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화
유리온은 꿈을 꿨다.
가시나무 관을 쓴 그는 꿈을 꿔 세계를 관조했다.
흘리드스카르프에 앉아 모든 세계를 보았던 오딘과 비할 순 없겠지만, 유리온은 나름의 신통력을 발휘해 스칸다 종말의 단서들을 찾았다.
‘이건…….’
별자리 관도 시초의 유적에서 일어난 일과 무관할 순 없었다.
곧 하늘에 무시무시한 눈을 한 몰타가 비추었고 요정들은 절망했다.
모든 몰타와 싸워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오래전 기억에 몰타의 역대 황제들이 늘 같은 모습이었다는 게 각인되어 있었다.
‘큰일이다!’
단순히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도 길다고 느껴졌다.
종말.
막지 못하면 종말이었다.
이미 죽어 가고 있는 세계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그도 간절히 기도했다.
이미 스칸다 곳곳에서 몰타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마수가, 그의 무서움이.
스칸다는 이제, 다시금 몰타의 노예가 될 상황이었다.
그에게 구속되어 영혼과 삶을 빼앗긴 채, 차원을 넘나들며 정복 전쟁에 휩쓸릴 것이다.
유일하게 그를 막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뿐이었다.
몰타가 기운을 조금밖에 회복하지 못한 이 순간만이 그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 기운은…….’
메이른이었다.
그가 섬겼던 고귀한 메이른의 기운도 함께 느껴졌다.
비록 시조들이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여 스칸다에 해를 끼쳤었지만, 메이른은 달랐다.
그렇기에 유리온은 그녀를 믿었다.
하지만, 불안하긴 했다.
그녀만으로는 이미 기울어진 승패를 뒤바꿀 순 없었다.
‘메이른 님…….’
검은 하늘이 일렁여 치열한 유적의 상황을 드러냈다.
그 상황을 본 유리온은 한 차례, 크게 놀랐다.
‘초모?’
자신에게 용의 피를 건네고 지혜의 샘에 접촉한 남자였다.
그가 있었기에 자신은 제헤르라는 이름을 버리고 당당히 유리온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유적 안의 상황은 처참했다.
끔찍하고 쉽지 않은 전투가 계속됐고, 그들의 패배로 귀결되는 부정적인 미래만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메이른을 믿었고, 초모를 믿었다.
지금, 그들에게 스칸다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결국 끔찍한 상황이 펼쳐졌다.
유리온은 3대 몰타가 힘을 모으고, 메이른이 몰타와 융합됐을 때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안 돼!’
유리온 또한 초월자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때문에, 그는 무언가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그가 행하는 일에서 성공은 오로지 그의 덕이었고 실패는 그의 탓이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그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공손히 손을 모았다. 무언가를 염원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유리온뿐만은 아닐 것이다.
저 끔찍한 하늘에서 어찌 희망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별자리 관의 모든 이들은 균열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과 싸우며 기도했다.
그들이, 그들이 반드시 해내기를.
유리온은 이 염원이 그들뿐만 아니라 스칸다의 생명 모두에게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검은 불꽃은 결국 그들에게 향했다.
‘끝이다.’
끝.
어떤 이는 유리온이 무언가의 끝을 너무 쉽게 말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몰타의 힘을 알았다.
저 화염은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비록, 몰타가 되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진 힘의 반도 못 낸다고 하여도 저 불꽃은 필멸자가 견뎌 낼 수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검은 불꽃이 마침내 외부 방벽을 깨부수며 전진했다.
모험가 일행이 곧 불길에 휩싸여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런데 두 다리를 땅에 붙이고 선 기사가 불꽃을 막았다.
아주 잠시 동안 홀로.
그 짧은 순간, 모두의 끝없는 절망은 한 줄기 희망으로 바뀌었다.
“제발…….”
“제발!”
“견뎌요! 제발! ……견뎌 줘요.”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는 불꽃을 견뎌 낸 기사는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어렵게 전진했다.
유리온조차 그 모습을 보며 기대를 품었다.
‘혹시…….’
혹시, 아직 포기하긴 이른 것 아닐까?
그의 생각과 모두의 생각은 같았는지 그들이 한 발짝 다가갈수록 고함과 열망은 커져만 갔다.
마침내, 그들이 검은 불꽃을 헤치고 끔찍한 희생을 치른 후에 몰타를 베었을 때는 모두 환호했다.
환호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균열이! 균열이 닫히고 있어요!”
“부상자부터 한쪽으로 모아!”
“유리온 님은! 유리온 님은 무사하신 거야?”
“무사하셔!”
끔찍한 하늘이 깨져 나갔다.
유리온은 꿈을 꾸었다.
창백한 안색에 아름다운 외모.
고귀한 메이른이 빛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유리온의 팔을 붙잡았다.
“유리온.”
“메이른 님…….”
“나는 가야 한다.”
유리온은 울었다.
그 자신이 메이른을 따랐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늘 그 혹은 그녀를 잊은 적 없었다.
“가지 마세요! 저희는……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유리온, 너와 한 시대를 함께했던 우리는 먼지가 되어 흩어졌어. 하지만 넌 달라.”
“나는…… 나는 뭐죠?”
메이른이 유리온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우리가 태어난 의미는 같지만, 살아갈 의미는 달라. 그 의미는 너 스스로 찾아라, 유리온.”
“메이른 님…….”
“살아가라, 유리온. 언제나 지켜볼게.”
“……알겠습니다.”
메이른은 그렇게 사라지고 유리온은 꿈에서 깨어났다.
***
“찾았…….”
“……니다! ……기에요!”
물을 먹은 것인지 모래를 먹은 것인지 아니면 둘 다 먹은 것인지.
입과 귀, 구멍이란 구멍엔 전부 진흙이 들어간 것 같았다.
-여깁니다! 여기예요!
-동네 사람들! 초모랑 하린짱 여깄어요!
-야! 누가 바스카리에 전화 좀 해 봐. ㅋㅋ
-아씨 ㅋㅋ 지역 번호 뭐더라? 경기도냐?
-경기도 바스카리. ㅋㅋㅋ
-여러분 풀다이브가 이래서 위험합니다; 스테미나 떡 돼서 혼절되면 ㄹㅇ 혼절됩니다!
-4명이 들어가서 6이 되었다가 2이 되었다;;
-4+2-4=2
-천재였누; 씽크빅 좀 했네;
-역시 밀수들…… 스탠포드와 하버드 복수학위의 괴물들…… 그들은 무한대까지 세어 본 적이 있다. 무려 2번이나!
-에엣, 마지데?
-스트리머가 없으니까 밀수들이 지들끼리 노네. ㅋㅋ
지지직거리던 채팅 창은 어느새 복구가 끝났고 흐릿한 음성은 계속 들려왔다.
“……는 어쩔까요?”
“그것도…….”
‘무거워.’
성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결국 다시 감겼다.
그 후, 한참을 그렇게 감겨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지저귀는 새소리, 새하얀 커튼을 감아오는 햇빛의 소리,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의 소리.
그것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너무도 깊게 잠들었던 성진은 깨어났다.
“하아…….”
최대 통각 수치 때문에 느껴지는 욱신거림보다 정신적인 피로가 극에 달했었다.
단잠에서 깨어나자 채팅 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하이요.
-채팅 창 본다! 봐! 딜레이 있나?
-일어나자마자 눈에 띄는 채팅 ‘오하이요’ ㅇㅈㄹ ㅋㅋㅋ 스트리머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초모, 대체 당신은 어떤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스르륵.
성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다가갔다.
큰 문 옆에 놓여 있는 거치대.
그곳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찌그러진 갑옷과 구멍 뚫린 로브.
성진은 그것을 쓰다듬었다.
모든 게 꿈같았다.
여태 고군분투하던 그가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스칸다에 와서 그런 것들을 깨우치는 것 같았다.
찌그러진 갑옷 밑에는 여전히 좋은 친구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똑, 똑.
“형님, 옷 벗고 계신 거 아닙니까?”
“네, 일어났습니다.”
-옷 벗고 계신 거 아니죠?(기대감이 어림)
-너만 어림.
아마 채팅 창에서 초모가 깨어났다고 야단법석을 떨어 댔을 테니 그걸 보고 송하린이 찾아온 것 같았다.
끼이익.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와 성진의 상태를 확인하고 크게 안심했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듣지 못하도록 성진에게 속삭였다.
“다행히, 로그아웃이 됐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목이 너무 타서 생수를 한 통 다 마셨습니다.”
사막에서의 일 때문에 정신적인 갈증이 심했던 것 같았다.
성진은 후유증으로 별다른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쓸쓸함은 남았다.
성진이 갑옷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송하린이 말했다.
“좋은 사람들이었지 않습니까?”
“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나간 김에 웹서핑을 좀…… 하고 왔는데.”
송하린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기사 몇 개를 훑었는데 역시, 번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데자뷰 측에서 이번에 심대형 군과 이선익 군을 위해 뭐, 뭔가 한다던데요?”
-아무튼, 유식한 단어 있자너;; 잘 모르겠지만 뇌파 수술 어쩌고;
-뇌에 자극을 줘서 깨어나도록 유도하는 거랭.
-ㅎㄷㄷ 근데 그거 캡슐이랑 연결되어 있는데 가능한 거임?
-그게 머시냐 음…… 원래는 안 되는데 시간이 오래 지났고 연결 해제한다고 추가적인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거래. 미리 조금씩 건드렸었나 봐.
-잘 됐으면 좋겠다. 뿌힝 ㅠㅠ
-우리 수신료도 그 수술로 가겠네?
-수신료의 가치, 제발 내 돈 가져가서 해피 엔딩 좀. ㅠㅠ
“네, 저런 것들을 한다더군요.”
“잘됐으면 좋겠네요.”
그들은 결국 번인이었던 것일까.
다른 무엇보다 그 사실이 슬펐고 번인들이 사라졌지만, 현실의 심대형과 이선익이 깨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안타까웠다.
모험가들의 우상이었던 ‘좋은 친구들’의 비밀을 엿본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성진이 우울해하자, 송하린이 말을 붙였다.
“아, 형님. 오다가 재밌는 걸 봤는데 형님도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이리 와 보시면 압니다!”
그들은 문을 다시 열고 회랑을 통과해 한 층을 더 올라갔다.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바스카리의 대성궁이었다.
대성궁은 광장을 지척에 두어 어느 위치에서건 보이는 곳이었다.
층을 올라가니 돌출된 중앙 테라스의 앞에 사제들이 좌우로 도열하고 있었다.
‘뭐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성진이 송하린을 쳐다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고 그를 앞으로 데리고 나갔다.
빛과 그림자가 그들을 환영했다.
“깨어나셨네요!”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성진이 손사래 치며 괜찮다고 하자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중견 사제들처럼 좌우로 나뉘어 섰다.
성진은 테라스로 나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려 했다.
그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엄청난 떨림이 전해져 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소리의 파동은 더욱 커졌다.
마침내 그가 테라스의 난간에 다다랐을 땐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먹어 버릴 뻔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적이여! 기적이시여!”
“깨어나셨다! 깨어나셨어!”
“다행이야!”
바스카리의 모든 사람이 온 것처럼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양손을 맞잡고 뭔가를 염원하다 성진이 등장하자 해일처럼 일어나 환호했다.
성진은 가만히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
시간이 흘렀다.
불의 추기경과 바위의 추기경은 스스로의 죄를 밝히고 물러났다.
그들의 죄에 어떠한 처벌이 내려질지는 모르겠으나 완전한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였다.
교황이 주재하는 재판으로 넘어가도 되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위원회가 주관하는 형태의 재판으로 결정되었다.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해야 했다.
불의 추기경과 바위의 추기경은 각 교단에서 신망이 두터운 사람들이 꼽혔다.
불의 추기경은 노인이었지만, 바위의 추기경은 젊은 청년이었다.
그 눈에 깃든 패기에 많은 사람이 탄복했다.
마지막으로 물의 추기경은 조금 복잡했다.
그 또한 과거에 죄를 지었고 그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신민들은 그를 심판하기를 망설였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이었다.
비록 죄를 저질러 타락했었지만, 다시금 떨쳐 일어났기에 신민들은 섣불리 그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새로운 물의 추기경으로는 실바가 내정되었다.
아버지의 최후를 목격한 실바는 좌절하지 않았다.
모두 그를 걱정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성진은 이미 꽃의 추기경이 되어 있었고 다른 추기경들과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는 자리에 함께했다.
임명식은 대성궁에서 치러졌다.
모든 이들이 보고 싶어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밖에서 소리만 듣는 자들도 있었다.
임명식 중, 줄곧 의젓하던 실바가 성진에게 말했다.
“저…… 꽃이시여.”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셨나요?”
“……네?”
“제 아버지는…… 끝까지 용감하셨나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나요? 아, 아니라면…….”
성진은 물의 추기경이 기억났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 그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제 아들은 저와 다를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처럼 어리석게 길을 잃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요. 저는 실패했지만, 실바는 다를 겁니다. 의젓한 아이이고 실패한 아버지의 길을 보았으니까요.
성진이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실바의 어깨에 얹었다.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정말인가요?”
“당신을 아끼고, 바스카리를 사랑하신 분이었죠.”
“제가 꼭……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스으윽.
실바의 머리에 관이 씌워졌다.
그 순간,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겁했다.
콰아아아아아!
세찬 물줄기가 바스카리의 모든 분수에서 그것들을 터트릴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와아아!”
“뭐, 뭐야!”
그렇게 추기경 임명식이 지나가고, 가장 중요한 안건이 남았다.
대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은 바스카리의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이었다.
교황의 임명.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바스카리가 신성 국가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런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결론이 났다.
스칸다의 종말을 앞두고 꽃의 추기경이 그 위치에 올라야 한다는 결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즉위식 당일이 되었다.
대성궁이 아닌 광장에서 진행된 이번 행사에는 바스카리의 모든 이들이 참석했다.
송하린은 동부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고, 성진 홀로 강단에 서게 되었다.
-우효!! 몬스터랑 총질하던 내가 이 세계에선 최강 힐러?
-너무 아득해서 언젠지도 기억 안 난다;
-스칸다 언제 끝나냐? 그때 올란다!
-라며 계속 보는 중.
성진에게 관이 씌워지고 그는 이제 성물 취급까지 받게 된 하얀 검을 검집째 들어 올렸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군중은 술렁였다.
그렇게 파도가 잠잠해질 무렵, 성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존망의 기로에 섰습니다.”
“와아아!”
“조용! 자중하세요!”
신관들이 통제하자 신민들은 입을 꾹 다물고 이야기를 들었다.
“서로에 대한 미움을 멀리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군중은 그 얘기에 귀 기울였다.
“앞으로 이방인의 차별 대우를 금합니다. 이것은 바스카리에서 시작되어 스칸다의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갈 교령입니다.”
꿀꺽.
“그리고…… 우리는…….”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연설이 이어졌다.
별자리 관의 유리온, 태양성의 아서, 그리고 맹의 수뇌부와 영원의 용광로의 산왕까지.
성진과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모든 것은 성진이 각 세력에게 보낸 서한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들의 입은 각기 다른 시간에 열렸지만, 같은 말을 했다.
-세계를 하나로.
“스칸다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로 일어설 것이다.”
“모든 힘이 모일 것이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
“흑…… 흐윽…….”
“그만 울어, 예지야.”
“넌 친구가 되어서 슬프지도 않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정재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친구들의 허상은 번인이었던 것 같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친구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좋은 친구들에게는 한 가지 후회가 남았다.
그들과 대화하지 못한 것.
친구들이 남겼던 흔적과 대화하며 추억을 다시 떠올리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될 것이라는 건 충분히 알았지만, 표류하는 이가 갈증을 못 이겨 바닷물에 손을 대는 것처럼 그들도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수술이 끝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연차는 바닥나 가는 와중에도 꾸준히 병실을 찾았다.
그들을 위로하는 이도 많았고, 굳이 찾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VVIP 병실은 그들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만을 위한 장소였다.
이제는 캡슐과 멀어진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실에는 거대한 캡슐이 사라지고, 말끔한 침상이 2개 생겼다.
“안 돌아가?”
“몰라.”
“가야지.”
“가면 언제 또 와.”
“대형이랑 선익이가 죽었냐? 장치만 벗겨 내고 머리 좀 몇 번 지진 거 가지고 뭐.”
“너부터 죽을래?”
송예지가 으르렁거리자 정재민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누워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그들의 모습에 친구들의 마음이 아파 왔다.
김상혁은 오늘도 말이 없었다.
수술이 끝났을 때 가장 고대했던 것은 어쩌면 그였을지도 몰랐다.
이선익이 히죽 웃으며 큰 팔로 그의 어깨를 감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는 우울증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자신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안 건지, 아니면 친구들이 돌아왔을 때 제대로 웃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건강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실의 구조는 특이했다.
VVIP 병실임에도 침상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이것도 안정기를 거친 후에 조정된 위치였다.
둘이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은 꼭 자는 것처럼 보였다.
꼭 잠에서 깨어나 하품을 하고 웃을 것 같았다.
“뭐였던 걸까?”
김상혁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이런 말을 내뱉었다.
송예지와 최혜연이 눈썹을 꿈틀하며 답했다.
“뭐, 번인?”
“너 아직도…….”
“너희도 봤잖아. 분명히, 분명히 내 친구들이 거기에…… 거기 있었어.”
“…….”
“상혁아.”
“꿈이, 꿈이 아니었다고. 나는 정말…… 정말로…….”
김상혁의 눈에서 구슬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록 친구들 앞이라 서럽게 울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이 애처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송예지와 최혜연의 마음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번인이 자신의 친구들이라고 믿었고 또 그 세계에서 사라지면 현실로 건강하게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분명, 그럴 확률은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궁지에 몰리면 누구나 기적을 바라게 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다.
동화에서나 일어날 일이다.
정재민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상혁아, 네 눈물 좀 빌려도 될까?”
“뭐? 왜, 왜?”
“이럴 때 눈물 한 방울이면 띠옹 하면서 잠든 사람이 깨어나잖아.”
“병신아, 그건 아름다운 미녀의 눈물이고.”
“아, 맞네. 추남은 안 되겠구나.”
키득거리며 웃는 그들은 언제 서글펐냐는 것처럼 그들의 학창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정재민이 즉석 사진기를 꺼냈다.
“오랜만에, 한 컷?”
“야, 이제 자리도 없잖아.”
김상혁이 만류했다.
침상의 뒤쪽 벽에는 큰 칠판이 걸려 있었다.
이 사연을 알면 조금은 슬플 것이다.
칠판에는 병실의 이 자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사진의 귀퉁이에는 다녀간 날짜가 적혀 있었다.
매달, 모두 올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사진을 남겼다.
친구들의 캡슐과 찍은 사진이 빼곡했는데, 최근 두 장은 수술에 들어가기 전과 수술이 끝난 후였다.
심대형과 이선익이 캡슐이 아닌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칠판은 그 두 장으로 가득 차 버려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뭐 어때, 다시 하나 사면 되지.”
“하, 그러던가.”
그들은 자세를 잡고 익숙한 그 자세로 침상의 곁에 섰다.
렌즈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에서 쓸쓸함이 엿보였다.
언제까지 자신들은 함께할 수 있을지, 이 인연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불안해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힘껏 웃었다.
“자! 스카아아안다!”
“이 보여! 이 보이라고! 스카아아안다!”
“눈 감지 마!”
“좋으은 친구우들!”
찰칵!
지이잉.
해맑게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는 방금 나온 사진을 펄럭였다.
곧 흐릿했던 장면이 밝아질 것이다.
“뭐 좀 먹을까?”
“요 앞에 부대찌개 맛있잖아.”
“거기 서른 번 넘게 먹었는데?”
“맛있는 건 불변이야. 거기 가자.”
“그럼 늦게 오는 사람이 사기로 할까?”
“야! 나 힐 신었어!”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
“힐로 맞아 볼래?”
“도구가 제법 매섭군. 엔빵하자.”
왁자지껄 웃으며 병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쿵.
“야, 왜 안 나가?”
“정재민, 실수로 똥 쌌냐? 움직여!”
“야……. 야…….”
“왜?”
“왜 다 눈을 뜨고 있지?”
“……뭐?”
정재민의 그 말에 넷은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거칠게 돌렸다.
심대형과 이선익이 분명 눈을 뜨고 있었다.
“뭐, 뭐…… 뭐야?”
“야…… 야아아!”
심대형이 인상을 쓰고 꿍얼거렸다.
“……끄러.”
그들은 본인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도 모른 채, 침상에 누운 친구들에게 갔다.
“이 개새끼! 나쁜 새끼! 우리가 너희 때문에!”
“흐아앙! 나쁜 자식아! 이선익, 심대형 이 쓰레기 같은 자식들아!”
“간호사! 아, 아니!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벨! 벨 있어!”
“그만…… 그만…….”
심대형의 이불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친구들과 달리 김상혁은 이선익에게 다가갔다.
“……선익아.”
“……아.”
상혁아.
“너 븅신이야, 알아? 아냐고?”
“아아.”
알아.
“이…… 이…… 다시는 그딴 짓 하지 마.”
“우우, 우우 어어.”
꿈을, 꿈을 꿨어.
“꿈이든 뭐든! 뭐가 앞이고 뭐가 뒤냐고오!”
김상혁은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이선익이 깨어난다면, 아니 시초의 유적에서 일어났던 사고의 순간에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나란히야.”
“…….”
“우리는 나란히 가자고…… 제발…….”
“……으.”
응.
칠판은 하나면 충분했다.
그들의 병실에서의 사진은 이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기적은 분명 동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고, 아주 드문 경우에만 일어났다.
하지만, 분명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니었다면 기적이라는 말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기적이 그들에게도 찾아 왔다.
병실 밖에 누군가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눌러 쓴 그는 김상혁과 대화했던 데자뷰의 직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