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9)화 (221/306)


#219.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2023.03.07.


그 순간 어제 우연히 엿들었던 망치 길드원들의 대화가 제휘의 뇌리를 스쳤다.

‘친구가 죽은 건 안타깝지만, 마스터랑 우리는 뭔 죄냐고.’

확실하진 않았으나 제휘는 이 무덤의 주인이 아마 그 죽은 친구이리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쯤 제휘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루는 제휘가 내려 둔 짐을 뒤적여 술병을 꺼냈다.

“옛다, 이건 네 거다.”

터프하게 맥주병을 딴 그녀가 그것을 비석 위에 콸콸 들이부었다. 놀란 제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루 곁에 섰다.

“그,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어, 얘는 나보다 더한 술꾼이거든.”

그루가 킥킥 웃었다.

“이걸로는 아마 부족할 거야. 그렇지?”

그러더니 또 한 병을 따서 마저 콸콸 쏟아 버렸다. 젖은 비석으로부터 뚝뚝 술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루는 털썩 그 앞에 주저앉아 새로운 술병을 땄다.

“어때, 형씨도 한잔?”

그러더니 제휘에게 마시라는 듯 불쑥 내밀었다. 그래도 말을 튼 사이라고 술까지 권하는 것을 보니 그녀와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안은 기뻤지만 제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운전을 해야 해서요.”

“성실하시기도 해라.”

그루가 코웃음을 치더니 술병을 기울여 그대로 자신의 입에 들이부었다.

그렇게 한 병, 두 병, 세 병……. 무덤 앞에서 몇 병이나 술을 비웠을까. 약 1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쯤, 그루의 얼굴은 취기에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기…… 그루 씨? 그만 드셔야 하지 않을까요?”

제휘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자, 그루가 “딸꾹.” 하고 크게 몸을 들썩이더니 코앞까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매니저 형씨, 그거 알아?”

지독한 술 냄새가 훅 하니 코를 찔렀다. 인상을 찌푸릴 만도 했지만 제휘는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고 “무얼 말입니까?” 하며 물었다.

“무기라는 건 있잖아, 상대만 해치는 게 아니야. 까딱 잘못하면 휘두르는 본인도 다쳐 버리지.”

“예, 저도 식칼로 생선을 다듬다가 손가락을 많이 잘라 먹었죠.”

그루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취한 탓인지, 오랜만에 그리운 이를 찾아온 탓인지 몰라도 평소에 비해서는 조금 둥글둥글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말 잘했네. 식칼도 마찬가지지. 만든 사람의 의도는 요리를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기잖아. 무기라는 건 더 그렇거든.”

거기까지 말한 그루가 술병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아무리 툴툴 털어도 빈 술병에서는 더 이상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루는 툭, 하고 아래로 술병을 내렸다.

“여기 이 녀석은, 내가 만든 무기 때문에 죽었어.”

“네……?”

“내가 죽인 거지.”

제휘가 소리 없이 눈을 돌려 그루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보다는 조금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훑고 지나친다.

그루는 비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요히 덧붙였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뿐만이 아니야. 내가 이 일을 10년도 넘게 했거든. 만들고 고친 무기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는 소리지. 그 무기 중에, 사람에게 해를 끼친 무기가 얼마나 될까?”

“…….”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무기를 고치거나 제작하는 일에 회의감이 들더라. 더는 망치를 들기 싫어졌어. 미안해.”

제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하다니, 그녀가 자신에게 사과를 해 올 줄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원래라면 ‘그루 씨가 사과도 할 줄 아시는군요.’라며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제휘는 조심조심 그루의 안색을 확인했다. 늘 도끼처럼 부릅뜨고 있거나 졸린 듯이 퀭하던 그녀의 눈이 지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눈동자에 깃든 슬픔과 죄책감이 제휘에게까지 전달이 되었다.

‘그래서 그루 씨는…….’

문득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먼지 쌓인 작업실.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던 그녀의 모습. 다시는 망치를 들지 않겠다며 방문객들을 내쫓던 태도.

아마도 친구의 죽음이 그 정도로 큰 충격이었던 것일 테다.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버릴 만큼.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을 꺼내는 것이 좋을까. 한참 동안 고민하던 제휘는 이내 서서히 입을 열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부산 언노운 게이트에 제 친동생이 휘말렸던 적이 있어요.”

“부산 언노운 게이트라면…… 그 자갈치 시장 근처의?”

“네, 거기요.”

제휘는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위로 그때의 기억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는 동생을 구하겠다고 무턱대고 부산으로 내려가 게이트에 뛰어들었죠. 그때 저와 동생을 구해 주신 건 흑염의 프린세스, 우리 차 헌터님이셨습니다. 차 헌터님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정말 영웅처럼 등장하셨어요. 그리고 양산을 휘둘러 적을 무찔렀죠.”

거기까지 말한 제휘는 다시 시선을 내려 그루와 시선을 마주했다.

“적어도 저와 제 동생은 헌터님에게, 헌터님의 양산 덕분에 살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헌터님께서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고 계시죠. 그루 씨 말대로 무기를 휘두르다 보면 의도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문자 그대로 사고잖아요.”

“…….”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해서 무기를 만든 사람과 무기를 휘두른 사람의 의도마저 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헌터님은 제게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진 영웅이세요.”

그루는 아무 말 없이 제휘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표정을 일관한 그녀는 손가락만 까딱까딱 움직여 술병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제휘는 빙긋 웃었다.

“제게 바보냐고 물으셨죠? 남의 길드에서 왜 호구처럼 청소질이나 하고 앉아 있느냐고요.”

“……그랬지.”

“전 차 헌터님처럼 무기를 들고 싸우지도 못하고, 그루 씨처럼 무기를 만드는 일도 할 수 없거든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니까. 제휘는 그루를 향해 스르륵 상체를 돌렸다. 그리고 푹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헌터님의 드레스와 양산을 고쳐 주세요, 그루 씨.”

“…….”

그루는 입을 다물었다.

술병을 만지작대던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덧 멈추어 있었다.

사라락─

느릿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제휘는 답이 돌아올 때까지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양 땅에 이마를 박다시피 상체를 숙였다.

그때 바스락, 짐을 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젤리에 대한 답례야.”

툭.

제휘의 눈앞에 무언가 떨어졌다. 검은 드레스가 든 종이 가방과 양산이었다.

“받은 건 확실히 돌려주는 편이라.”

“그루 씨……!”

제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루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정색했다.

“오글거리는 표정 짓지 말고 빨리 받아. 마음 바뀌기 전에.”

제휘는 허둥지둥 종이 가방과 양산을 챙겼다. 드레스는 아직 꺼내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던 양산이 말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정말이다. 정말 고쳐 주셨어!

“그루 씨!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와락!

격분한 제휘가 감정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그루를 껴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

빠악!

제휘의 턱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는지 그루의 눈빛이 변했지만, 이미 주먹이 나간 뒤였다.

“재, 재성함미아…….”

제휘는 얼얼한 턱을 매만지며 사과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기쁨에 잠겨 있었다. 혹시라도 다시 빼앗길까, 그는 종이 가방과 양산을 품에 꼭 안았다.

‘그렇게도 좋을까.’

그녀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비록 그것은 제휘도 보지 못했고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듯했지만 말이다.

지금 제휘의 모습은 마치 예상치도 못한 생일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이 참 귀엽…….

‘미친.’

퍼뜩 정신을 차린 그루가 붕붕 고개를 저었다. 술이 오르긴 했나 보다.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술기가 더 심해지기 전에 얼른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만 내려가자.”

그루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휘적휘적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그루 씨! 여기 짐들은요?”

“알아서 챙겨 오면 되잖아.”

“아, 천천히 가요, 그루 씨! 챙기는 데 시간 좀 걸린단 말이에요.”

“거참 삐약삐약 시끄럽네.”

그루가 인상을 찌푸리며 휙 등을 돌렸다.

“……!”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정신없이 짐을 챙기고 있던 제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게 술병을 차곡차곡 한데 모아 두었으면 치우기도 쉽잖아요. 이렇게 아무렇게 던져 두니까…… 응? 그루 씨, 왜 그래요?”

“……뒤.”

“네?”

제휘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루는 제휘의 어깨 너머를 보며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뒤에 귀신이라도 나타난 걸까? 그루의 시선을 따라, 제휘가 천천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파직, 파지직…….

무덤 너머로 녹색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불꽃 같았던 그것은 점차 크기를 더하더니 이윽고 제휘를 집어삼킬 듯 거대하게 변했다.

“그, 그루 씨, 이건……!”

녹색 게이트.

B급 게이트 등장의 전조였다.

* * *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망치 길드 본부 근처에 까만 리무진이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뒷좌석 문을 연 뒤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고마워요.”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고 차에서 내린 것은 평상복 차림의 은하였다.

원래라면 조금 더 늦게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헤드 헌터 회담에서 중도 퇴장한 은하는 예정보다 빨리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귀국하자마자 곧장 이곳, 망치 길드 본부로 달려온 참이었다. 그런데…….

[나] [오전 11:12] 매니저 님, 지금 한국 도착했습니다.

[나] [오전 11:13] 드레스랑 양산은 어떻게 되었나요?

[새로운 착신 메시지 0통.]

어째서인지 오전부터 지금까지 제휘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은하가 아는 한 제휘는 지금까지 늦잠을 자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잠수를 탈 인물은 더더욱 아니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휴대 전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은하를 보며 시우는 말했다.

‘내일까지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요? 이제 막 입국한 참이니 선배도 피곤하실 텐데.’

‘아니, 드레스랑 양산이 신경 쓰이기도 하니까 직접 가 보는 게 낫겠어.’

‘정 그러시다면…….’

다른 일정이 있었던 시우는 함께 가지는 못하는 대신 공항에서 망치 길드까지 데려다줄 차와 운전수를 준비해 주었다.

어두운 회색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 입구 쪽의 망치 마크를 확인한 은하는 천천히 내부로 들어섰다. 그러자 푸르고 반투명한 벽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입장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골든 카드가 필요합니다.」

입장부터 골든 카드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제휘에게 골든 카드를 건넨 지금으로써는 가지고 있는 여분이 없었다.

「입장 자격 확인이 불가합니다.」

삐, 삐, 삐─ 웨에엥!

몇 번의 기계음이 이어지더니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푸른 벽이 돌연 붉은색으로 물들고, 곧 검은 복장의 남성 두 명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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