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155화
***
지혜의 고리.
최별이 막 태양왕이 된 시기에 탑주들이 옹기종기 모여 뭔가를 의논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 말은…….”
리베스 마탑의 탑주 카이덴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파에스 마탑의 탑주인 공이 물었다.
“카이덴, 잠이라도 설쳤나? 왜 그래?”
“아, 아니. 아닐세.”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자네가 조용히 있으니 회의가 진행되질 않잖아.”
“공, 그게 말이야…….”
카이덴이 자신에게 집중한 시선들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꿈을 꿔.”
“나도 꿈은 꾼다네.”
“난 또 뭐라고. 잠이 잘 오지 않으면…….”
“그게 아니야. 그 아이의 꿈을 꿔.”
“…….”
카이덴이 말하는 그 아이가 누군지 짐작한 것은 공뿐만 아니라 다른 마탑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리카? 시리카 그 아이를 말하는 거야?”
“……응.”
“이 사람아, 아직도 못 잊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 아이는 내 가슴에 묻었어. 하지만, 꿈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을 한다고? 그 아이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골머리 썩겠나?”
“뭐라고 하는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날이 오면……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친구들은 재가 되어요.
“그날이 오면……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친구들은 재가 되어요.”
“그게 무슨 뜻이지?”
“몰라, 모른다고.”
“쯧쯧…… 자네도 모르는데, 우리가 도움이 되겠나? 그리고 꿈이라곤 일절 안 믿던 노인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거야?”
“그러게 말이야. 그게 꼭…… 꼭 진짜 같아서 그래. 시리카가 살아 돌아와서 내게 말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그건 그렇고, 할아버지 친구들이면…… 우리야?”
“내가 다른 친구가 있었나?”
“빌어먹을, 남의 기분 망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미안. 그런데, 그날이 언젤까?”
“그날이라니?”
“우리가 재가 되는 날 말이야.”
“난들 알겠나? 네 망상 때문에 죽기는 싫으니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카이덴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내가 과민한 거겠지?”
“요즘 시기가 그러니. 우리의 황혼기와 대륙의 황혼기가 동시에 올 줄이야.”
“얼마 전에 남부 쪽에서 대규모 균열이 또 터졌어.”
“그래서? 해결은?”
“우리 쪽에서는 조사관이랑 일선 애들 파견하고, 협회 쪽은 별 몇을 내려 보냈어.”
“그 치들도 부족한 인력에 고생이구먼. 별들 움직이는 데 비용이 얼만데.”
“별들도 고생이지. 은퇴할 나이가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현역이니까.”
“다른 별이 충원되어야 은퇴를 하든 하겠지.”
공이 검지를 추켜올렸다.
뭔가 떠오른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별로 승급한 이들 명단을 확인했는데 상당히 재밌더군.”
“아, 나도 봤어.”
“50년 전에도 유명했던 사람들이야. 최별과 송하린.”
“동부와 서부의 야생마들이었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여전하다는 소문이 있어. 둘 다 맹과 원탁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다는군.”
“나머지 1명은 누군데?”
“초모.”
초모라는 말에 카이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의 오판으로 초모의 성채남보석 승급이 늦춰졌다.
카이덴은 그것을 민망해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은…….”
카이덴이 일전의 일 처리를 탑주들에게 말했다.
“호오, 자네가 실수를 다 하고.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면목이 없군. 그 초모라는 친구에게도 말이야.”
“시리카 때문에 눈알이라도 회까닥 돈 것 아니야?”
“그러니까. 아마도 그랬겠지. 다 내 탓이야.”
“들어보니 당시 정황이 확실한 것도 없었으니, 자네 말도 일리가 있었어. 물론 틀렸지만!”
“…….”
“덕분에 초모뿐만 아니라 함께 목숨 바쳐 싸운 모험가들에게도 모욕을 줬구먼그래. 어떻게 할 텐가?”
“그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지급되었는가를 묻는다면 협회에 그렇게 요청했네. 그런데…….”
“왜? 그들이 실추된 명예를 갚기 위해 널 죽이기라도 하겠대?”
“아니,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군.”
“뭐?”
“필요 없다고 했다고. 오히려, 남은 보상이 있다면…… 그에게 지급해 달라고 하더군.”
“그라면…… 초모?”
“그래.”
공이 팔꿈치를 탁자에서 내려 팔짱을 꼈다.
그리고 몸을 한껏 뒤로 젖히며 말했다.
“요 몇 개월간 초모 얘기만 밥 먹듯이 듣는군.”
“그러게.”
“신기한 건 나쁜 얘기가 하나도 없어. 그와 접촉한 이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지.”
“그것도 맞고.”
“그의 무엇이 특별한 걸까? 카이덴, 자네는 실제로 봤으니 알 것 아닌가?”
“글쎄, 내가 접촉한 건 잠깐이었고 대화를 많이 나누지도 못했네.”
“그런데?”
“욕심이 없어 보였어.”
“뭐? 크하하하! 카이덴이 그런 맹한 소리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물어보지나 말던가. 아무튼, 사과의 의미로 적당한 보상을 주려 하는데 고려할 만한 게 있나?”
“있기야 있지.”
“오, 마침 다행이군. 뭔데?”
“젊음.”
“…….”
카이덴이 난색을 표했다.
공이 말을 꺼낸 젊음은 적당하지 않은 보상일 수도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금지된 마법을 사용해서 그 꼴이 된 거야. 어떻게 되돌리려는 거지?”
“어떻게 되돌리기는, 우리가 왜 되돌려?”
“내가 잘못 이해했나 보군. 그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소개해 주는 거지.”
“금지된 마법을? ……아니, 잠깐! 자네 설마 그 여인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거야?”
“추방자들의 위치야 몇 년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지. 나이가 문제인지 한곳에 정착하고 움직이지 않더라고.”
“과연…… 그거라면 문제될 건 없겠군. 그런데, 또 다시 젊어지기 위해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거야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될 노릇이고.”
“그런…….”
말이 재차 늘어지려던 찰나,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새로운 균열을 감지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삐이.
삐이이이.
“망할, 이건 또 어디의 균열이야?”
“가만, 여기는 저번에 거기 아니야?”
“대규모 마력 파동이 있었던 곳. 거기잖아?”
“조사대는? 그때 조사대 출발했던 것 아니었나?”
“성국은 애초에 지원 요청을 무시했고 협회도 적당한 모험가 몇 명 붙여 준 게 다였지.”
“그들은 지금 어디 있지?”
“글쎄? 한 번 확인해 볼까?”
탑주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소식을 물어온 중급 마법사.
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며칠째 소식이 끊겼다는군.”
“제기랄…… 다음 조사대는 최소한의 실력을 갖춘 이들이 출발해야 해. 균열을 닫을 수 있는 사람도 함께여야 하고.”
“그렇게 큰 균열은 아닌 것 같군. 그러면 아직 시간은 넉넉한 편이야.”
“일단 확실하게 하자고. 성국과 협회에는 우선적으로 연락을 해.”
“나머지는?”
“오지도 않을 거야. 위치가 애매하잖아.”
“하필, 이유 없는 사막에 균열이 생기다니. 바스카리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에.”
“그러니 그들도 돕지 않겠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자고.”
***
[제목 : 이방인의 노예를 금한다.]
크으, 주모! 여기야! 왜 이렇게 늦었어?
먼저 시작했다고!
-야 솔직히 3명이서 스칸다 뒤집어엎는 거 실화냐고. ㅋㅋ
-그 와중에 사회적 위치 초모가 제일 낮은 것도 코미디잖아. ㅋㅋㅋ
-명예욕이 없어서 그래. 우리 성자님께서는 남들 한 자리씩 차지할 때 마수 대가리 깨고 다니셔서.
-ㄴㄷㅆ.
-아, 긍데 귀족들 좀 쎄하던데.
-지들이 쎄하면 어쩔 거야? 최별이 란슬롯 게또했는데. ㅋㅋ 걍 원탁의 기사가 귀족 사병들 다 합친 것보다 셈.
-흑백쌍존도 대기 중이라고~
[제목 : 와 대박, 데자뷰 스칸다 재오픈 안 하면 강인호가 좌시하지 않겠다고 함. ㄷㄷ]
참고로 나임.
-강인호좌면 ㅇㅈ이지.
-데자뷰 진짜 큰일 났네;;
-이렇게까지 일 키워야 하나?
-강인호까지 가세하는 거냐고. ㅋㅋ
-그 ‘지옥 마르티즈’ 강인호가?
-판 너무 커진 거 아니냐;; 강인호면 데자뷰 꼼짝 못 하는데;
-속보) 강형, 결국 구국의 결단 내려.
-강인호면 또럼프정도는 와야 수습될 텐데; 괜찮겠냐고 데자뷰!!
[제목 : 펀딩 어케 됐냐?]
한동안 잠잠 하지 않았냐?
-296%
-머?
-추정치가 그렇다던데? ㅋㅋㅋㅋ 목표치의 296% 달성했다는 얘기 들은 것 같음.
-난 420%라고 들었는데.
-배고픈 아이 : 엄마, 우리 이제 바스카리 가는 거예요?
-당근 빳다지, 오우쉣 후원금 너무 달아. ㅋㅋ
[제목 : 천마에 아서에 난리 났네 ㅋㅋ]
팀원 버스 미쳤냐고. ㅋㅋ
네? 기사가 초모라고요?
-네? 송하린 카드 안 찍고 탔다고요?
-네? 아니라고요? 카드는 찍었는데 학생이라고 했다고요?
-이제 바스카리 출발이냐고 ㅋㅋ 버스 언제 출발하냐고~
-최별은 당분간 못 보는 거 아님?
-문제 터지지 않는 이상은 보기 힘들 듯?
-누가 또 플래그 세우냐.
***
베디비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태양왕이라…… 멀린이 성검이었다고? 참…… 재밌군, 재밌어.”
그의 옆에 선 가신이 물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우십니까?”
“재밌지 않을 수가 없지. 곧 일이 터질 거야.”
“네? 일이 터지다니요?”
“아닐세, 아니야. 그보다, 다들 모이고 있나?”
“네, 베디비어 님께서도 슬슬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베디비어가 회랑을 걸었다.
그는 걸으면서 다른 기사 몇을 마주쳤다.
“졸려 죽겠는데 아침부터 부르고 난리야.”
“하하하, 부지런한 게 좋은 거지. 디고어 경도 덕분에 하루를 좀 더 빨리 시작하잖습니까?”
“난 원래 빨라. 내 하루까지 빠를 필요는 없다고.”
“뭐, 어쩌겠습니까.”
베디비어의 뒤에는 이제 귀족들이 따르지 않았다.
그가 태양의 기사단, 성배가 된 후로 선언한 것 때문에 그랬다.
-날 지지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권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 말에 개미 떼처럼 모였던 귀족들이 화들짝 놀라 흩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회의장으로 향하자, 모두 모여 있었다.
베디비어의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흑백쌍존이었다.
베디비어의 눈꼬리가 가늘어지자, 케이가 그에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곧 떠나실 계획이고 대회의장에 온 것도 이방인 노예에 대한 문제 때문에 아서께서 호출하신 겁니다.”
“그렇다면야.”
고개를 작게 숙이고 베디비어와 일행이 자리에 앉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의논했고, 그 논의가 꽤 길어졌다.
디고어가 경박하게 하품을 했지만,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의제가 돌고 돌아 결국 이방인 문제까지 왔다.
가장 핵심적인 의제이자 해결하기 난감한 문제였다.
그에 여러 가지 얽혀 있는 문제가 꽤 복잡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움직임은 어떻지?”
“일단 수긍하는 눈치이긴 했습니다. 대귀족 가문들을 제외하고는 이방인 노예 정도야 얼마든지 해방할 수 있으니까요.”
최별이 트리스탄에게 물었다.
“트리스탄, 그 말은 대귀족들은 반대한다는 얘기인가?”
“……그렇습니다.”
태양의 뜻은 절대적이다.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큰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미친 짓이었다.
“왜지?”
파시벌이 최별의 질문에 답했다.
“이방인 노예들로 꾸린 사업이 단기간에 크게 불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업?”
“토지와 이방인 노예들을 이용한 농경은 물론이고…… 인력을 이곳저곳으로 운용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불법적인 일도?”
“카멜롯은 태양이 주인입니다. 태양의 뜻이 곧 법이지요.”
“말 돌리지 말고.”
“제 말은…… 음…… 아마도 아서께서 좋아할 일은 아니므로 아마 불법적인 일이 맞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아직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다?”
“음…… 이유를 찾자면 이것뿐만이 아닐 겁니다.”
“말씀하세요.”
케이가 대신 얘기했다.
“제가 대신 얘기하겠습니다.”
“케이.”
“지금은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아마 귀족들도 섣불리 행동하기 어려운 상황이죠.”
“어째서?”
“카멜롯에 나타난 태양이 자신들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이죠. 그들에게 당근은 주어지지 않고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만 하니.”
“보상이라면…… 금인가?”
“금뿐만 아닙니다. 권력이라는 건 재밌어서 잠시라도 그것을 맛 본 자는 그것을 다시 내려놓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합니다.”
란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최별은 그에게 물었다.
“란슬롯은 어떻게 생각하지?”
“필요 없는 놈들입니다. 그들을 잘 구슬리면 겉으로는 평화적으로 넘어갈 수 있겠죠.”
“그렇지 않다면?”
“주인을 못 알아보고 무는 놈들도 있을 겁니다.”
최별은 입을 굳게 닫았다.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본보기로 숙청하라는 얘기구나.
-ㅎㄷㄷ 란슬롯 과격해!
-근데 저게 맞는 말이지. 뭐가 예쁘다고 구슬려야 하냐, 그 악인들을.
디고어가 말했다.
“어차피 필요 이상으로 귀족들에게 힘이 갔었죠. 원탁의 오랜 싸움이 그들끼리 야합하고 힘을 기르게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어차피 품지 않을 자들이다?”
“징그러운 놈들을 뭐 하러 품어요? 지금도 미적미적하는 놈들은 하나 같이 목을 베고 싶은데.”
“대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놈들이 문제에요. 어쭙잖게 거들먹거리면서 물을 흐리는 자들. 아마 저라면…….”
“디고어라면?”
“그들이 함부로 행동하도록 은밀히 종용하겠어요.”
“그래서?”
“사고를 치게 만들어야죠. 그럼 그걸 수습한다는 명목 하에 귀족들의 힘을 완전히 깔아뭉개고 흡수할 수 있으니까요.”
최별이 고개를 돌려 기사들을 보았다.
문득, 그녀의 시선을 잡아챈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는 베디비어였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서?”
“괜찮아.”
“아마, 이제 곧일 겁니다.”
“그들이 행동하는 게?”
“네. 제가 오웬에게 압박을 넣었으니 그도 불안할 겁니다.”
베디비어는 먼저 수를 썼다.
원탁이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할애해야 하는 인력과 시간이 너무 컸다.
그래선 안 됐다.
“제가 쓰는 귀족들이 대귀족들을 종용했습니다.”
“어떻게?”
“원탁이 귀족들의 힘을 모두 빼앗을 거라고. 시작은 이방인 노예일 것이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도 남김없이 가져갈 거라고. 원탁에서 그런 얘기들이 오고 가고 있다고.”
“……어째서?”
“그편이 빠르잖습니까? 아마, 지금쯤…….”
콰아앙!
대회의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서 님! 대귀족들이…….”
최별이 베디비어를 노려봤다.
베디비어가 그 시선을 받고 어깨를 으쓱했다.
“무른 행동은 더 큰 피해로 이어집니다. 결단을 내려야죠.”
***
백조 광장.
원탁에게만 허락된 대 광장에서 수백 명의 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귀족들의 사병이었다.
“아서! 이럴 수는 없다!”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원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기함했다.
이방인 노예 수백.
병사들은 이들을 무릎 꿇게 한 후, 사방을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대화를 하자는 것이지. 하하하!”
최별이 베디비어를 째려봤다.
베디비어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어차피 터질 일이었습니다. 시기를 당긴 것뿐입니다.”
“이방인이 다치잖아.”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날 수 없습니다. 오웬과 대귀족들은 손대지 말아야 하는 사업에까지 손을 댔습니다. 돈과 권력에 망령이 들어 저지른 실수죠.”
“……심판을 두려워한 거군.”
“썩은 부위입니다. 도려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방인들을 미끼로 내세우다니…….”
“이대로 두면 대귀족들은 전부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 겁니다. 정신없을 때 몰아쳐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없다, 베디비어.”
“죄송합니다.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오웬과 대귀족들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의 타락이 탄로 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뭐, 뭘 잘못했다고!”
“이방인 노예를 금한다고 했을 텐데.”
“그러니까 이렇게 가져 왔잖아! 네가 원하는 이방인 노예!”
최별은 그들의 낯을 살폈다.
하나같이 탁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엄, 엄마?”
소란을 듣고 나온 이방인 능력자, 홍강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구속된 이들 중,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엄마! 엄마아! 엄마가 왜 거깄어!”
생선 눈을 하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홍강인을 발견했다.
“강인이? 강인아! 엄마 여깄어! 여깄다고!”
“엄마! 엄마아아!”
홍강인이 그의 어머니에게 달려가려다가 다른 이방인들에게 붙잡혔다.
“그만, 위험해!”
“하지만, 엄마! 엄마가 저기에!”
지켜보던 성진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오늘, 이곳에서 이방인과 스칸다인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에게 능력을 받은 이방인들은 성진만 쳐다보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피 튀기는 혈전이라도 벌일 것처럼.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분노의 연쇄는 좋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는 송하린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셨죠?”
“알겠습니다, 형님.”
송하린이 조용히 움직이며 최별에게 속삭였다.
최별이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았다.
스릉.
화르륵.
검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오웬, 너와 대귀족들의 악행은 천천히 심판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와 잘못을 한 이들이 짊어져야 할 것이지 다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만! 언제나 네가 옳은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네가 우리 없이 이들을 다스릴 수 있을까?”
“얼마든지.”
“하나만 약속하면 된다.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무엇을?”
“우리가 가진 것들을 더는 빼앗아가지 마라. 그렇게만 한다면…….”
“약속할 수 없다.”
“어째서!”
“네가 저지른 일 때문이다. 또한 너는 지금 태양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
“흥! 그깟…….”
그때, 오웬의 곁을 누군가 막아섰다.
그의 호위였다.
“위험합…….”
콰아앙!
오웬의 곁을 가로막은 이름 모를 기사는 송하린에게 걷어차여 날아갔다.
“커억!”
“이런.”
송하린이 재빨리 오웬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다.
오웬이 소리 질렀다.
“죽여라! 다 죽여!”
사병들이 정신을 퍼뜩 차리고 구속된 이방인 노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구속된 이방인들이 모여 있는 정중앙에서 큰 빛이 터져 나왔다.
후아아아앙!
“크아악!”
“뭐, 뭐야!”
텅!
텅!
콰아앙!
성진의 방벽이 이방인들을 감쌌다.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사병은 방벽에 튕겨, 나가떨어졌다.
이방인 노예들은 성진을 중심으로 재빠르게 모였고, 이방인 각성자들이 전투에 난입하려 했다.
그때, 원탁의 기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 나서지 마라, 곧 끝난다.”
“얌전히 무릎을 꿇어라! 너희의 죄를 용서받고자 한다면!”
사병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칼을 뽑아 원탁의 기사에게 대항하고는 있었지만,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인이 침묵하고 있었다.
송하린이 원탁의 기사에게 사람을 집어던졌다.
“크악!”
“컥!”
“놔, 놔라아악!”
날아온 것은 오웬과 대귀족들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지만, 이들의 파멸은 자신들이 앞당긴 것이었다.
대귀족들이 제압당하자, 사병들은 엉거주춤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란슬롯이 소리쳤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끝이다!”
“이…… 이런…….”
“어서!”
탕.
텅그렁.
사병들이 하나둘 투항했다.
성진은 모든 사병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자, 방벽을 거두어들였다.
“흑…… 흐윽…….”
“사, 살려…….”
오들오들 떠는 이방인들.
성진은 이들의 모습이 가슴 아팠다.
아무것도 아닌 이들에게 부려져 고통받았을 과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괜찮습니다. 안심하세요.”
그때, 저 멀리서 오웬에게 달려드는 이방인이 있었다.
홍강인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멈춰! 누가 저 사람 좀!”
콰앙!
“크윽…… 무슨 힘이.”
트리스탄이 붉은 기운을 두른 홍강인을 놓쳤다.
다른 기사들은 홍강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개새끼가아아!”
홍강인이 오웬의 멱살을 붙잡고 바닥에 눕혔다.
“컥…… 커억…….”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왜 괴롭혔어! 이…… 이…….”
홍강인의 붉은 주먹이 오웬의 얼굴을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만하세요.”
“하지만…… 하지만…….”
“집에 돌아가기로 했잖아, 강인아.”
“우…… 우으…… 우리 엄마가……. 몸도 안 좋은 우리 엄마가…… 우…….”
“…….”
성진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홍강인이 주먹을 그대로 내리꽂았다.
오웬의 머리 옆 바닥에.
콰직!
바닥이 그 충격으로 조금 갈라졌다.
“꼭, 꼭 데려가 줘야 해요. 나랑 우리 엄마…….”
“그래, 형이 데려갈 거야.”
“우으으…….”
홍강인이 그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최별은 바지를 적신 오웬에게 다가갔다.
“너희 대귀족들은 언제나 카멜롯의 암적인 존재였지.”
“푸흐흐흐…… 그래서?”
“베디비어, 이자들의 죄목을 말하라.”
“어…… 갑자기 물으시니, 음. 이리 가져오라!”
“예!”
가신들이 가져온 장부와 대귀족들의 죄목, 그리고 그와 연루된 귀족들의 죄목까지.
전부를 읽던 베디비어가 말했다.
“첫줄부터 눈이 썩을 것 같습니다.”
“그중 가장 큰 죄목이 무엇이냐?”
“태양의 뜻에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른 처벌은?”
“재산 몰수, 작위 박탈, 그리고 사형.”
“너는?”
“네? 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최별이 불타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화르륵.
대기를 뜨겁게 달군 검이 베디비어의 코앞을 가로지르고 지나갔다.
그녀는 베디비어를 노려보았다.
베디비어의 행동은 가장 큰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게 했지만, 성진과 송하린이 없었다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베디비어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채찍질로 봐주시지요.”
“그러지.”
“……감사합니다.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불타는 검이 그녀의 검집으로 들어갔다.
철컥.
“집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