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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169화 (169/222)

# 169

169화

***

스칸다가 격동하는 시기에 송하린은 동부를 거닐고 있었다.

맹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돌아갈 때가 되면 마주칠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일월망향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깊은 산골에 가득했던 월인들이 세상으로 나와 싸운 것은 오래지 않은 일이었다.

“……음?”

그녀의 눈에 비친 일월망향산은 전과는 달랐다.

분명 산세가 험하기는 했지만, 각양각색의 색으로 수놓아진 산이었다.

한데, 지금은 군데군데가 잿빛이었다.

잿빛을 머금은 그 기운은 한눈에 보기에도 산을 괴롭히고 있었다.

해와 달도 고향을 잊는다는 산은 그렇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비단, 이 산뿐만이 아닐 것이다.

씁쓸해진 그녀는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산세가 험해질수록, 잿빛 산이 그 상처를 드러낼수록, 호흡은 가빠져 왔다.

마침내, 송하린이 월인들이 사는 곳까지 도달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다.

“뭐지?”

“어? 교, 교주님!”

“지존!”

맹에 파견을 나가 있던 인원들 대다수가 복귀한 상황이었다.

어리둥절해진 송하린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그것이…….”

월교 무인들 중 1명이 상황을 설명했다.

맹의 급한 불을 끄고 일월망향산에도 변고가 생겼을 것이라 생각한 그들이, 대부분 돌아와 사태를 정리하고 있었다고 했다.

“맹은 어찌 되었느냐?”

“피해가 좀 있었지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남쪽 지방부터 동쪽 지방까지 피해가 심각하고 그 피해가 내륙까지 침범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막을 순 있다고 하더냐?”

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가 못합니다. 이 잿빛 기운은 대륙을 계속해서 좀먹는데 기세를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꺾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그래도 바스카리와 유리온이라면 뭔가 알 수도 있겠지. 알겠다.”

송하린이 고개를 돌리자 산이 눈에 들어왔다.

“어딜 봐, 밑에 있어.”

들려온 소리에 그녀가 밑을 쳐다봤다.

그곳엔 난쟁이 1명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오!”

“하, 이름은 기억하는군.”

동부의 여행을 함께했던 난쟁이 강오였다.

불현듯, 그 기억들이 떠올라 송하린을 미소 짓게 했다.

“잘 지냈는가?”

“그럭저럭은. 월인들이 워낙 착해서 잘 부려 먹고 있었다.”

“이 썩을 자식.”

“하하하, 농담이야.”

둘은 피식 웃고 길을 걸었다.

“초모는?”

“형님이야 늘 잘 지내시지.”

“다행이군. 허허…… 다른 게 아니고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 줄 수 있나?”

“말해 봐.”

강오의 표정은 무거웠다.

“스칸다가 멸망하려 하는 거지?”

“……아마도?”

“막을 순 있는 거야?”

송하린은 이번엔 방금 전과 같이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멸망을 막을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그건 모르지.”

“다들 어쩔 생각인 거지?”

“어떤 생각을 위해 모이는 거겠지. 우리도 곧 움직여야 하고.”

“하긴, 여기 남아 있을 수는 없지.”

강오도 산을 훑어보았다.

아직 그 싱그러움을 품고 있었지만, 조만간 그 싱그러움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울적해진 강오가 자리를 떴다.

송하린은 한나절, 가만히 앉아 생각에 젖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휴식일 수도 혹은 짧은 정리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스칸다, 그리고 종말 이후를 플레이할수록 더 몰입하게 됐다.

그리고 그 몰입은 계속해서 깊어져 종국에는 그녀를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했다.

‘내가 떠나면…….’

송하린은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금요일 밤에는 시끌벅적한 번화가로 나가 또래 남자들의 추파를 징그러운 것을 본 표정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고 동네에 자주 가는 대포 집에서 홀로 소주를 기울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 세계의 주민이고 싶었다.

불안정하던 그녀의 마음을 다독여 준 그녀의 스승과 월인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만들었던 수많은 추억.

그녀는 얼마 전 만난 이선익과 심대형의 말을 기억했다.

-그러니, 좋은 친구들. 번인인 저희들은 당신들의 추억에 꼭 마침표를 찍어 이 모든 것을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송하린은 그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다.

스칸다 주민들의 삶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표를, 그리고 스칸다를 즐겼던 사람들의 추억에는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추억에도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푸하하하하!”

별안간 웃음을 터트린 송하린이 월인들에게 지시했다.

월인들은 어차피 준비를 마치고 있었기 때문에 송하린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하나로 모였다.

송하린이 천마도를 짊어지고 묘한 눈으로 월인들이 살던 곳을 바라보았다.

“강오.”

“어, 어어?”

“우리 사부님을 제외한 역대 천마들은 모조리 나쁜 놈들이었지.”

“알아.”

“그분들께서는 매번 밖으로 나가 세상을 차지하겠다며 싸웠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지.”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강오는 송하린이 왜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내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송하린을 계속 쳐다봤다.

하루 사이에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았다.

종일 무거워 보였었는데 갑자기 홀가분해진 것처럼.

송하린이 말했다.

“왜 그런 줄 알아?”

“모르지.”

“미련을 남겨 뒀기 때문이야. 월인들을 산골짜기에 틀어박아 두고 돌아갈 곳을 남겨 뒀기 때문이지. 아니었으면 못해도 동부쯤은 가지셨겠지.”

“…….”

그녀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나왔다.

“불을 놓아라.”

“네?”

“어서!”

“지, 지존!”

송하린이 냉엄한 표정으로 수하들을 쳐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수하들이 월인들이 살던 가택에 불을 놓았다.

화르륵.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을 잿빛으로 물들였던 균열의 흔적보다 더 짙은 연기가.

송하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동공에는 불타는 보금자리의 모습이 담겼다.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모든 걸 되찾은 후일 것이다. 잔을 들어라, 탐욕의 이리들아!”

송하린의 지시에 모든 월인이 술잔을 나눠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 쭉 들이켰다.

송하린이 술잔을 집어 던져 깨트렸다.

쨍그랑.

“아무도 우리의 것을 빼앗을 순 없다.”

그녀는 가마에 올라 말했다.

“가자!”

송하린의 눈 색이 조금 더 짙어졌다.

“서쪽으로.”

그들이 떠난 자리엔 잿더미만이 남아 있었다.

***

“알란! 이리 와!”

“간다.”

대삼림의 시조와 싸울 때, 알란은 잠재력을 희생하고 수명을 대가로 힘을 얻었다.

지금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모습을 한 채로 호박밭에 서 있었다.

돈은 충분히 있었다.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며 더 많은 보상금이 지급됐고, 진주 등급 모험가에서 한 단계인가 두 단계인가를 승급했다.

물론,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알란, 편지가 왔어.”

“편지?”

동향 친구가 호박밭을 했다.

비취 등급 모험가일 때 그에게 말했었다.

나중에 은퇴한다면, 이곳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친구는 흔쾌히 허락했었다.

알란은 무언가를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훤칠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생명을 가꾸는 일이 참 보람되었다.

모험가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신만의 밭을 가꿨을 것이다.

그는 커다란 늙은 호박을 깔고 앉아 붉은 인장이 찍힌 편지를 열었다.

붉은 인장이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편지를 위에서부터 쭉 읽고 있는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비록, 주름이 얼굴을 가득 메웠고 그의 모습이 편지 한 장에 감정이 요동할 것처럼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젊었다.

그는 젊지만 늙었다.

잠시 후, 편지를 다 읽은 알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나도 미리 읽었어.”

“남의 편지는 왜?”

“그냥, 인장이 특이했잖아.”

“사람, 참.”

“가는 거야?”

“어.”

“잘됐네, 임금은?”

“됐어, 취미로 한 건데 돈은 무슨.”

“나중에 관심이 생기면 오라고.”

알란이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돌아서서는 자기가 깔고 앉았던 호박을 찼다.

팍!

물론, 어떤 기운도 들어 있지 않았고 장화도 쇠가 박혀 있지 않아 그도 발을 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박이 박살 났다는 점이었다.

알란이 박살 난 호박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말이야, 호박이 싫어.”

“하하하하!”

“이런 농장에서 여생을 마치는 삶도 정말 싫고!”

“아무렴!”

“그러니까…… 그러니까 돌아갈 거야.”

“……다신 오지 마, 알란.”

“난 모험을 할 거야. 모험이 좋아. 힘든 임무를 마치고 맥주를 마시는 것도 좋고, 동료들이랑 오늘도 살았구나 하고 한숨을 쉬는 것도 좋아.”

“…….”

“술집에서 내 업적을 부풀려 말하는 것도 좋고 새로운 동료를 사귀는 것도 마음에 들어.”

“그래.”

“난…… 난…… 아직 모험을 잊지 못했어. 내가 죽는다면 이런 호박 농장이 아니라 동료들의 곁에서야.”

“그게 너야, 알란. 넌 천생 모험가를 할 운명이야.”

“운명…… 운명이라.”

그는 지금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돌아가려 했다.

그러니 운명이란 말에 별다른 의미를 투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휙 돌아서더니 말을 남겼다.

“그건 그렇고 호박이 단단하네.”

“괜찮지?”

“맛은 없었어.”

“하하! 잘 가라고!”

***

알란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오랜만이었다.

줄곧 호박 넝쿨과 어울리다가 사람들을 만나려니 어색했다.

하지만, 자신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시스를 제외한 13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바스카리를 지척에 두고 조용한 주점에 자리를 잡았다.

알란이 먼저 입을 뗐다.

“다들 초모의 연락을 받고 모인 건가?”

“그렇지 뭐.”

난쟁이와 요정까지 모일 줄은 몰랐던 알란이 눈짓을 보내자 난쟁이 원소술사 도나타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도 수명이 귀한 건 마찬가지야.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모험가를 계속하고 있는 거야?”

“저기…… 그…… 응…….”

“그랬군.”

노인이 된 알란은 차마 부럽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안 그래도 울적한 분위기에 다시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시스가 그곳에 있다는군.”

“바스카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요.”

“그…… 사실일까?”

“뭐가요?”

“우리를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는 말말이야.”

“……혹시나 하는 기대에 전원이 모인 것을 보면 다들 그러길 바라는 것 아닐까요?”

“그, 그렇지. 하기야, 그 초모니까.”

대삼림에서 보여 줬던 초모의 힘은 엄청났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스카리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시스가 절대 무를 수 없는 거래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도 이번에 모이는 것을 보면 뭔가 다른 수가 생긴 것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일단 내일 도착하니 상황을 한번 보자고. 아니면 어쩔 수 없지. 그래 봐야 죽을 날만 남겨 놓은 사람들인데.”

“……그러죠.”

역시, 불운한 일을 겪은 사람들답게 모인 자리도 어두웠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파하고 다음 날이 되어 정오가 넘어갈 때쯤 바스카리에 도착했다.

“이, 이게 바스카리라고?”

“무슨 일인 거지?”

바스카리의 모습은 그들이 오래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일단 땅에 내려와 있는 모습까지는 비슷했지만, 수많은 난쟁이와 사람들, 그리고 소환수가 달라붙어 대규모 공정을 치르고 있었다.

알란이 입구 쪽으로 지나가던 난쟁이에게 상황을 물었다.

“저……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응? 바쁜 사람 붙잡지 말고 확실하게 얘기하게나.”

“바스카리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갑자기 무슨…….”

“아하, 그 얘기구만. 이번에 종말의 징조를 겪고 나서 가장 먼저 내려온 지시 사항이지. 그나마 타격이 가장 적은 중앙 대륙 인근에 거대한 주거지를 만들 계획이거든. 그게 바스카리를 확장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예? 바스카리를요? 대체 왜…….”

“응? 자네들은 여행길에 있었나? 지금 스칸다의 모든 세력들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어.”

“설마 그 한곳이란 게 이 바스카리라는 말씀입니까?”

“그럼, 중앙 대륙에서 가장 적절한 곳이지. 뭐, 새로이 교황이 선출되고 황금기를 맞이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

“그, 그렇군요…….”

초모가 바스카리로 오라고만 했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가 교황이 된 것도, 모험가로서 어디까지 올라갔는지도 일행은 모르고 있었다.

알란이 모두를 바라보며 바스카리로 들어섰다.

“와아아!”

“십 년 전쯤인가, 와 봤던 적이 있었어. 그때보다 훨씬 활기차진 것 같네.”

“아예 모든 게 바뀐 것 같군. 도시가 대체 얼마나 커지려는 거지?”

“말을 들어 보니 센티널을 다시 만들 계획이 있다던데?”

“다시 만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지? 애초에 지금 있는 센티널들도 신성력이 모자라 제대로 구동하지 않는 것 아니었나?”

“아, 그게 들어 보니까 새로 교황이 된 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성력이 어마어마한가 봐요. 바스카리의 신민들이 그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던데.”

“바스카리가 한 차례 떠오르기까지 했다는군. 지금 내려온 건 확장 공사 때문인가 봐.”

“그런가요?”

기이잉.

알란이 화들짝 놀라 옆이 쳐다봤다.

센티널이 말끔한 복장으로 그에게 물었다.

-바스카리에 처음 오셨습니까?

“아, 그, 그게 약속이 있어서.”

-바스카리는 광활합니다. 당신이 길을 헤맬 것을 우려합니다. 등록된 약속의 당사자나 장소를 아십니까?

“어…… 맞다. 센티널에게 물어보라고 했지. 그…… 이시스! 이시스를 찾으면 된다고 하는데?”

-이시스. 확인되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이잉.

센티널이 공중에 떠서 그들을 천천히 안내했다.

노인이 된 사람들은 걸음이 느린 사람이 태반이라 속도가 붙지 않았지만 센티널은 친절하게 그들의 속도와 맞추어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자 점점 중심부에 가까워졌다.

중심부에 이른 그들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시스!”

“오셨군요!”

“오랜만이야! 어떻게 지낸 거야, 잘 지냈어?”

“잘 못 지냈어요.”

“나도! 나도 잘 못 지냈어. 하하하!”

“이렇게 다시 보니 다들 그대로네요.”

“그대로긴 무슨. 이렇게 늙었는데.”

“늙은 그대로라고요.”

“아…… 그렇지.”

“아무튼, 가시죠. 초모 님이 기다리고 계셔요.”

“초모는 계속 모험가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들어가서 보시면 아세요. 자, 다들 이쪽으로.”

그들은 센티널에게 감사를 표하고 다시 걸었다.

그런데 이시스가 자꾸만 이상한 길로 안내하자 아키라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시스, 이쪽 방향이 맞아?”

“네, 맞아요.”

“아무리 봐도 여기는 대성궁 방향인데, 거기는 못 들어가잖아?”

“초모 님이 거기 계셔요.”

“수도사가 아니었나? 신관이었어?”

이시스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다시 길을 걸었다.

아키라는 괜히 코를 긁적이고 따라 붙었다.

잠시 후, 그들은 대성궁의 입구에 다다랐고 경비가 그들을 막았다.

번뜩이는 갑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잠깐, 어떻게 오셨습니까?”

“초모 님과 약속이 있습니다.”

“아, 그분들이셨군요.”

경비가 일행을 훑어본 후에 고개를 숙였다.

영문 모를 행동에 다들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데 그가 말했다.

“초모 님과 함께 대삼림의 위기를 막아 주신 분들이셨군요. 당신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자, 들어가시죠!”

“아, 예…….”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말이었으므로 그들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시스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이, 이시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거기는…….”

“네, 여깁니다.”

“알현실? 여기 왜…….”

끼이이이익.

오래된 큰 문이 열리고 그 넓은 공간에는 단 4명이 있었다.

초모는 상아색 의자에 앉아 있었고 다른 노파들은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서, 설마!”

“초모? 거기 앉았다는 거는…….”

“너야? 너냐고?”

“맙소사…….”

초모가 싱긋 웃었다.

“바스카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알란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교황이…… 초모였다니.”

***

충격적인 재회도 잠시, 일행은 성진과 금세 옛날 얘기를 꺼내며 어울렸다.

성진은 그들의 나이 든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신경 끄기로 했다.

오늘은 그걸 위해 모인 자리였으니까.

성진이 먼저 말을 했다.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계획? 정말이야? 초모가 우리 수명을 원래대로 돌려준다는 말이?”

“하기야 교황이면 손 한 번 번쩍이면 다 치유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성진이 빙긋 웃고 고개를 저었다.

“이건 거래의 증거라 제가 함부로 손댈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좀 들어! 진짜 나이를 처먹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수다스러워졌어?”

“난 원래 수다스러웠어!”

우르드의 추방자들이 그들을 보고 웃었다.

“크흘흘, 들어라 이놈들아.”

“당신들은 누구시죠?”

“이분들은 우르드 일족의 장로셨고 이시스와 교류가 있던 분들이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건가요?”

눈을 꿰맨 노파가 말했다.

“너희를 다시 한번 운명의 샘으로 데려가 주마.”

“정말요? 정말인가요? 하지만…… 이건 정당한 거래였다고 하는데…… 수명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까요?”

“거래가 정당했던 것도 맞고 거래를 무를 수 없는 것도 맞다. 그렇다면 새로운 거래로 그들에게서 수명을 받아 오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저희는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수명도 이미 끝나가고 있고 그들이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마. 아무튼 준비들 하거라.”

“이렇게 갑자기요?”

“멍청하기는, 네가 지금 몇 살인지 아느냐?”

“모, 모릅니다.”

“네 삶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이러다 여기서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꼬? 그냥 내 말대로 하거라.”

죽는다는 말에 모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투두둑.

투두두둑.

눈과 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실들을 순식간에 뜯어낸 노파들이 말했다.

“자, 우리의 눈을 보거라. 함께 샘으로 가자꾸나.”

휘오오오.

회오리치는 파동이 노파의 눈에서 계속되었다.

일행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눈을 바라보고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여기는…….”

“쉿. 너희는 이곳에서 나가기 전까지 입을 열지 말거라.”

노파 셋이 길을 걸었다.

그들과 거리가 좀 벌어진 나머지는 일부러라도 그녀들과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후우웅.

“그만! 거기서 멈추거라, 우르드의 아이들아.”

이시스가 섬기던 위대하신 분들이 나타났다.

그 3명은 너무 거대해서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모두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이시스! 날 실망시키는구나. 분명 합당한 거래였거늘, 어찌 이들의 힘을 빌려 다시금 이곳을 찾았느냐?”

“클클클…… 제가 꼬드겨서 그랬지요. 이 착한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 보니 기억이 나는구나. 거래에 불복하여 쫓겨난 우르드의 추방자들이군.”

“기억력도 좋으십니다! 저보다 오래 사신 분들인데 아직 정정하신 걸 보니 일족으로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조롱하지 말거라. 내 너를 찰나에 먼지로 만들 수도 있거늘.”

“그것 또한 거래를 통해서겠지요. 아닙니까?”

“……불경한지고.”

노파들은 살아 온 세월이 만만하지 않다는 듯, 위축된 일행과는 달리 위대한 자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위대한 자들 중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이가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느냐?”

“당연히 거래를 하기 위해서지요.”

“건방진…… 저들의 수명을 받아 가려는 것이냐?”

“예, 그것을 원합니다.”

“불가하다. 우리는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어째섭니까?”

“이미 그들의 수명은 다른 이들에게 넘어갔다. 되돌려 받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대하신 분들이라면 쥐고 계신 수명 정도야 얼마든 되지 않으십니까? 억겁을 살아오신 분들이니까요.”

“그렇다. 하지만 그것을 너희에게 넘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우리는 너희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거래는 이해 관계자 간의 의견이 일치되어야 비로소 성립한다.

위대한 존재들은 일행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다.

의기소침해진 일행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노파가 비릿하게 웃었다.

“푸힐힐힐.”

“왜 웃는 것이지?”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알고 왔단 말이냐?”

“이렇게 되면 저희에겐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뭐?”

성진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스릉.

“이, 이럴 수가!”

“스칸다다! 그녀야!”

“그렇군…… 종말이 오기 전 숨은 게로구나. 과연…….”

“그런데 그 검이……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노파가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이 검이라면, 계약의 연결을 강제로 벨 수 있을 겝니다.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나름의 신격을 지녔으니까.”

“……그것을 강제로 베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이러는 게냐!”

“당연히 알지요. 이들은 수명을 되찾을 것이고, 위대한 존재께서 다른 이들에게 보낸 수명 또한 사라질 것이고요.”

“다른 계약자들의 계약을 깨겠다는 얘기더냐!”

“아무렴요! 일단은 저희가 살고 봐야지요.”

“……우리가 너희를 벌할 수 없음을 알고 이러는 것이군.”

“모든 건 거래에 의해서 아니겠습니까?”

성진이 가진 검은 이 협상에서 강제권을 가졌다.

비록 저울에 실리는 가치의 무게를 바꿀 순 없었지만 그 종류를 바꿀 순 있었다.

“저자의 수명을 바치겠느냐?”

“싫습니다.”

“그렇다면 저 검을?”

“싫습니다.”

“이런…… 기어코 우리에게 손해를 보게 하려는구나!”

“그거야 제가 고려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지요. 위대하신 분들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좋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느냐?”

“말씀하시지요.”

“너희의 수명을 돌려주겠다. 하지만, 저자의 운명을 보겠다.”

“운명을요?”

“그렇다.”

“위대하신 분들께서는 모든 운명을 볼 수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한 존재들도 있지. 받아들이겠느냐?”

노파가 성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어차피 들리겠지만, 관례상 하는 것 같았다.

“받아들이게, 어차피 다른 것을 제시하기도 어려울 거야.”

“알겠습니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파도 말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요.”

“좋다, 그의 운명을 읽겠다.”

위대한 존재 중 1명이 정광을 내뿜었다.

콰아아아아아.

빛나는 모습으로 그는 계속해서 성진의 운명을 읽으려 했다.

그런데, 돌연 그의 입이 열렸다.

“비가…… 비가 내릴 것이다.”

그는 뜻 모를 소리를 계속 중얼거렸다.

“무지개의 비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음?”

“푸른 창이 세계를 찢을 것이다. 윽…… 이럴 수가! 넌, ……넌!”

콰르르응!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쳤다.

“크아아아아악!”

“이런! 도망쳐라!”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엿보아선 안 되는 운명이었다! 어서 가라!”

위대한 존재 중 1명이 손을 휘적거리자 하얀 끈이 일행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젊음을 되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위대한 존재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가! 나가라! 너희까지 벌을 받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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