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안 오네.’
은하는 힐끗 가게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화를 받으러 간다던 시우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가게 입구를 지키고 있던 밀리터리 그룹은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아마 멀지 않은 곳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겠지만.
“우선 나가자.”
입구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도 장사에 방해가 될 테니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은하는 민주를 데리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선배.”
마침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던 시우와 마주쳤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전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중요한 일인 듯싶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어쩔까?”
은하가 시우에게 게이트 핵을 불쑥 내밀었다. 시우가 “그건…….” 하고 말끝을 흐리는 사이, 은하의 손을 잡고 있던 민주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누나가 잡은 거니까 누나 거잖아요?”
시우의 푸른 눈이 소년을 향한다. 소년은 도토리 같은 눈을 생긋 휘며 웃었다.
“가지고 가도 되는 거 아니에요?”
“…….”
그런…… 건가?
은하는 물끄러미 게이트 핵을 응시하더니 일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민주를 바라보던 시우가 이번에는 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배, 혹시 미국과 연관이 있습니까?”
“미국?”
게이트 핵을 집어넣은 은하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딱히.”
미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던 과거가 분명 존재하긴 했으나, 실제로 가지는 않았다. 심지어 여행 목적으로도 말이다.
“그렇습니까.”
시우의 얼굴이 다시금 가라앉았다. 사실 한 번 더 물어볼 수도 있었다. 정말 없는 것이냐고. 그러나 시우는 그러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때 벨 소리가 울렸다. 시우의 휴대전화다. 짧게 혀를 찬 그는 전화를 받았다.
“지금 가.”
그리고 다소 신경적으로 끊어 버렸다. 단 1초의 전화가 그렇게나 성가셨는지 그는 딱딱한 얼굴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연락드리죠. 그리고…….”
그의 푸른 시선이 마지막으로 소년, 민주에게 향했다.
‘무슨 짓을 할 것 같진 않지만.’
빤히 그를 응시하던 시우는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게 꼭 톡을, 아니 전화 주세요.”
얼음처럼 차갑게 식은 두 눈은 여전히 민주에게 고정된 채였다. 은하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꼭입니다.”
재차 강조한 시우는 급한 걸음으로 골목을 돌아 사라졌고 남은 것은 민주와 은하 둘뿐이었다.
은하는 시우가 사라진 방향에서 등을 돌리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이 아이를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데…….
“꼬마야. 혹시 친척이라거나 다른 가족들은 없어?”
“없어요.”
민주가 즉답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럼 집은?”
“……집도, 지금은 없어요.”
이것은 반쯤 거짓말이었다.
집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집 대신 군단 길드의 본부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따지자면 그곳이 집인 셈이다. 그러나 민주는 구태여 그 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난처하게 됐군.’
은하는 소년을 보며 작은 한숨을 삼켰다. 현재 시각, 약 저녁 10시. 즉 이제 슬슬 행인들도 집으로 돌아가고 가게 간판이 꺼질 시간이란 소리였다. 게이트가 출현한 현대에서는 당연한 풍경.
‘우선 집으로 데리고 갔다가, 내일 아침 일찍 경찰서에 데리고 가는 편이 좋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상한 밀리터리 그룹은 이곳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소년을 경찰서에 내던지고 돌아간다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우선 우리 집으로 가자.”
“누나 집이요?”
민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불편하면…….”
“아뇨, 좋아요! 갈래요, 갈래!”
은하의 말을 싹둑 자른 민주가 방방 뛰기 시작했다.
세상에. 집이라니.
이 사람도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황금색 군번줄을 가지고 있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의 집이라면 황금색 군번줄에 버금가는 온갖 귀한 물건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상상만 해도 기대감에 가슴이 쿵쿵 춤을 추는 듯했다.
“그럼 우선.”
홱.
돌연 시야의 높이가 훌쩍 높아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민주는 자신이 그녀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엥?’
휙, 휙, 휙.
뒤꿈치로 땅을 박찬 그녀가 스프링처럼 튀어 근처 2층 건물 꼭대기에 섰다.
그 움직임이 마치 돌담을 오르는 길고양이처럼 가볍고 날렵해서, 이질감을 느끼려야 느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들부터 따돌리는 편이 좋겠지.”
“…….”
“잠시 멀미가 날 수도 있어. 괜찮니?”
“어…… 괜찮아요.”
무심결에 대답한 민주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 순간, 은하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올랐다.
휘리릭─
이번에는 훨씬 더 높이.
밤하늘에 뜬 달이 코앞까지 다가온 기분이었다.
달빛을 등진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비단실처럼 흩날린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시야가 홱홱 바뀌었다.
‘이 사람.’
평범한 실력의 헌터가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S급인 송민주를 제외하고서도 군단의 모든 인원은 대한민국 상위 랭커였다.
상위 랭커 정도가 되면 기척을 숨기는 실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고난도 게이트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중요한 수단이니 말이다.
군단의 모든 인원은 A급 이상의 게이트를 돌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런 그들의 기척을 파악했다는 말은 그녀 역시도 A급 이상의 게이트를, 혹은 그 이상의 게이트를 돌 수 있다는 증명이라 여겨도 될 터.
더군다나 이 속도.
‘대체 정체가 뭐야.’
자신을 공주님처럼 안은 채 건물 지붕 위를 땅따먹기를 하듯 휙휙 날아다니는 그녀를 보며, 민주는 저도 몰래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 실력자를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영 이상한데.’
현재 한국의 S급은 총 여섯 명.
그들은 서로의 얼굴뿐만 아니라 실명까지도 알고 있었다.
‘아, 그 녀석은 빼고.’
제일 마지막으로 S급 반열에 합류한 주제에 시답잖은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백랑인지 흑랑인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헌터들 간의 관계 형상은 A급으로 내려가더라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터들 중 S급 헌터의 비율은 단 0.01%. 다음으로 이어지는 A급 헌터의 경우 0.2% 수준이었다.
D, E, F급 헌터가 전체의 9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때, A급 이상의 랭커는 엄청난 소수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바닥에서 몇 년 이상 구른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A급 이상의 헌터라면 자신과 비슷한 위치의 헌터들과는 싫어도 한 번 이상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란 이야기.
게이트가 아니더라도, 경매 현장이나 시스템 마켓에서라도 마주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단 소리다. 이 누나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헌터인가?
민주는 은하에게 안긴 채 힐끔 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쯧쯧.’
작게 혀를 찬 민주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녀석들,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아하니 이미 한참 전에 그녀를 놓친 모양이다. 이래서는 군단의 미래가 어두워도 너무 어둡지 않은가.
‘다시 교육을 하든가 해야지. 그리고─.’
공주님처럼 안긴 민주는 힐끗, 은하를 바라보았다.
‘이 누나는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겠어.’
그러나…….
그리 결심한 것이 참 무색하게도, 얼마 있지 않아 민주는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헐.”
은하의 집.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민주의 동그란 눈은 새까만 무언가를 발견했다.
‘드레스?’
새하얀 붙박이장 고리에 걸려 있는 그것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분명 드레스다. 치렁치렁한 레이스와 리본을 응시하던 민주가 도르륵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건.’
그 상태로 바닥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손에 집었다. 아래에 놓여 있던 검은 양산이었다.
그것을 손에 쥔 순간, 벼락처럼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얼마 전 길드 본부에서 있었던 일이다.
‘마스터, 이거 보셨어요?’
TV를 보고 실소를 터뜨리던 준환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그 당시 민주는 새로운 무기 ‘불꽃 팡팡 바주카포’의 완성을 앞두고 있었기에 대충 답했던 것 같다.
‘뭔데?’
‘여기, 이 여자요. 흑염의 프린세스인가 뭐시기. 완전 골 때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