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늑대의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여섯 번째 S급 헌터 ‘백랑’은 유명 인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우는 유명 인사가 아니었다.
늑대의 주인 신귀훈의 외동아들이라는 것만은 유명했지만 얼굴 등의 개인 정보는 알려진 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우가 민주를 알아본 것과 별개로, 민주는 시우의 얼굴만을 보고서는 결코 정체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내 트릭을 꿰뚫어 본 것을 보면 그래도 꽤 쓸 만한 등급인 것 같은데. 어디 소속?”
그러나 민주는 시우가 각성자, 헌터라는 사실만은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달그락달그락…….
희미하게 식탁이 흔들렸다. 건방진 꼬마가 다리를 떨고 있는 것이다.
은하를 대할 때와는 딴판인, 가면을 바꾸듯 퍽이나 쉽게 달라진 태도에 시우가 작게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런 얄팍한 트릭을 간파한 것으로 좋은 평가를 해 주다니 감개가 무량한데.”
“뭘. 요즘 활동하는 헌터들 상태가 워낙 병맛이잖아. 그 정도면 나름 칭찬해 줄 만하지.”
트릭스터는 멈추었던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휴지 접기를 다시금 이어 갔다. 작은 손이 제법 야무지다.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트릭스터는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
“볼일이 있냐고 물었지?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 관심이 생겼을 뿐이야. 당연한 거잖아?”
“같은 취미?”
시우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시우가 알기로 은하의 취미는 90년대 가요 특집 재방송 관람, 고전 영화 관람 정도가 있겠다.
‘이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 그런 취미가 있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고로 판단했다. 녀석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해 두지.”
높낮이가 없는, 담담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녀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스스스─
앞에 놓인 물잔 위에 새하얀 서리가 앉았다. 마치 그곳에만 겨울이 찾아온 듯, 싸늘하게 식은 공기가 매섭다.
“그건 경고야? 아니면 협박?”
트릭스터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꽁꽁 얼어붙은 컵을 톡톡 건드렸다.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잖아?”
“알지. 하지만 그게 왜?”
“군단을 상대로 자신만만하네. 형, 혹시 늑대라도 돼?”
“글쎄. 내가 대답해야 하나?”
시우가 받아치자 트릭스터의 입가에 줄곧 걸려 있던 미소가 연기처럼 가셨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금 한기와 같은 적막이 감돌았다.
톡, 톡.
작은 손톱과 얼음 컵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아아, 알겠다.”
데굴데굴 허공을 구르던 시선이 이윽고 맞은편의 남자에게 닿았다. 트릭스터의 동그란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형. 저 누나랑 꽤 깊은 관계인가 보네?”
깊은 관계.
그녀와 자신은 과연 깊다고 할 수 있는 관계인가.
사실 답은 분명히 나와 있었다. 그녀와 자신은 단순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단순한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눈앞의 이 건방진 꼬맹이에게는 절대.
“그렇다면?”
그냥 내키는 대로 뱉은 대답에, 소년의 앙증맞은 입매가 기다렸다는 듯 씨익 곡선을 그렸다.
“사실 저 누나, 우리 군단이 낙찰한 게이트를 스틸했거든.”
“……뭐?”
줄곧 흔들림 없던 시우의 얼굴에 희미하게 금이 갔다.
방금 잘못 들은 건가?
게이트를…… 뭐 어쨌다고?
그의 반응을 감지한 트릭스터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형도 헌터라면서? 그럼 잘 알겠네. 낙찰한 게이트에 스틸러가 나타나면 해당 길드는 스틸러를 구속하고 또 응징할 권리가 있다, 라는 것. 그 일에는 협회도 개입하지 못해.”
“웃기지도 않는 소리.”
살짝 눈을 감았다 뜬 시우가 흔들림 없이 입을 열었다.
“스틸러 같은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 게이트 빼앗았다는 소리에 다소 놀라긴 했으나, 그게 정답이었다.
시우는 오늘 처음 마주한 트릭스터에게 신뢰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 건방진 꼬마를 믿는 것보단 선배를 믿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직접 확인해 봐. 누나의 오른쪽 앞주머니에 들어 있으니까. ‘내’ 게이트 핵.”
그러나 트릭스터의 태도가 묘하게 당당했다. 정말일까 싶을 만큼.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꽤 성가신 문제다.
트릭스터가 말한 대로, 낙찰된 게이트를 스틸하는 행위는 헌터계에 있어 상급 범죄에 준하는 일이었다.
은하의 시절에는 게이트를 경매하거나 낙찰하는 시스템이 없었을 테니, 그녀는 모르겠지.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점에 대해 세세히 설명하지 않았던 자신의 잘못이겠다.
하지만.
‘상관없어.’
시우는 여유 만만한 기색으로 턱을 들었다.
“게이트 핵, 보상해 주면 그만 아닌가?”
얼마든 불러 보라지. 던져 줄 테니 먹고 꺼지길 바랐다.
“아니.”
그러나 트릭스터는 삐죽 송곳니를 보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감히 군단의 게이트를 스틸한 건데, 그 죗값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 않겠어?”
“……그럼? 뭘 원하는지 똑바로 말해.”
“원하는 건 한 가지야.”
작게 어깨를 으쓱한 트릭스터가 이어서 입을 연다.
“형은 신경 껐으면 좋겠는데.”
“……뭐?”
시우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러나 트릭스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난 단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 관심이 생겼을 뿐이라고.”
“…….”
“그 증거로 나는 게이트 핵을 스틸한 누나에게 아무 책임도 묻지 않았어. 봤지? 뒤에 내 동료들. 저 녀석들도 누나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같이 국밥을 먹으러 이곳에 왔지.”
트릭스터는 툭툭, 빈 국밥 그릇을 건드렸다. 곡선을 그린 입술 새로 조그만 송곳니가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길드 간의 분쟁으로 번지고 싶지 않으면, 그냥 모른 척하는 걸 추천할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트릭스터는 접다 만 휴지에 다시금 손을 뻗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휴지 접기에 열중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평범한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시우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냥 모른 척하라.
그것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러나 고작 중학생 소년에게 협박을 당할 시우가 아니었다.
상대가 S급 헌터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꼬맹이에게 질 생각 따윈 없었으니.
“야.”
시우가 입을 여는 순간.
“가자.”
어느새 돌아온 은하가 테이블 곁에 섰다.
문득 은하의 새까만 동공에 꽁꽁 얼어 버린 얼음 컵이 비춰졌다. 분명 화장실을 가기 전까지는 미지근한 물이었다.
“…….”
한참 동안 그것을 빤히 응시하던 은하는 이윽고 다시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벌써 오셨습니까?”
시우가 고개를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마치, 조금만 더 늦게 오길 바랐다는 것처럼 들렸다.
“계산은 했어. 이만 나가자.”
은하는 휙 등을 돌렸다. 이어서 시우와 민주도 어기적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
시우의 시선이 은하의 불룩한 주머니에 콕 박혔다.
“선배, 주머니에 그건.”
“아. 이거.”
은하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스윽, 담담하게 꺼내 든 그것은──.
“게이트 핵.”
“……!”
보라색 구슬을 마주한 시우의 눈이 커졌다.
‘메롱.’
문득 시선이 마주친 트릭스터는 은하의 등 뒤에 숨은 채 보란 듯이 삐죽 혀를 내밀었다.
“오는 길에 우연히 버스트 게이트에 휩쓸리게 됐는데, 보스를 해치우고 주워 왔어.”
“버, 스트 게이트……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단말기가 울렸었지.
반하동 H 호텔에서 발생했던 균열.
설마 그곳에 휩쓸렸다는 소린가? 대체 어떻게 하면 버스트 게이트에 ‘우연히’ 휩쓸릴 수가 있지? 협회에서 나온 요원들과 경찰관들 그리고 소방관들이 장식이 아닌 이상 그럴 수가 없는데.
“응. 버스트 게이트.”
은하는 게이트 핵을 쥔 채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익숙하다고 여겼던 그녀의 초연한 태도에 오랜만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트릭스터의 말이 사실이었다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 도중.
“이거, 어떡할까?”
은하는 시우의 눈앞에 불쑥 게이트 핵을 들이밀었다.
은하 시절에는 습득한 게이트 핵은 상부에 제출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그리고 현재 은하의 상부라고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을 고용한 늑대, 즉 시우가 되겠다.
“그 게이트 핵은─.”
시우가 다급하게 입을 여는 찰나.
지잉─
진동이 울렸다. 시우의 휴대전화다.
“……잠시.”
시우는 아직 당혹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박제휘
010-XXXX-X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