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이런 상황에서 마족들이 처들어 올리가 없잖아
* * *
빌레몬성.
안티옥에서 북쪽으로 약 이틀 거리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방금 전과는 달리 상당히 한산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봐 케인 그쪽은 좀 어때?”
“어떻긴 당연히 여기도 텅텅 비였지, 동원 가능한 녀석들을 모조리 끌려가 버렸고, 나처럼 운 좋은 한 두 명만 남아 있지.”
“하긴 넌 예전부터 이런 일에 빠지는 운 빨 하나는 기가 막혔으니까.”
한가하게 모닥불을 쬐며 자리에 앉아 있는 병사들.
이들은 현재 각각 빌레몬성의 동쪽과 서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임무는 적당히 내려 놓은 채 한가하게 자리에 앉아 술잔을 홀짝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로스트, 우리 이래도 괜찮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근무 중인데 이렇게 술이나 퍼마시고 앉아 있는 건 좀…”
“뭐 어때?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마족 놈들이 여기에 나타날 일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야야, 걱정하지마. 쓸데없이 고민해 봤자 술 맛만 떨어진다고. 그리고 정말로 마족들이 몰려온다 해도 우리 만으로 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안 그래?”
“으음…”
비겁하게 펙트로 상황을 조져버리는 동료의 말에 결국 수긍을 할 수밖에 없게 된 병사 케인.
그렇게 그는 모닥불에 구워지고 있던 작은 새를 뜯어 먹으며 여전히 찝찝하기 그지 없는 이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애썼다.
마왕을 잡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명목 하에 전군을 이끌고 출정한 장수들.
그렇게 본래 이곳을 지키고 있던 대부분이 병력들이 떠난 지금.
사실상 형식적으로 남아 있는 소수 병사들은 이처럼 한껏 해이해진 분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식량을 들고 가긴 했지만, 행군과 전투에 쓸데 없이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술통은 하나도 들고 가지 않았으며,
결국 이것들은 이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는 병사들의 몫이 된 상황이었다.
사실상 부족한 식량을 술 배로 채우고 있는 병사들.
어찌 되었든, 그렇게 간만에 무언가를 풍족하게 입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덤으로 줄곧 바짝 유지되고 있던 긴장이 한껏 풀어져 버린 상황에서 여유를 만끽하면서,
안 그래도 지나칠 정도로 적은 수의 병사들은 그렇게 경비 일 따위는 완전히 내던져 버린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느 순간 성 안으로 들어와 있었으며,
이제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내보이고 있는 그들은
생각 했던 것 이상으로 싱겁기 그지 없는 지금의 이 상황에 진한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금 지나칠 정도로 허망한데요?’
“그러게나 말이야. 우리가 여길 방어해 내려고 얼마나 많은 피를 쏟았는데.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되찾아 버릴 줄은…”
과거, 이곳 빌레몬에서 있었던 전투의 결과 마족들은 2000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퇴각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족들은 말 그대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이곳을 사실상 완전히 접수한 상황이었다.
그들의 눈 앞에서 술에 취해 퍼질러 자고 있는 인간들.
이들이 바로 이곳에 있는 병력의 사실상 전부인 만큼 남은 것은 이들을 적당히 포박한 뒤 포로로 잡아가는 일뿐이었다.
“어쨌든, 아직 상황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니 방심하지 말고 일을 마무리 짓도록. 이곳의 일이 다 끝나면 곧바로 일부 병력만 남긴 채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예, 군단장님.”
“알겠습니다.”
일라이어스의 말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곯아 떨어져 있는 인간 병사들을 포박하는 부하들.
그렇게 혹여 이들이 갑자기 일어나 반격을 가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직후.
일라이어스는 허망함과는 별개로 어찌 되었든 아군의 피해 없이 또다시 성 하나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한편, 어째서 상황이 이정도 까지 잘 흘러가는 지에 대해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안티옥에 있는 삼손 군단장의 부대가 미끼가 되어 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조금 심한 것 아닌가? 설마 이 정도까지 병력을 쥐어 짜내면서 성들을 방치해 둘 줄은…’
단순히 침입해온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라 치기엔 지나칠 정도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연합군 병력.
마치 꿀 냄새를 맡은 벌떼 마냥 우르르 몰려가 버린 그들의 행보에 의문을 느끼면서, 일라이어스는 혹 그 교활한 용사가 무언가 또 다른 술책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추후에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만 지금은 일단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적들이 자리를 비운 이 틈에 가능한 많은 영토를 수복하는 일 뿐이야.’
그렇게 마음 속의 의문은 잠시 미뤄둔 채, 일라이어스는 마치 빨리 먹기 대결에 나온 대식가와 같은 심정을 지닌 채 최대한의 속력으로 일을 진행해 나갔다.
마음 속의 의심과 별개로, 그녀는 언제나 마왕국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 왔기 때문이다.
*
“커윽!”
“컥!”
짦은 단말마를 토해내며 죽어가는 병사들.
불과 수분 전까지만 해도 마족들이 처들어 올 리가 없지 않냐면서 툴툴거리고 있던 그들은 이 순간 절망에 찬 표정을 지은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허수아비가 베어 넘겨지듯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참히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
그것을 보면서, 이 작은 마을인 엔마오를 다스리고 있던 장수 길티어는 공포에 젖어 제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이… 이럴 수가…어… 어떻게… 어떻게 네가…”
보라빛 갑주를 입고 있는 마족 전사.
자색의 기운이 풀풀 흩날리는 검을 들고 있는 그것이 누구인지 길티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었던 인물이자
절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존재.
마왕.
분명 현재 남쪽의 안티옥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어야 할 그자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에,
마왕과의 전투를 포기하고 이곳을 지키기로 결정했던 길티어는 짙은 혼란과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런 길티어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마왕.
그 모습을 보면서
길티어는 차마무기를 들고 반격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순한 공포로 인한 채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신물이 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격 따위는 마왕에게 닿지 않는다고.
무의미한 저항은 절망에 절망을 더하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마왕은 검을 쓸 필요도 없다는 듯 그대로 길티어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팍!
그 직후 느껴지는 뜨거운 격통.
동시에 한 순간 뒤집히는 세상의 모습에 길티어는 자신이 무슨 꼴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몸통과 분리되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자신의 머리.
죽어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그 끔찍한 공포의 상징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게 되었다.
결코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았던, 그 괴물의 모습을…
*
전략과 전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적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을 품위 있게 표현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다.
다만, 목숨을 내놓고 눈 앞의 적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당장 자기 자신이…
더 나아가 자신의 가정과 사회 그리고 마지막엔 국가가 무너지는 만큼,
이런 사기가 지극히 당연시 되는 것은 전쟁이 지니고 있는 성질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의 성질에 의거해서.
이 순간, 마왕과 일라이어스 군단장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1만 5000의 병력은.
종족 연합은 물론이고, 아군인 삼손 군단장과 휘하 병력들까지 모조리 속이는데 성공하면서 이제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 결과물을 ‘수확’해 나가기 시작했다.
본래 그들이 차지 하고 있었으나, 피를 피로 씻는 혈전 끝에 종족 연합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던 영토들.
그러나, 현재 그렇게 힘겹게 빼앗겼던 때와는 달리, 마왕과 일라이어스는 말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과실을 줍는 것 마냥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쉬운 방식으로 잃어버린 영토들을 되찾고 있는 중이었다.
안티옥에서 사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종족 연합 점령지의 중앙 지점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성 골로새.
그곳을 시작으로 하여 마왕군은 디모데, 데살로네가, 고린도 등의 성들을 큰 피해 없이 차례차례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도중에 전투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지한 영토에 비해 마왕군이 입은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
그리고… 이처럼 지극히 허망하면서도 실속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엄청난 일들을 겪으면서,
마왕은 진지하게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 정도로 간단하게 우리 마왕국의 영토를 되찾을 줄이야, 허면 지금까지 짐이 한 노력들은 대체…’
물론 그 동안 종족 연합의 거침 없는 난타에 휘청거리던 마왕국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마왕의 활약이 가장 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그 동안 계속 바래 왔으나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자신의 ‘꿈’이 지나칠 정도로 허망하게 성공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왕은 자연스럽게 약간의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찝찝함과 별개로 실질적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던 용사라는 존재에 대한 호감도가 좀 더 상승한 것은 덤이었고 말이다.
‘이번에 돌아오게 되면 좀 더 큰 선물을 주어야겠구나. 구체적인 것은 용사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지만…’
큰 공을 세우면 그에 응하는 포상을 주겠다 약속했던 마왕.
이와 관련해서, 그녀는 투구에 가려져 누구도 볼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살짝 붉히기 시작했다.
어째서 인지, 용사에게 주는 포상과 관련하여 자신이 더 기대감이 드는 것 같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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