윤에게 전해 들은 은하는 자세한 좌표를 건네받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협회 제복을 입은 몇몇 인물이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이 근처가 맞는 것 같았다. 아마 협회에서 의뢰한, 혹은 직접 파견한 조사단원들일 테다.

‘눈에 띄면 일이 귀찮아지겠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드레스까지 입고 온 상태였으니 신분을 속이기도 힘들 테다. 은하는 그들에게 모습이 발각되지 않게끔 기척을 죽인 채 움직였다. 그 정도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휘리릭─

검은 구두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마치 날짐승처럼 빠르게 넘나들었다.

산맥 부근부터 점차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동쪽으로 쉬지 않고 이동하던 은하의 얼굴이 문득 옅은 그늘이 진다.

‘그 드레스, 누구에게 받았지?’

조디악 중 하나, 예가임은 은하의 드레스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너 혹시…… 쌍둥이를 만났나?’

놈은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까지의 정보로 유추해 보았을 때, 조디악은 12황도와 연관이 있는 듯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전 세계에 나타난 탑이 11개뿐이라는 점이었다. 지나가다 본 뉴스에 의하면 11개의 탑을 모두 부수고 나면 숨겨진 마지막 탑이 나타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듯했으나 그것도 그저 예측일 뿐, 진실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탑의 등장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닐뿐더러, 공식적으로 탑 입장이 가능한 헤드 헌터조차 본격적으로 탑을 공략할 생각이 아직은 없어 보이니 그럴 만도 했다.

어찌 됐든 탑을 봉쇄하며 팝업된 시스템창은 예가임이 있던 그 탑을 가리켜 ‘천갈궁(天蠍宮)’이라 명시했다. 탑이 12황도와 연관이 된 것이 맞다면 예가임은 12황도 중에서도 전갈자리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예가임이 언급한 쌍둥이는 아마도 12황도 중 ‘쌍아궁(雙兒宮)’ 즉 쌍둥이자리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쌍둥이자리와 이 드레스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거기까지는 유추가 불가능했다.

‘어쩌면…….’

은하는 이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시선만 힐끔 내리깔아 제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확인했다.

흑염의 프린세스 세트를 은하에게 지급해 주었던 것은 고양이였다. 그렇다면 쌍둥이자리와 고양이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구체적인 추리가 불가능했지만 직감이, 그리고 상황이 그 방향으로 은하를 이끌고 있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말이 있다.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직접 움직이는 것만큼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오늘 은하가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그루의 친구가 동두천에서 보았다는 ‘별자리 모양의 타투를 한 사람’.

동두천에서 자주 목격되는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

그리고 쌍둥이자리 조디악─.

“……?”

멈칫.

연결될 듯 연결되지 않는 퍼즐 조각을 머릿속으로 끼워 맞추던 은하는 문득 한곳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바스락─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은하가 아니었다. 은하는 키가 큰 나무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은하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조사단원? 아니다. 이 기척은─.’

바스락, 바스락─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더니 돌연 우뚝 멈추었다. 나무 아래로 작게 움직이던 검은 그림자가 스르륵, 이쪽을 향해 턱을 치켜든다.

은하의 것보다는 조금 더 낡은 검은 드레스. 너덜너덜한 레이스가 달린 양산과 바람에 나부끼는 긴 머리카락. 그리고…… 어두운 그늘에서도 선명하게 빛이 나는 황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너는─.”

은하의 몸이 돌처럼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나무 아래에서 턱을 쳐든 채 이쪽을 보고 웃고 있는 여자.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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