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156화 (156/222)

# 156

156화

***

바스카리의 사제회는 최근 골치 아픈 상황에 놓여 있었다.

불의 추기경이 양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쥔 채 뭔가를 먹고 있었다.

쩝, 쩝.

“그러니까…….”

“언제부터 회의 중에 식사가 가능했던 거죠?”

“아! 죄송, 죄송.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이번 회의도 길어질 게 뻔하잖아. 아침도 거르고 이곳에 온 내 심정을…….”

“천박한 인간…….”

“원색적인 비난은 사양하고 싶군, 이것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말이야.”

사제회의 행사를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폄훼하긴 했지만, 굳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믿음도,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도 결국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었다.

쩝, 쩝.

“그건 그렇고, 카멜롯도 참 골치 아프게 됐어.”

“긍지 높은 태양의 궁전이 어쩌다가 이방인들의 놀이터가 되었을까, 참.”

“그들이야말로 스칸다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이야.”

빛과 그림자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시시한 얘기는 그만하죠.”

“그래, 나도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군.”

“그래도 이방인이 지도자가 된 이상 카멜롯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몰라. 조심해야 해.”

바람이 말했다.

“우리의 행동은 늘 같았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고.”

“예, 예.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금물.”

“성국이 오랜 기간 무리 없이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다.”

“단기간에 쇠락한 것도 그 때문이긴 하지.”

바람이 손을 휘젓자, 장식된 초가 꺼졌다.

후우웅!

“비꼬지 마라.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너희들의 신성력이 쇠퇴했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무슨 소리를.”

불이 손을 휘저었다.

화르륵.

초의 불꽃이 되살아났다.

바람이 신기한 듯 불의 추기경을 쳐다보았다.

“힘을 잃은 것이 아니었나?”

“전부 잃은 것은 아니지. 다들 마찬가지일걸?”

물과 바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처럼 마르지 않는 샘처럼 사용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신도들의 신앙을 바로잡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그건 희소식이군.”

“뭐, 크게 쓰임은 없지만. 아무튼, 다른 얘기를 하자고.”

“카멜롯이야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지만,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어. 우리가 그들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그게…….”

바위의 추기경이 움찔거렸다.

빛이 물었다.

“설마? 뭔가 있나요?”

“아니, 큰 건 아니고 조금 걸리는 게 있긴 하군.”

“뭐죠?”

“카멜롯의 귀족들과 끈이 조금 닿아 있었는데, 그것으로 트집을 잡을까, 신경 쓰이는군.”

“조금이 맞나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죠!”

카멜롯의 귀족들과의 끈은 단순히 교류의 의미가 아닐 것이다.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지원이 있었을 것이다.

“오래전 일이야. 이번에도 정치적인 지원을 부탁한다는 전언이 있었어.”

“그래서요?”

“무시했지. 난 패자의 말은 듣고 싶지 않거든.”

“카멜롯은 원탁이 전부예요. 그걸 아시면서 지원한 거예요?”

“알지, 하지만 원탁이 오래 유지되었잖아. 귀족들도 다소 느슨해졌었거든. 충분히 자금이 오고 갈 여유가 있었어.”

“그쪽도 안팎으로 아군을 만들었던 거군요. 바위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을 모르고.”

“중립의 성국 아니겠어? 내가 그걸 굳이 깰 이유도 없고 말이야.”

바위의 추기경이 씨익 웃었다.

그는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고 그에 따른 지원은 하지 않았다는 말을 성국의 이름을 들먹여 포장했다.

‘역겨워.’

빛은 이자들이 바스카리의 정점이라는 게 싫었다.

그건 그림자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이런 이들이 태반이었다.

당장 불과 바위, 그리고 물은 늘 이런 식으로 행동해 왔다.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그 경계에서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카멜롯의 귀족들보단 선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에서는 차악(次惡)이라 볼 만했지만.

불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꽃이 참으로 성가시군.”

“동감이야. 듣자 하니 카멜롯에서 이곳까지 순례로 당도할 것이라 하더군. 이용해 봐야 마차 정도.”

“크크큭…… 유난 떨기는. 신민들이 좋아할 만한 행사긴 하겠어. 우르르 몰려다니는 순례라니.”

“그런 거라도 해야 신도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나 보지. 어쩌겠나?”

빛과 그림자는 침묵했다.

둘은 사전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방인들과 합류해서 순례길에 오를 겁니다.

-규모는요?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빛은 괜한 발언으로 의심을 사지 않았다.

불과 물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이 망해 가니 그들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무슨 소리예요?”

“이방인이 그들을 대표하게 한다니, 초모라고?”

“기형적인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군. 아마 그 신성력에 기생하는 거겠지.”

“알 만하군. 너무 뻔해.”

빛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듣자 하니 꽃의 교단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이제 와 그 얘기를 뭣 하러 꺼내지?”

“그냥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꽃의 교단이 맞아요.”

“어째서?”

“애초에 그렇게 탄생한 교단이었잖아요. 이방인들이 세운 교단.”

“그러니까 근본 없다는 얘기가 나돌지. 내 이전 세대들은 왜 사제회에 그들을 받아 주었던 거지?”

“그때는 이방인의 힘이 강했으니까. 아마도 그들의 전력을 흡수할 생각이었겠지.”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 안타까운 일이군.”

그림자가 물었다.

“그를 인정해야 할까요?”

빛이 당황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저 늑대들은 자신들과 꽃의 교단과의 고리를 찾고 있었다.

그들이 무사히 바스카리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접점을 들켜선 안 됐다.

“흐음…… 것도 그렇군.”

“아예 무시하기에도 곤란해. 교단 내에서 대표를 정하는 것은 당연해. 또, 그것이 이방인이면 안 된다는 규율도 없고.”

“곤란하다, 참 곤란해.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잘못된 선례를 남기는 것 같아 꺼려지는군.”

빛과 그림자는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 얘기도 꺼내선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초모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모두 대응 방안을 고심할 때, 바람이 얘기했다.

“균열.”

“뭐?”

“균열이 열렸다는 얘기 들었겠지.”

“아, 그거 말이군.”

빛도 고개를 끄덕였다.

“코앞이야, 대비해야 해.”

“우리가? 무슨 수로? 우리는 여태 협조하는 모양새 아니었나?”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모험가 협회의 요청을 너무 오랫동안 무시해 왔어.”

“그래서 뭐? 그들이 돕지 않기라도 하겠대?”

“그래.”

“뭐?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제대로 들었어. 그들은 이번에도 지원이 없으면 나서지 않겠다고 전해 왔다.”

“건방진…… 어쩔 생각이지?”

“우리가 그간 협회의 요청을 무시하고 행동한 것은 사실이야. 또한, 모험가 협회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며 세계의 질서에도 기여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 이를 인정하나?”

불, 물, 바위, 그림자, 빛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그들의 끄덕임을 일일이 확인하고 말했다.

“그럼 도와야지.”

“어떻게?”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균열을 닫을 수 있는 신관이다.”

“…….”

불, 물, 바위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들은 균열을 닫을 만한 신성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또한, 그런 신성력이 있다 한들 나서지 않을 것이고.

결국, 빛과 그림자 그리고 바람 중의 1명이 가야 했다.

빛과 그림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바스카리를 비우게 된다면 꽃의 교단에 힘을 실어 줄 수 없게 된다.

“저, 저는…….”

“그가 가야 한다.”

“네?”

“초모, 그자가 가야 한다. 균열을 닫은 적이 있다고 했지?”

“그, 그렇긴 한데…….”

“그가 이번 안건을 해결한다면 나는 그를 인정하겠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번갯불이 튀듯 서로의 생각을 읽기 위해 추기경들의 눈이 빛났다.

‘어떡하지?’

위험한 임무라면 초모가 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고 거절하기에는 다른 적당한 구실이 없었다.

성국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정당하게 추기경으로 인정받는 그림.

신민들도 받아들이기 아주 예쁜 그림이었다.

‘어쩔 수 없어.’

하필 이때, 이런 사건이 발생해 초모가 휘말리게 될 줄이야.

빛과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 바위, 물도 그 모습을 보고 수긍했다.

“그런데, 그가 실패하면 어쩌지? 결국에 협회의 요청에 검증되지 않은 자를 보냈으니 책임은 우리 몫이잖나?”

“그때에는 꽃의 교단에게도 잘못을 물어야겠지만, 안전 조치는 취해야겠지.”

바람이 손가락으로 빛과 그림자를 가리켰다.

“응? 왜요?”

바람의 손가락이 그 자신에게 향했다.

“셋 중 하나.”

“네?”

“따라간다.”

“무슨…….”

불과 바위, 그리고 물이 웃었다.

“푸하하하하하!”

“좋지, 좋아! 그편이 확실하지!”

“웃지 마세요! 당신들의 신성력이 부족하니까 우리 중에서 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하필 신성력이 부족했군. 미안, 미안.”

빛과 그림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일단은 초모가 무사히 성국에 오는 것만 간절히 바랐다.

***

회의를 마치자 밤이 되었다.

그림자의 추기경은 빛의 추기경에게도 말하지 않고 걸음을 바삐 옮겼다.

달빛도 제대로 스미지 않는 바스카리, 그림자의 권역.

로브를 쓴 그녀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건강한 신민들의 모습을 보며 그림자는 평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쉬워했다.

이들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생활이 그리 오래 남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으슥한 골목을 몇 차례 통과했다.

그 과정에서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았고 발걸음을 멈춘 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곳에 몇 번이고 와 본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연초(煙草)가 타올랐다.

그 불빛에 그림자가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흘흘흘, 여전히 바삐 다니는구나.”

“할머니들! 놀랐잖아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늙은 여인 3인방.

그림자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늙은 여인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기괴했다.

1명은 눈을 꿰맸고 1명은 코를, 다른 1명은 귀를 꿰맸다.

눈을 꿰맨 노인이 말했다.

“무엇 때문이냐?”

“할머니들께 여쭤볼 게 있어서 왔지요.”

“네 언니 년은?”

“언니 몰래 왔어요.”

“호호호, 그년은 우리를 싫어해도 너무 싫어하지.”

“미래를 아는 것을 두려워하니까요.”

“우리가 말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다. 단지 추정이지.”

“들어맞는 추정이잖아요.”

“입에 발린 말은 잘도 하는구나. 선물은?”

“여기요.”

“간식이구나, 저 할멈이 참으로 좋아하겠어.”

귀를 꿰맨 여인이 말했다.

“아이야, 무엇이 궁금하지?”

“초모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가 이곳으로 무사히 올까요?”

“그건 답해 줄 수 있다. 무사히 당도할 것이다.”

“다행이다…….”

“그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야.”

“정말요?”

“라고 바라고 있지?”

“아, 할머니!”

“흘흘흘…… 고얀 년, 자주 좀 찾아와. 할머니들 심심하단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제회 일이 너무 바빠서…….”

“그 뻘건 놈 퍼런 놈 탁한 놈 때문이겠지.”

불과 물, 바위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림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았어요! 신통하시네요!”

“네가 저번에 얘기했다.”

“아, 뭐야.”

“호호, 아이야. 불안한 것은 알지만, 그가 이곳에 오는 날 너는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그림자가 흑발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정말 그럴까요? 저번에 봤을 때 막대한 신성력을 느끼긴 했지만…….”

“아무렴. 그리고 그것이 그의 전부가 아니다. 그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거라.”

“예, 할머니들.”

***

최별과 성진, 그리고 송하린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아…… 별 누나 왜 같이 안 가는데. ㅠㅠ

-기껏 키워 줬더니 이게 무슨 배반이더냐!

그들은 얼마 전, 프라이빗 모드로 대화를 나눴다.

-현실의 몸에 영향을 미쳤다라…….

-역시나…… 본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소.

-하린 양도요?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소?

-아버지에게는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조금만 더 알아보겠다고 했어요.

-그렇군.

당시의 최별은 이렇게 물었다.

-만약에…… 우리가 여기서 죽었을 때는…….

-이 무슨 망측한 소리를! 이상한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은 묵묵히 전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대화의 결론으로는, 최별은 서부에 남아서 세력을 공고히 하겠다고 했고 다른 일행도 그것에 동의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이른 시일 내에 합류할게요.”

“본녀는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뭐가요?”

“란슬롯이 수상하오. 역적의 상이올시다.”

“괜히 이간질하는 거 모를 줄 알아요? 둘이서 박투술로 붙었었죠? 졌죠? 진 거죠?”

“비겼어! 비겼다고!”

-아, 아무튼 비겼어. ㅋㅋ

-이렇게 된 이상 군주 조지기에 들어간다!

-베디비어도 채찍질 당하는 거 보니까 맘이 쓰이더라.

-12기사 말 잘 듣는 거부터 참 신기해. ㅋㅋ

-펀딩 다 완료됐다고 했지?

-노다지 터져서 초과금액 어마어마하다던데;

-감춰 봐야 솔직히 쓸 데도 없어.

-데자뷰가 얼마 전에 스칸다 새로이 출시할 계획 없다고 밝혔잖아. 그게 결정타인 듯.

-근데 왜 스칸다랑 연결시켜? 미치지 않고서야; 운영 이상하게 하네?

-듣기로는 새로운 물리 엔진 실험한다고 테스트 돌리는 거라는 얘기도 있었어.

-그걸 왜 한국 섭, 올빼미 있는 곳에서 하냐고. ㅋㅋ

-니들 아직도 올빼미 데자뷰 직원 설 안 믿는 거냐? 진짜래도?

-뇌피셜 좀 섞지 마. 제발, 부탁해.

-부탁이면 ㅇㅈ. 안 섞을겡.

최별이 성진의 옷매무새를 만졌다.

“이렇게 입으니까 태가 나네요.”

“바스카리까지 가다 보면 더러워질 겁니다.”

“그러니까 마차 안에 앉아 계세요.”

“바스카리에 도달할 때쯤부터는 모두 마차에서 내려야 하니 그전까진 타고 가야죠. 기껏 모은 마차들인데.”

모인 펀딩 금액이 어마어마해서 이방인 능력자들 모두가 마차에 타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제 바스카리 사제회의 모든 교단 중, 꽃의 교단이 가장 부유할지도 몰랐다.

-ㅁㅇㅁㅇ 왜 옷 만지는 거야?

-부인이 넥타이 만져 주는 것 같잖아.

-네, 이상입니다. 망상 즐거우셨나요?

-네! 재밌었어요!

-너무 비즈니스였다. ㅋㅋ 둘 다 표정 미동도 없어.

최별이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곧.”

“곧.”

“잘 있게. 곧 보자고.”

이방인들과 함께 돌아가기 위해선 모두 힘을 합쳐야 했다.

그러니 다시 만날 것이다.

그렇게 순례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마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수백 명이 함께 이동하는 것은 장관이었다.

송하린이 말했다.

“마차에 폭탄을 가득 싣고 달리는 것 같습니다, 형님.”

마차에 탄 이방인들은 아이와 노인을 제외하고 전부 능력자들이었다.

그러니 송하린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다 모여 있으니 든든하긴 하네요.”

“앞으로도 계속 합류할 거니까 더 많아지겠죠.”

“얼마나 걸릴까요?”

“중간에 동부 상인회와 행렬을 합치기로 했으니, 아마 3일 정도 걸릴 겁니다.”

성진의 복장은 새하얀 전례복과 흡사했다.

꽃의 교단의 전례복을 성진의 몸에 맞추어 입히자 그럴싸하게 보였다.

이제 삿갓도, 무복도 입지 않고 있는 성진은 뒤따라오는 마차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일지도, 그저 아무것도 아닌 데이터 쪼가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부담은 덜어졌지만 동시에 슬펐다.

하지만, 이 게임은 모든 것을 확신하기 어렵게 했다.

이들이 데이터 쪼가리가 아닌, 진짜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3일이 지났다.

빛이 바스카리를 앞둔 3시간 거리까지 마중 나왔다.

그녀는 성진의 달라진 모습에 놀라움을 표하며 말했다.

“바스카리에 입성하는 날이에요. 준비는 되셨나요?”

“준비가 필요한가요?”

“뭐…… 괜찮겠죠. 그보다 대체 행렬이 어디까지…….”

“상인회에서 보낸 식량과 물품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뒤따르는 분들이 전부 꽃의 교단의 신도들인 거죠?”

“맞습니다.”

빛은 당황했다.

꽃의 교단은 교세가 형편없을 정도로 빈약했고, 금전적인 사정도 좋지 않아 경쟁자로 여기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눈으로 확인한 광경은 전혀 아니었다.

“가, 갈까요?”

“마차에서 모두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세요! 이제부터는 걸어서 가겠습니다!”

“마차를 뒤로 물려라! 신도들이 앞에서 걷도록 해라!”

-내 마음…… 두큰 두큰. 바스카리 가 보고 싶었는데.

-바스카리 유명했지. ㅋㅋㅋ

-신혼 여행지로는 바스카리만한 곳이 없었지.

-엥? 예쁨?

-보면 앎. 순백의 도시라.

성진이 맨 앞에, 그 살짝 뒤에 송하린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꽃의 사제들이, 그 뒤로 신도들이 이어졌다.

빛의 추기경은 생각보다도 더 많은 규모에, 그리고 그들이 품고 있는 힘에 놀랐다.

그녀는 조용히 성진에게 물었다.

“설마…… 이들이 모두 능력자는 아니겠죠?”

“아닙니다.”

“그, 그렇죠?”

“노인과 아이들은 평범합니다.”

“……네?”

“다른 이들은 능력자가 맞습니다.”

“그럼…… 구, 군대잖아요?”

“신도들입니다.”

명백한 계산 착오다.

분명히 그때 신도들을 마주쳤을 땐 아무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다.

물론 아군이 힘을 가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과할 경우, 통제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다.

하물며 그것이 괄시받아 온 이방인들이라면.

빛의 추기경의 목 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성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하, 하하. 네…… 괜찮아요.”

울창한 숲과 드넓은 평야를 지나자 바스카리가 코앞이었다.

빛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조용히, 그리고 주의하면서 바스카리에 입성하실 거예요.”

“첫날부터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거군요.”

“그렇게 되나요?”

“이해했습니다.”

성진은 고개를 들어 바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순백의 건물들과 주변 환경이 꼭 북유럽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음? 그런데 구조가 조금 특이하군요.”

“아, 바스카리요?”

“네.”

“부유성이었으니까요.”

“네?”

-엥, 몰랐어?

-부유성 바스카리잖아?

-지금은 땅에 처박혀 있네. ㅋㅋ

-황금기 지나서 오니까 추락해 있구나. ㅉㅉ

-진짜 신성력이 쇠퇴하기는 했나 보네.

빛이 설명했다.

“신성국가 바스카리.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도시의 전반적인 것들이 신성력을 통해 이루어져요.”

“가령?”

“분수나, 조명. 뭐 그런 것들이요.”

“신기하네요.”

“난쟁이들이 건축을 도왔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모르겠네요.”

“부유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쩌다 땅에 주저앉은 겁니까?”

“신성력의 후퇴죠. 저희 대에서 벌어진 일이라 부끄러울 뿐이에요.”

“그렇군요.”

“가시죠.”

성진 일행이 바스카리의 입구를 찾았다.

처음 보는 인간형 기계가 말을 걸었다.

-바스카리에 처음 방문하시는 겁니까?

“이게 뭐죠?”

“아, 센티널이에요. 낡았죠?”

-빛, 불쾌한 언사입니다. 수정하십시오.

“미안, 미안.”

빛이 센티널을 툭툭 두들겼다.

마치 친구처럼 어울리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것도?”

“네, 난쟁이들의 작품이죠. 지금은 기본적인 기능만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예요. 원래는 훨씬 대단한 존재들이라고요.”

“그렇군요.”

빛의 추기경이 센티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이 바스카리에 위협이 되지 않음을 인지했습니다. 앞으로는 별다른 확인 없이 드나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바스카리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기이잉.

성문이 크게 열렸다.

심호흡을 한 성진이 빛에게 말했다.

“잠시만요.”

***

“어디 그 낯짝이나 보자고.”

“엘론드의 성자? 스칸다의 기적? 웃기지도 않는군.”

“신민들 통제 안 하나?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죄, 죄송합니다.”

“보는 건 상관없어! 함부로 행렬에 합류하면 엄히 벌한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꽃의 교단이 순례를 마치고 마침내 바스카리에 도착하는 날이다.

그 소식에 신민들은 너도나도 나와 건물과 길거리에 바짝 붙어 구경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그림자에게 들려왔다.

“신성력이 괴물 같다는데…….”

“우리야 바깥으로 나돌지를 않으니 소식만 들었지. 아마 과장된 면이 있을 거야.”

“그렇겠지? 괜히 기대하면 실망할 거야.”

삐이이이.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 못 들었어?”

“그, 그리핀! 그리핀이다!”

“위험해!”

“도망쳐!”

바스카리의 하늘에서 그리핀이 나타났다.

지금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제회가 당황하여 병력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던 찰나, 누군가 소리쳤다.

“행렬! 행렬이 위험해!”

그림자가 재빨리 테라스로 뛰쳐나갔다.

그리핀이 행렬로 돌진했다.

“아, 안…….”

그때, 돌진하던 그리핀이 초모의 옆에 멈췄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행렬의 속도와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저, 저게 무슨…….”

꽃의 사제들이 걸음마다 꽃을 흩날렸다.

“꺄하하하하!”

“위험해!”

그리핀은 순백색이었는데 부리로 아이들을 잡아채 자신의 등에 태웠다.

“재밌어! 재밌어!”

“꺄하하하하!”

구우욱…… 구욱…….

도시에 이상 현상이 나타난 것은 그때부터였다.

데에에에에엥.

50년 동안 울린 적 없던 시계탑의 대종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뭐, 뭐야!”

“대종이 갑자기 왜…….”

촤아악.

“꺄하하하하하!”

공원의 분수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탁, 탁, 탁.

행렬이 지나는 곳의 등불이 차례대로 켜졌다.

아아아…….

도시 곳곳의 음향 장치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맙소사…….”

초모의 몸에서 생전 처음 보는 광채가 퍼져 나왔다.

그의 눈에선 새하얀 빛이 뿜어 나왔고.

그림자의 추기경은 초모를 맞이하기 위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헉…… 허억…….”

-그가 이곳에 오는 날, 너는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도시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가 온 순간부터.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초모의 신성력에 감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환희에 찬 얼굴로 체통도 잊은 채 그에게 달려갔다.

불의 추기경이 소리쳤다.

“안 돼! 행렬을 통제해! 빨리!”

“무, 무리입니다. 이미 신민들이 소식을 듣고 전부…….”

창밖으로 신민들의 소리가 넘어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스칸다의 기적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물의 추기경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채팅 창이 떠들썩해졌다.

-나, 강림.

-우리가 왔다!

-정확히는 초모가 왔고, 우리는 저 신민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마!

초모가 신민들을 통제하는 센티널을 지나쳤다.

센티널의 축 처졌던 고개가 들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센티널이 고개를 들었다.

기잉.

기이잉.

“뭐, 뭐지? 센티널이…….”

“가까이 가지 마!”

초모의 몸에서부터 시작된 신성력의 폭풍은 바스카리를 휩쓸었다.

센티널들은 가만히 멈춰 서서 도시에 전했다.

-주의. 신성력 충족으로 바스카리 부유합니다.

-바스카리, 부유합니다. 흔들림이 있을지 모르니 위험한 행동을 삼가십시오.

-주의, 주의.

-고정된 물체를 붙잡길 권합니다.

그그긍.

도시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괴성을 질러 댔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환희가 담긴 괴성이었다.

마침내, 바스카리가 땅에서 벗어나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추기경이 초모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바스카리에.”

꽃의 추기경이 바스카리에 도착한 첫날, 부유성 바스카리는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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