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지식의 신과 진실의 일부 (2)
심장이 요동친다.
자신이 사라진 시점의 이야기를 이렇게 보는 건, 보통의 경험이 아니었으니까.
지식의 신은 분명히 자신이 어둠의 영역으로 넘어간 이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지구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등장하겠군.”
[ 맞습니다. 제가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당신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
“……내 패배 말인가.”
[ 그렇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당신의 친구들은 제 생명을 바쳐 새로운 터전을 열었습니다. ‘어둠의 마력’이라 정의한 그것을 품은 건 당신만이 아닙니다. ]
“나만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어둠의 마력은 정우의 전유물이었다.
각기 다른 형태의 또 다른 부정(否定)을 깨달았던 두 신이 있었고, 또 다른 존재가 등장할 것만 같았지만.
‘어둠의 영역을 정리하고 돌아왔던 기억은 있어!’
그곳에서 살아나온 건 자신뿐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메아리는?’
[ 표정이 바뀌셨군요. 혹시 서큐버스의 초월자이자 왕인 그녀를 떠올리셨던 거라면… 맞습니다. 그녀가 ‘첫 번째’ 당신을 제외한 어둠의 마력의 소유자였습니다. ]
“…첫 번째? 그녀 외에도 다른 이들이 있다는 소리인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 더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의 선택 역시… 그것과 관련이 있기에……. ]
그와 동시에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듯, 장면이 바뀌었다.
* * *
“……숲의 형태가 원래 이랬던가요?”
“그럴… 리가 있겠소?”
“이게 세계수가 지배하는 숲이라고?”
당시 정원에 모였던 이들은 전부 세계의 이변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이었다.
도시에 남은 여러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기감이 뛰어난 인물들이라는 뜻이었다.
안나는 분명히 그렇게 설명을 했고, 모두는 침음을 삼키면서도 내심 대마법사의 인정에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에.
그녀는 준비가 끝나자마자 곧장 일행과 함께 숲을 찾았다.
공간이동은 불가능했다.
그것조차 이변으로 다가왔다.
모두는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했고, 나흘에 걸쳐서 이동한 끝에 세계수가 있는 엘프의 숲을 마주 보게 되었다.
녹음은 사라지고, 바스러진 나무와 풀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의 단절의 결계만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세계수의 이변.
모두의 뇌리를 그런 단어가 파고들었다.
엘프가 당혹에 찬 낯빛으로 주춤 앞으로 한발 먼저 나선다.
유일한 하이 엘프와 엘븐 나이트는 다른 이들보다도 이곳의 변화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그들의 성소(聖所)이자 힘의 근원이며 능력과 권능의 산물이 존재하는 장소였으니까.
세계수의 힘은 어둠의 영역조차 발길을 멈출 정도로 대단했으며, 그로부터 나온 정령은 대륙 전역의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
그럴 만한 권능이 이곳엔 있었다.
그랬던 곳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녹음을 잃지 않았던 장소였다.
그런 곳의 황폐화는 모두의 입을 다물어지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안나는 다부진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단절의 결계.
그곳까지 다다르면서 발에 밟히는 죽어 버린 토양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런 심정이 등 뒤로 느껴졌다.
가만히 서서 모든 걸 바라보았다.
대마법사의 집중과 엘프의 간청.
대마법사의 결계 해제와 엘프의 절규 섞인 눈물.
대마법사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여러 강자들.
검기가 난무하고 자연의 흐름이 뒤바뀌며, 하이엘프의 비명을 뒤로한 채로 흐느끼며 날린 화살이 단절의 결계에 닿았다.
파징!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단절의 결계는 이름 그대로 막아 냈다.
고작해야 금이 가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정령의 힘을 잃은 둘만이 덩그러니 서서 이 모든 것을 목도할 뿐이었다.
한참을 공성전을 치르는 역전의 용사들처럼 공격하던 이들의 공격이 점점 간헐적으로 변했다.
이윽고.
“……돌아가죠.”
대마법사는 회군을 명했다.
단절의 결계를 넘지 못하고선….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회군하는 인파들 사이에서.
정령왕의 계약자인 하이엘프와 자신만이 유독 아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끌었다.
하이엘프는 동료의 부름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고개를 돌렸고.
자신 역시 후미에서 정령의 존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로 머뭇거리다가 덩그러니 홀로 남아 기어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응?’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기 전이나 지금이나 단절의 결계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 강대한 자들조차 뚫지 못한 단절의 결계 내부를 살피는 건 불가능했으니.
그저 간절함이 낳은 착각으로 치부하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말할 수가 없었다.
결계가 순간적으로 흐려졌던 사실에 대해서.
그건 혼자만의 비밀로 남아 버렸다.
그가 그 사실을 문득 떠올렸을 땐.
“벌써 사 년째 정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
정령과의 단절이 예상을 훨씬 웃돌고 난 뒤의 일이었다.
* * *
도시는 한가로웠다.
이변을 알지 못한 이들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며 왕과 신하들의 치리를 찬사했다.
하지만 막상 성내를 장악한 분위기는 도시의 것과는 달랐다.
해가 거듭될수록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왕이 약속한 오 일은 진즉에 넘어갔으며, 한 해가 다 가도록 어둠의 영역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소식은 없었다.
어둠의 영역은 애당초 금지에 속했지만, 왕이 전투에 나선 이후로는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되지 않는 절대 금지로 여겨졌다.
도시의 영주이자 마지막 남은 국가의 주군의 명을 어길 간 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마법사는 따로 결계를 만들고, 단절의 흐름을 접목시켜 타인의 접근은 물론, 육안으로의 확인조차 막아 버렸다.
어차피 어둠의 영역 때문에 고립된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은빛의 결계로 둘러싸이자 모두의 뇌리엔 고립이란 단어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침울한 분위기가 가중된 것은 두 해가 지났을 때였다.
세상 전역에 퍼져 있고,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마력에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력 사용 금지 명령이 내려진 것도 같은 해의 일이었다.
민감한 이들만이 먼저 느꼈을 뿐이었지만, 대지에 퍼진 마력의 고갈은 점차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것임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때문에 미리부터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무런 제지 없이 받아들여졌다.
왕이 도시를 설립할 때 주변의 몬스터를 모조리 쓸어버렸기 때문에 도시를 위협할 적도 없는 마당이었다.
어둠의 영역이 아니고서야 안전한 상황.
때문에 마력의 사용 억제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모두에게 각인되어 효과적인 법령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력의 고갈은 지속되었다.
아직 고갈이란 단어를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오히려 마력에 둔감한 이들부터 마력을 사용하는 것이 어려워질 거란 걸, 회장에 모인 모두는 알았다.
여러 안건이 오갔고.
결국, 다시 한번 세계수를 찾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마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이전보다 더 답이 없었고.
결국, 모두는 단절의 결계 앞에서 다시 한번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마법사와 대주술사는 이곳에 남아 결계의 해제에 주력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년 전에 보았던 이상 현상에 대해서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단절의 결계는 이름대로 세상과 단절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귀환했을 땐, 두 명과 더불어 마지막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 최후의 하이엘프가 비어 버린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렇게 이 년이 또 지났을 때.
잠을 자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뜬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어떤 사실에 경악한 듯 입만 쩍 벌린 채로 식은땀을 흘려댔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와 확장된 동공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러고 보면, 정령의 속삭임조차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그저 마력의 고갈.
세계수의 이변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중요한 내용이었다.
아주 미약한 속삭임마저 사라지고, 정령의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 벌써 사 년이나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왜 몰랐을까.
왜 인지하지 못했을까.
그저 정령의 힘이 약해졌다고만 느끼며 세계수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고만 판단했을 뿐.
막상 정령의 재잘거림이 끊긴 사실에 대해서는 별개로 생각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알았다.
왕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보필하는 여러 영웅들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있는 실력인 것을.
하지만 모두가 그러하듯 그 역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바로 정령체에 관한 것이었다.
정령왕조차 자신의 정령보다 정령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라 자부하는 그였다.
하이엘프조차 자신의 정령체보다 효율이 뒤떨어질 것이라 자부했다.
그만큼 그는 정령체에 있어선 독보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가 인지할 만큼.
언제였을까.
왕이 어둠의 영역을 찾기 이전에, 그는 단절의 결계 근처 세계수의 숲에서 정신을 차린 적이 있었다.
정령은 자신을 다독이며 머지않은 미래에 모든 걸 알 수 있노라며 설명을 거부했었고, 여러 경악할 만한 사건이 겹쳐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그것이 왜 떠오르는 걸까.
왜 그것이 정령의 유언처럼 들리는 걸까.
새삼스럽게도!
정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무언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짐을 챙기고, 심장이 터질 정도로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곳은.
“……그대는?”
세 명의 초월자의 짙은 난색이 지워지지 않는 장소였다.
대마법사와 주술사, 정령왕의 계약자까지.
그들의 부름을 뒤로한 채로, 그는 조금씩 앞으로 나섰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지?”
의문이 든 그들이 몇 차례나 불렀지만, 그들조차 몇 년 동안 파악하지 못했던 단절의 결계를 앞두고 있기 때문인지 의문만 표할 뿐 만류는 없었다.
그는 단절의 결계 앞에 섰다.
손만 뻗으면 결계에 닿을 거리였다.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려 정체불명의 기이한 음성을 내뱉는다.
마력 제약의 법령까지 어겨가며, 그는 자신의 몸에 깃든 모든 마력을 사용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정령체로서의 운용.
즉, 정령의 마력 운용 방법이 그가 떠올린 기억이었던 것이다.
“……뭐?”
“겨, 결계가 반응한다!”
“영주 대리! 준비하시오!”
세 명의 부산스러운 경악을 뒤로 한 채로 기어이 끝맺은 마력의 운용법은.
징, 지잉, 지이- 잉!
단절의 결계에 구멍을 뚫는 데 성공했다.
“어……?”
“가, 같이 가요!”
셋이 후다닥 다가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자신을 두고 숙덕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결계를? 대부분이 이런 의문에 대한 추론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사 년에 걸친 난제였다.
어떻게든 해결만 되면 충분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하물며 세계수를 직접 마주할 상황이라니.
단절의 결계가 생긴 이후로 세계수를 본 이는 종족을 막론하고 극소수에 불과했으니 흥분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수?”
“자, 잠깐. 세계수가 이런 형태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으음. 자연적인 상황은 아니오. 어딘지 모를… 부정한 느낌도 드는구려.”
주술사의 말은 옳았다.
그는 오히려 하이엘프조차 느끼지 못하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
…정령의 비명.
하늘까지 치솟은 가지를 넓게 늘어트리고 그 가지마다 풍성한 나뭇잎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으며.
나무 기둥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과 같으며, 그 뿌리는 대지를 굳건히 유지시키니.
그런 설화가 있을 정도의 세계수는 과연 그 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하지만 그뿐이랄까.
푸름은 사라지고, 녹음은 탁해졌으며, 뿌리는 시들어 땅을 뚫고 툭툭 드러나 있었다.
거대한 존재감과는 달리, 시들어 가고 있는 모습은 모두에게 가히 충격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