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으음…….”
째깍째깍.
침묵 위를 달리는 시곗바늘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조금 앓는 소리를 낸 제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이분은 미국에서 오신 캐서…….”
시우는 쌩하니 제휘를 제치고 캐서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국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무슨 볼일이신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캐서린이 아니라 병풍이 된 제휘였다. 제휘는 “아…….” 하고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캐서린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지금 중요한 사안을 제치고 이곳에 온 거라서요. 이해 바랍니다.”
시우는 소파에 앉으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했다.
캐서린은 괜찮다는 듯 빙긋 웃으며 찻잔을 내려 두었다.
“갑작스런 방문으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신시우 헌터님. 저는 체이서 길드의 자회사, 클램프 매니지먼트 소속 캐서린 허드슨이라고 합니다.”
캐서린은 제휘에게 그랬듯 시우에게도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시우는 가늘어진 눈매로 캐서린의 명함을 지그시 응시했다.
체이서. 진짜 체이서다.
도대체 미국 헌터 길드가 늑대에게, 흑염의 프린세스에게 무슨 볼일이란 말인가.
우선 경계하고 의심하라. 그것은 늑대의 오랜 방침이기도 했다. 어쩌면 개의 특성일지도 몰랐다.
명함에서 시선을 뗀 시우가 이번에는 천천히 그녀를 훑어보았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 에메랄드그린 눈동자가 초승달 형태로 휘었다.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 능숙하다는 표현에 걸맞은 미소였다. 즉 시우가 싫어하는 유형이다.
“오늘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늑대와 계약한 흑염의 프린세스에 대해 제안이 있어서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찾아온 겁니까?”
시우의 오리발에 캐서린이 빙그레 웃었다.
“그야 그녀가 계약한 것은 늑대가 아니라, 신시우 헌터님. 당신이니까요.”
“…….”
“아닌가요?”
시우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뜯어내듯 깊이 바라보았다.
캐서린 허드슨. 아니, 체이서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언제부터 그것을 알게 된 것일까.
시우가 힐끗 제휘를 향해 도끼눈을 떴다. 제휘는 비둘기처럼 푸드덕 날아오르더니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저 아니에요! 그리 강력히 주장하는 듯했다.
“이것을.”
캐서린은 곁에 두었던 캐리어 가방을 집어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정갈한 손길로 가방을 열어 보였다.
“……!”
내용물을 확인한 제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가방 속에는 작은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엄청난 양의 달러 지폐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도대체 저게 다 얼마야?’
꿀꺽. 눈치 없이 목젖이 움직였다.
다만 시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달러가 아닌 캐서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볼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그런 거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우 앞에서도 캐서린은 용케 미소를 유지했다. 마치 그런 것에 오랜 면역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제 상사께서는 흑염의 프린세스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도중 계약을 해약하게 되는 형태가 되겠지만, 제안에 응해만 주신다면 그에 대한 위자료는 당연히 저희 쪽에서 전액…….”
“거절합니다.”
시우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돌아가서 상사에게 전하세요.”
그의 푸른 눈이 일순 무섭게 가라앉았다.
“관심 끄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인지, 캐서린은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린 듯합니다. 상사께서는 위자료뿐만 아니라 체이서가 5년간 특별 육성한 A급 헌터를 3년 계약직으로 보내 드리겠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물론 무임금으로요.”
“A급이 아니라 S급 헌터를 내어놓아도 답은 같습니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꽁꽁 얼어붙었다. 분명 창문이 없는 방인데도 어디선가 바깥바람이 불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렇습니까.”
캐서린은 안경을 매만지더니 가방을 다시 닫았다. 이 전개 또한 예상한 바였던 것일까? 그 모습이 딱히 아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캐서린과 시우 사이에서, 제휘는 초조한 얼굴로 둘 눈치를 살폈다.
‘아니, 대표님은 왜 저렇게 화가 나신 거지?’
천하의 늑대에게 저따위 푼돈을 내밀었다는 것에 자존심이라도 상한 것일까?
하긴. 제휘에게 있어서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큰 금액이었지만, 늑대의 작은 주인인 시우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를 이해하기는 힘들 듯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그리 전달하도록 하죠.”
“잠깐.”
캐서린이 방을 빠져나가기 직전, 시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의 상사라는 사람. 누군지는 말해 주고 가야지.”
헌터 협회도 아니고 한국의 다른 대규모 길드도 아닌, 바다 건너 미국 길드에서 흑염의 프린세스를 원하는 까닭이 대체 무엇일까.
‘그것도 뒤를 캐내어 저 정도나 되는 금액을 선뜻 내놓으면서까지.’
이유가 무엇이든 시우는 은하와의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은하를 원하는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서 뭘 하는 놈인지는 알아야겠다.
시우의 푸른 눈을 마주한 캐서린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만일 그녀가 이러한 눈빛에 내성이 없었더라면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릴 만큼 차갑다 못해 시린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수십 번이고 겪은 사람이다. 그러니 주눅 들 리가 없었다.
“제가 아니라 그분께서 직접 소개하실 겁니다.”
달칵.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지요, 신시우 헌터님.”
***
다음 날 아침.
민주에게 침실을 내어준 은하는 소파에서 눈을 떴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커튼을 걷었다. 남향인 만큼 눈부신 아침 햇살이 대리석 바닥 위로 파도처럼 부서졌다.
작게 하품을 한 은하는 실내화를 신고 소년이 있는 침실로 향했다.
이제 슬슬 아침을 먹고 경찰서로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소년은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
아니다.
우뚝 제자리에 멈춘 은하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실내가 조용했다.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똑똑.
침실 문을 두드렸다.
돌아오는 답은 없다.
몇 번의 노크를 더 한 뒤, 은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제자리에 선 은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구김 하나 없는 침대 시트.
꼭 닫혀 있는 창문.
가지런한 실내화.
어제 소년을 집에서 재운 것이 마치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침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문득 침대 시트 위에 놓인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온다. 은하는 저벅저벅 걸어 그것을 확인했다.
고마워요, 흑염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