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여기서 그냥 동족들 다 죽여버릴래?
* * *
눈앞에서 우려에 찬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엘프.
그 안에서 또렷하게 느껴지고 있는.
그녀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읽어 내면서.
엘리사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눈 앞에 있는 옥타비아 에게 말했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 마왕폐하께선 너희 엘프들을 보면서 크게 진노하고 계시는 중이다. 상식적으로… 며칠 전에 집에 들어와서 자식들을 도륙하고 간 강도가 갑자기 거래 따위를 제안하는 상황이었는데, 안 그러시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말이지.”
“으으…”
정확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엘리사의 말.
이를 들으면서, 옥타비아는 자신이 시작부터 전제를 잘못 깔고 들어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나라의 일이 어쩌고 이성이 어쩌고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감성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 저항도가 너무 극렬할 경우 얼마든지 거절당할 수 있는 법.
그 점을 고려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이 너무나 뼈아프다는 것을 느끼는 옥타비아.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엘리사는 차가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그 때문에 지금 우리 마족들 사이에선 너희에 대한 처분과 관련해 아주 말이 많은 상황이다. 당장에 목을 쳐버려야 한다는 말도 있고, 아니면 다크엘프로 만들어서 평생 노예로 부려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중이지.”
“다… 다크엘프?”
입에 담는 것 만으로도 불경하기 그지 없는 그 이름이 나오자, 옥타비아는 자동적으로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엘프에게 있어서 최대이자 최악의 모욕이라 할 수 있는 다크엘프화.
그것이 운운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녀는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 어디까지나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거야. 제 아무리 그래도 무려 교황의 딸씩이나 되는 녀석에게 그런 짓을 벌이는 건 여러모로 무리수라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 점은 마왕 폐하도 허락하지 않으시겠지.”
“…”
마치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이 상황에서 쓸데없이 아름답기 그지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엘리사.
동시에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옥타비아는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쓸데없이 두근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약간의 짜증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최대한 침착함을 담아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응?”
“결국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마왕국에서 저희들을 도와줄 마음이 들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옥타비아 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협상을 끌어내는 것뿐이었다.
아울러, 당장 저들이 말한 대로 자신들의 모가지를 치거나 다크엘프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저들 또한 분노와 더불어 어느 정도 타협의 의사는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는 상황.
그리고,
그녀의 이런 물음에 대해서.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옥타비아의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고…. 그냥 간단하게 여기에 서명만 하면 되.”
“으음…”
자신의 앞에 떨어진 종이 한 장.
제법 큰 크기에, 적잖은 내용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는 그것을, 옥타비아는 진한 두려움을 느끼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 이…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그 내용을 확인한 직후, 옥타비아의 입에선 자동적으로 놀라움과 더불어 진한 불쾌함의 감정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그녀에게 내민 계약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조건은, 이미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여기까지 온 옥타비아가 보기에도 터무니 없을 정도로 가혹하기 그지 없는 사항들이 담겨 있었다.
어마어마한 액수를 요구하고 있는 전쟁 배상금과 같은 부분은 문제도 아니었다.
동시에 요청하고 있는 여러 상업상의 혜택이나 각종 군사적 요청에 대한 문제는 차라리 양반이었다.
그 이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지난 전쟁에 대한 과오를 물어,
교황이 직접 마왕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라는 요청.
종족 전쟁을 그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이며, 여기에 피해를 입은 모든 마족들에게 진심으로 엎드려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계약의 가장 큰 핵심이었다.
이는 단순히 돈이나 이권에 대한 부분을 넘어서, 사실상 신의 명에 따라 진리를 추구한다는 엘프들의 근간을 교황이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조항으로 넣었다는 사실에 옥타비아는 크게 분노하면서 눈 앞에 있는 이 끔찍하게 아름다운 마족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사실상 저희와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여집니다만…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래?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그런 너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그 말과 함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엘리사.
그것은, 옥타비아가 가져왔던 검은 불꽃이 담겨 있는 병.
그리고, 그에 상반되는 푸른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는 작은 병이었다.
“그.. 그건?”
“후훗…”
의문을 표하는 옥타비아의 앞에서 가볍게 웃음 소리를 내는 엘리사.
이어서 그녀는 병안에 담겨 있던 푸른 불꽃을 검은 불꽃 안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
그대로 푸른 불꽃과 반응하여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검은 불꽃.
이를 본 순간,
옥타비아는 마음 속에 이글거리던 분노가, 꺼져버린 검은 불꽃과 같이 일 순간 가라 앉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런 옥타비아를 보면서 엘리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희들이 그렇게 원하고 있는 것은 이미 준비가 끝났어. 그리고 네가 거기에 서명만 한다면 기꺼이 내줄 수 있지.”
“큭…”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엘리사.
그러나, 그녀의 이런 오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는 지금의 이 상황이 절대로 장난이나 협박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이 터무니 없는 계약서.
아버지인 교황에게 전권을 위임 받은 그녀가 여기에 서명을 하는 것은,
다방면에서 엘프 교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손해를 야기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서명만 하면 그녀는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엘프 교국과 교국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세계수 유피테르를.
더 나아가, 이 순간도 불꽃에 휩싸여 죽어가고 있을 수많은 동포들의 목숨을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손에 의해서 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이 상황에서 옥타비아는 망설이기 시작했으며,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엘리사는 조롱이 담겨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어떻게 할래? 이제 남은 건 오직 너의 선택뿐. 여기서 세계수를 구하고 모두를 살릴 거야? 아니면 그냥 자존심만 앞세우다가 동족들 다 죽여버릴 거야?”
“!...아…”
마치 칼로 찌르듯 너무나도 가혹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를 참으로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 하는 엘리사.
그 말을 듣는 순간,
옥타비아의 머릿속에는 자동적으로 조국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녀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어 주는 동생들.
함께 수련을 해왔던 친우들.
무뚝뚝하지만 은근한 부성애를 보여주곤 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길을 가면서 늘 보아 왔던…
세상에 대한 걱정을 지니지 않은 채 환하게 웃으며 뛰놀던 어린 아이들까지.
그 모든 것들의 생명이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옥타비아는 결국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큭… 흐윽…흑…흑…”
피눈물을 쏟으며 힘겹게 펜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옥타비아.
교국을 대표하는 자로서 그녀가 이러한 조약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분명 옥타비아라는 이름은 대대손손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으로 이름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모독하는 말로 얼룩지게 될 그 역사만이라도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녀가 알고 있고.
사랑하고 있는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엘프 교국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안겨준 조약으로 알려져 있는,
이른바 흑염 조약은 그 이름처럼 지하 감옥 깊은 곳에서 절망에 휘감긴 채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직후 분노에 날뛰던 엘프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이러한 굴욕적인 선택은.
앞으로 대륙이 맞이하게 될 어마어마한 혼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흑…흑흑… 으흑…”
바닥에 주저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슬픔과 절망의 눈물을 쏟고 있는 옥타비아.
자신의 손으로 나라에 몹쓸 짓을 한 만큼,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엘리사는 불쌍함이나 동정 보다는 오히려 고소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마족들을 깔보고 괴롭히던 그 고귀한 엘프라는 녀석이 비참하게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솔직히 마음 같아선 마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아주 보기 좋은 장면이었다.
그렇게, 혼자 보기 아까운 엘프년의 절망쑈를 보면서,
엘리사는 그대로 서명이 된 계약서를 품속에 집어 넣은 뒤 그녀에게 한가득 비꼼의 말을 담아서 이야기했다.
“이봐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렇게 나라라도 팔아 먹은 것 마냥 서럽게 울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 흑…. 흑….”
엘리사의 말에 순간적으로 살짝 울음을 그치며 그녀를 바라보는 옥타비아.
비록 눈물로 얼룩진 터라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담겨 있을 것이 분명한 굴욕과 분노의 감정 을 인지하면서,
엘리사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엿을 먹여주는 의미로,지극히 친절하기 그지 없는 미소를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방금 넌 수백만에 달하는 엘프들의 목숨을 구원한 거잖아. 스스로 아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은 일을 했다고. 안 그래? 세계수를 지킨 영웅씨?”
“…”
그 말에, 그대로 눈물을 멈추고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엘리사를 바라보는 옥타비아.
이어서 엘리사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둔 뒤, 그대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감옥을 나섰다.
이후에 벌어지게 될 엘프들의 또 다른 굴욕쑈에 대한 기대감을 지닌 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