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화
란슬롯을 향해 돌진하는 최별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뜨거워.’
최별은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블레이즈 오러를 몸에 둘렀을 때, 그녀는 항상 평온했다.
불꽃은 오히려 포근했고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힘은 통제 불가능이었고, 불꽃은 이리저리 날뛰며,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으아아아아! 뜨거워!”
최별이 거칠게 팔을 내뻗었다.
화르륵.
부웅.
란슬롯이 한 발짝 움직여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그런 일이 순식간에 몇 차례 반복되었다.
“폭주인가.”
그가 발을 걷어차 올렸다.
콰직!
최별이 양팔을 오므려 충격을 대비했지만, 그 노력이 우습게도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컥…….”
란슬롯은 방금 그녀를 걷어찬 발이 찌르르 울리는 것이 불쾌했다.
멀린의 웃던 모습도 눈에 밟혔고.
그래서인지, 처음엔 별 관심이 없던 최별을 아예 끝장내기로 마음먹었다.
“최별, 각오를 다 해라.”
콰아앙!
잔해에 처박혀 있던 최별이 튀어 나와 불타는 인간이 되어 란슬롯에게 달려들었다.
움직임이 기괴망측했다.
빠르고 단단했으며 무거웠다.
란슬롯이 그녀의 측면을 노리고 팔을 뻗었다.
퍼엉!
손맛은 있었지만, 최별은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빙글 회전한 그녀는 란슬롯에게 파고들었다.
‘오른팔.’
란슬롯이 기겁하며 자세를 바꿨다.
그의 오른발이 최별을 노리자, 최별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발이 허공을 때렸다.
후아아앙!
고작 발차기에 이만한 힘이 있을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상대는 전대의 괴물이었다.
그것도 늙지 않고 오히려 강해진 괴물.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날뛰는 기운을 통제하는 게 먼저였다.
사방을 들끓게 하던 열기가 조금 잦아들었다.
하지만 란슬롯은 오히려 더 경계했다.
“최별, 그대가 훌륭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아……. 하아…….”
“하지만, 그대는 모른다. 이 세계의 운명을, 이 세계를 짊어져야 하는 운명을.”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강제로 개방해야 할까요?
-멘탈 번이 올 수도 있어! 일단…….
최별은 호흡을 가다듬고 란슬롯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칸다에 성배는 없었다. 다 헛소문이었지.”
“…….”
“진실은 오로지…… 마왕의 강함뿐이었다.”
최별이 자세를 잡고 란슬롯을 중심으로 천천히 돌았다.
다시금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륵.
‘오른팔을 노려.’
-오른팔을 노려야 합니다.
초모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환청들과 뒤섞인 소리였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의 음성은 또렷이 들렸다.
최별은 계속해서 돌았다.
란슬롯은 어느새 호수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그런 호수.
“나는 그에게 무너졌고, 다른 이에게 구원받았다.”
“…….”
“모두 내가 약해서였다. 내가, 내가 더 강했더라면 어쩌면 더 나은 결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최별은 그의 음성에서 깊은 미련과 후회를 느꼈다.
그녀가 처음으로 물었다.
“란슬롯, 죽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었지. 하지만…… 살고 싶어졌다.”
“어째서?”
“희생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
“진부하네.”
“……뭐?”
“모든 일엔 이유가 있지, 하지만 그건 승자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이야.”
“……무슨 소리를.”
“당신이 하는 말은 패자의 핑계라는 거야.”
최별이 그를 도발하자 호수가 흔들렸다.
“그럴지도. 하지만 네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진 않군. 와라.”
“봐, 당신은 지고 난 이길 테니.”
호수가 휘몰아쳤다.
후웅!
후우웅!
그녀를 벽으로 내던졌던 그 충격이 대기를 진동시켰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그 충격을 곧잘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란슬롯의 주먹은 언제부턴가 최별의 몸에 닿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호수의 가장자리부터 짓쳐 들어갔다.
콰앙!
란슬롯의 팔꿈치가 최별을 내려찍어 저지했다.
양팔로 그의 팔꿈치를 지탱한 최별은 란슬롯의 허리를 걷어찼다.
콰아앙!
“큭…….”
그녀도 양팔에 힘을 집중했기 때문에 다리로 힘이 전달되지 않아 큰 타격은 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호수에 파문에 생겼다.
“……넌 대체 뭐지?”
화르륵.
최별의 투구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아무것도. 또는 무엇이든.”
그녀는 적절한 때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최별은 란슬롯의 전권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자신의 왼편으로 회전했다.
란슬롯이 황급히 자신의 팔꿈치를 당겼다.
최별은 란슬롯의 오른팔을 노리고 왼쪽 무릎을 차올렸다.
모든 건 미리 계획된 움직임이었다.
-오른팔이 이상합니다.
-왜요?
-그게…….
란슬롯의 눈에서 흉광이 흘러나왔다.
호수는 태풍을 맞이한 듯 격랑에 휩싸였다.
그의 왼팔이 최별의 사각에서 뻗어 왔다.
그 반응이 마치 예정되어 있던 사건처럼 정확했다.
그리고 조금 빨랐다.
아주 조금.
최별은 당황하기는커녕 그 반응에서 확신했다.
-트리스탄보다 케이가 월등히 강합니다.
-알아요,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어째선지 트리스탄과의 증명에서 오른팔의 허점이 더 컸습니다.
-……의도된 허점이다?
-네.
최별을 노리는 란슬롯의 왼팔은 그녀의 솟은 무릎을 잡아채려 했다.
-반응이 예상보다 빠르면, 의도되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발을 빼야 하나요?
-아뇨.
갑자기, 최별의 무릎이 란슬롯의 팔꿈치를 넘어 어깨까지 올라왔다.
당연히 따라온 뒷발은 공중에 떴고.
-더 깊게 파고드세요. 여기서 타격을 줘야 합니다.
란슬롯은 순간 당황했지만, 평정심을 되찾고 오른팔을 바깥 방향으로 휘둘렀다.
“큿…….”
최별은 몸을 말아 그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의 관자놀이를 발로 찼다.
“크아아아악!”
란슬롯의 팔에 힘이 빠졌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혀 란슬롯의 팔을 반대로 꺾으려 했다.
이게 먹혀들면 그대로 증명은 끝날 것이다.
하지만, 란슬롯은 강자 중의 강자였다.
비록 그의 노림수가 먹혀들지 않았지만, 충분히 회복 가능한 손해였다.
“으아아아!”
란슬롯이 오른팔을 안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괴력은 무시무시해서 최별도 더는 손을 쓰지 못하고 전권을 이탈했다.
탓.
“후우…… 후우…….”
“하아…… 하아아.”
최별이 만약 혼자였다면 란슬롯의 노림수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란슬롯이 오른팔을 몇 번 휘적거리더니 최별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알았지?”
“꽤 음흉한 함정을 파네요.”
“어떻게 알았…… 그렇군.”
란슬롯이 성진과 눈빛을 교환하고 최별을 보았다.
“좋은 친구들이군. 목숨도 구해 주고.”
“승리도 챙기게 해 주죠.”
“거기까진 아직이야.”
“‘아직.’이죠.”
호수의 기사가 최별을 향해 돌진했다.
잔잔했던 호수가 일어나 대지를 휩쓸었다.
후웅!
쾅!
콰앙!
“큿…….”
지이익.
최별은 공격을 막았음에도 뒤로 밀려날 정도의 충격을 받자 확신했다.
‘강해.’
정면으로 싸우면 밀릴 것이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한 후,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남들이 자신을 믿어 주는 만큼, 자신도 자신을 믿고 싶었다.
후우웅.
최별이 란슬롯의 주먹을 피하고, 그의 하단을 노렸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기에 란슬롯도 경시하지 못하고 몸을 띄웠다.
공중에 몸을 띄우면 몸의 균형은 깨지게 되고, 위험에 대비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란슬롯은 그 상태로 오러를 뿌렸다.
최별이 그것을 쳐 내는 동안 그는 안전하게 양발로 착지했다.
다시 달려드는 최별에게 란슬롯도 똑같이 갚아 주었다.
콰앙!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힌 순간, 란슬롯이 어깨를 최별에게 밀어 넣었다.
최별은 자세가 뒤로 젖혀졌고, 란슬롯의 노림수에 걸렸다.
바로 직전 상황과 입장이 뒤바뀌었다.
란슬롯이 하단을 거세게 후려 차자, 체격 차가 나는 최별은 공중에 몸을 띄웠다.
삐이.
-아가씨는! 아가씨는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요! 몸이 손상되긴 했지만, 진짜 위험한 건 뇌파예요! 여기서 우리가 손을 댔다간…….
-뭐라도 해! 개새끼들아! 회장님이 너희에게 그러라고 돈을 주잖아!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면 닥치세요! 나가! 나가라고!
-으아아아! 아가씨! 별이 아가씨! 죄송합니다! 제발…….
이명과 환청에 인상을 쓴 그녀는 상황을 깨달았다.
공중에 뜬 상태로 선택을 강요받았다.
-하단을 노려올 때는 두 가지만 생각하라니까? 진심인지, 허수인지.
이건 환청이 아니었다.
그녀가 원했던 대답이다.
-하단을 피한 후의 행동 수칙은 두 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뭐였더라.’
반복된 학습이 그녀의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했다.
그녀는 오히려 란슬롯에게 파고들었다.
전력으로.
화르륵.
“뭐…….”
콰아앙!
콰앙!
콰아앙!
란슬롯은 당황했다.
공중에 뜬 최별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자 란슬롯은 수비하기에 급급했다.
“이게 뭐…….”
콰아앙!
란슬롯의 고개가 최별의 주먹을 맞고 휙 돌아갔다.
“큭…….”
그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수비를 내려놓고 육탄전을 펼쳤다.
콰직!
콰앙!
쾅!
호수는 불꽃을 꺼트리려 애썼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땅을 디딘 최별은 란슬롯의 공세를 어렵게 막고 있었다.
-본녀가 박투술의 정수를 알려 주지.
-네?
-싸움은 기세요. 일단 신나게 갈긴 후에 외치시오.
-……뭐라고요?
“으아아아아아!”
콰직!
쾅!
쾅!
“크으으윽.”
최별의 주먹이 란슬롯의 흉갑을 때렸다.
“컥…….”
란슬롯의 흉갑에 움푹 팬 자국이 생겨났다.
그는 뒤로 쭉 밀려났다.
투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입에서 피를 쏟고 있는 것 같았다.
-아뵤!
“아, 아뵤!”
최별은 어쩐지 웃음이 났지만, 실제로 송하린의 말대로 우세를 점하게 된 것은 맞으니 입을 꾹 다물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란슬롯의 뇌리엔 지금,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마왕을 처치한 용사의 말이.
-란슬롯, 내가 본 미래에서 당신은 태양을 만날 것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그건 당신의 선택이지요.
용사의 쓸쓸했던 뒷모습을 그의 마지막 말이 장식했다.
-모든 것은 각자의 선택입니다.
“크아아아아!”
호수가 분노했다.
란슬롯은 지금껏 태양을 멀린이라 생각했다.
그의 정체를 안 순간, 확신했고.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그가 마주한 것이 태양이었으니.
란슬롯이 최별의 눈에 호수로 보이듯, 란슬롯의 눈에도 최별이 태양으로 보였다.
란슬롯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한 방, 한 방이 상대를 살해할 위력을 품은 일격이었다.
그만큼 그의 체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헉…… 허억…….”
하지만 그건 최별도 마찬가지였다.
“으…… 으아아!”
최후의 증명 막바지.
콰아앙!
최별의 주먹이 란슬롯의 투구를 날려 버렸다.
콰직!
“크아!”
최별의 투구도 날아가 어딘가에 떨어졌다.
신기한 건, 그녀의 빠졌던 앞니가 어느새 자라 있었다.
콰직!
란슬롯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고.
콰직!
최별의 얼굴에도 주먹이 꽂혔다.
쾅!
콰직!
콰아앙!
콰지익!
공방을 주고받는 데 필요한 건 압도적인 근력, 가공할 체력도 아니었다.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정신력이었다.
“으아아아!”
“끄으아아아!”
쾅!
콰직!
쾅.
쿵.
쿵.
“그만…….”
선 채로 실신한 란슬롯의 흉갑에 최별의 주먹이 계속해서 부딪혔다.
처음과 같은 힘은 실려 있지 않았고, 의식 없는 공격이었다.
“그만하십시오, 최별.”
최후의 증명에서 호수는 쓰러졌다.
태양의 열기가 결국, 깊은 호수의 밑바닥까지 확인했다.
멀린이 최별의 텅 빈 눈을 보고 선언했다.
“최별 승리. 최별은 13명의 기사 중 최강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그녀에게 가장 높은 이름을 내립니다.”
그 선언은 천둥이라 할 만큼 웅장했다.
“현 시간부로 그녀는 아서입니다. 그녀는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마,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염원은? 그럼 염원은 어떻게 되는 거야?”
최별은 헐떡거리다 결국 쓰러졌다.
쿵.
성진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
쫓기는 꿈.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계속해서 꾸었다.
지혜의 샘에 다녀온 이후부터였을까?
커다란 늑대가 자신을 베어 물기 위해 뒤쫓아 왔다.
자신은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아니, 마차를 몰고 있었다.
손에 쥔 고삐가 그것을 확신하게 했다.
크르르…….
뒤를 돌아볼 수도 없을 만큼 긴박했다.
반복되는 꿈에 고통마저 느낄 무렵, 어느 날부터 늑대가 자신을 쫓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마차를 천천히 모는 자신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줘.”
“뭐? 뭐라고?”
“……줘.”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허억, 헉…… 헉…….”
“일어났소?”
-내가 이래서 풀 다이브 말리는 거야; 진짜 정신 나간다니까?
-아까 개쫄았어 진짜; 기껏 커스터마이징한 머리 왜 자르고 난리임;
-최별 실물 못 봤냐? 커스터마이징 일절 안 했을걸?
-엥? 그럼 지금은 왜 단발이야?
-머리칼 자르는데 안 잘리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알잖아, 데자뷰는 이상한 데서 현실적이라고.
-단발도 예쁘다. 너 예뻐.(그럼 못 써 겐스케군!).
최별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였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죠?”
“이겼소.”
“네?”
“최별 양이 이겼다고.”
“그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난들 아나? 우리 형님이 설명해 줄 터이니 조금만 참으시오.”
지금 송하린이 옆에 있다는 게 최별에겐 큰 위안이었다.
티격태격했지만, 그녀가 곁에 있으면 최소한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끼익.
“일어났습니까?”
“초모! 설명 좀 해 줘요!”
“알겠습니다.”
싸움이 일어난 지 꼬박 하루.
어느새 정오의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촤륵.
커튼을 친 성진이 얘기를 시작했다.
“최별 양이 이겼습니다.”
“그, 그런가요?”
“그리고 지금 프라이빗 모드라는 건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네? 왜요?”
“현실의 최별 양이 위험했다고 합니다.”
성진과 송하린의 개인 커뮤니티에 상황과 사진을 첨부한 메시지가 도착했었다.
성진과 송하린은 그것을 둘만 확인하고 시청자들에게 감추었다.
“그럴 수가…… 있나?”
“글쎄요, 풀다이브의 반작용일 수도 있고…… 자세한 건 지나 봐야 알겠죠.”
“당장 로그아웃해야 할까요?”
“소식을 전해 오기로는 몸은 회복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셋은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데자뷰의 짓이군요.”
“정확히는 데자뷰가 만든 이 게임과 캡슐이 이상한 거겠죠.”
“아니면 정말 단순히 몸이 이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최별 양의 아버지께서 최별 씨의 곁에 계시다 상태가 회복되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비우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오셨었다고요?”
“네, 그리고 당부하셨습니다.”
“무엇을요?”
“할 일을 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아무래도 최별 양의 아버지는 방송을 챙겨 보시는 모양이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 지금껏 그녀의 방송을 챙겨 보신 것일까.
그녀는 당황스러움보다 서운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왜 당장에 보고 싶다고 하시지 않는 거지?”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오늘, 단검식(斷劍式)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단검식…….”
원탁에 내려오는 규율이었다.
최후의 기사가 탄생하면, 다른 기사들의 검을 부러트리는 의식.
“오늘이라고요?”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 깨어날 줄 알고요?”
“어제도 기다렸다가 안 깨어나서 다들 돌아갔습니다.”
“이, 이럴 게 아니지. 준비를…….”
“그대로 가시면 됩니다.”
끼이익.
성진과 송하린이 그녀를 안내했다.
이마에 용각인이 새겨진 이방인 둘이 누군가를 안내하는 모습은 다소 생소했다.
사실상 카멜롯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인 대회의장에 들어서자, 수많은 눈이 그들에게 향했다.
경의와 존경, 증오와 질투가 담겨 있는 눈길들.
최별은 조금 위축될 뻔했지만, 그녀의 옆에 선 둘을 보고 당당하게 걸었다.
원탁에 다가가자 멀린이 말했다.
“아서.”
“내가 아서군요.”
멀린은 마치 임종을 앞둔 노인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최별은 표정이 풍부해진 그가 낯설었다.
“저는 늘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아서, 그대의 염원은 오늘 이 시간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
“원탁은 해체입니다.”
귀족들이 아우성쳤다.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소립니까!”
“원탁이, 원탁이 끝난다니?”
“그럼 카멜롯은?”
쒜에에에엑!
파시벌의 창이 장내를 시끄럽게 만든 귀족들에게 날아갔다.
“끄아아아악!”
어느 귀족의 한쪽 발이 창에 꿰뚫렸다.
파시벌이 으르렁거렸다.
“원탁 앞에서 입을 열지 마라. 다음은 목이다.”
디고어도 한마디 거들었다.
“경박한 녀석들. 한마디만 더하면 전부 목을 베 줄게.”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지자, 멀린이 말했다.
“자, 여러분들은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케이가 대꾸했다.
“그럴 리가, 원탁에 속할 때 모두 맹세했지 않습니까.”
“…….”
“최후의 기사가 탄생하면, 모두 그를 섬기겠노라고.”
“맹세를 지킬 생각입니까?”
“그녀는 자격이 있지. 모든 기사를 꺾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으니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멀린이 주변을 쓸어 보았다.
아무도.
그 아무도, 맹세를 거부하지 않았다.
어쩌면 멀린이 최별에게 열 두 기사를 전부 상대하게 한 것은 이를 위한 포석일지도 모른다고 케이는 생각했다.
멀린이 미소 지었다.
“아서, 이제 당신이 원탁이자 카멜롯입니다.”
“뭘 해야 하나요? 앞으로 제 곁에서 조언해 주셔야죠.”
멀린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 조언이 필요치 않습니다. 훌륭한 동료들을 두었는걸요.”
“하지만…….”
“그래도, 곁에서 도울 수는 있겠군요.”
“네, 그래 주셔야죠.”
“비록, 이 모습은 아니겠지만.”
“네?”
멀린이 말했다.
“태양이 떠오르리라.”
후우웅.
“이, 이게 무슨.”
원탁에 이상한 빛이 그려졌다.
태양의 문양.
“태양이 떠오르리라.”
최별의 손이 멋대로 올라가 멀린의 목 줄기를 움켜쥐었다.
“멀린! 소, 손이!”
“아서,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때를 고대해 왔습니다.”
“멀린!”
“당신만이 진정한 왕. 태양왕이여, 영원히 타오르리라…….”
멀린의 몸이 마치 두부처럼 으깨지더니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으아아아!”
그 물은 원탁의 틈으로 스며들어 태양의 빛이 더 강해지도록 만들었다.
철컥.
철컥.
기괴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토록 단단하던 원탁의 모습이 변해 갔다.
끼긱.
후우우우웅.
찬란한 빛이 뿜어 나오더니 거검이 원탁에서 솟아올랐다.
최별은 원탁에 올라 그 검을 손에 쥐었다.
란슬롯이 말했다.
“성검, 엑스칼리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최별이 뒤돌아 내려오자 원탁이 12조각으로 쪼개졌다.
콰직.
콰지직.
원탁의 기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보고 있었다.
최별의 눈에서 태양과 같은 주홍빛의 정광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둘러싸고 12명의 기사가 무릎을 꿇은 채 검을 내밀었다.
후우웁.
까아아아앙!
단 한번, 엑스칼리버를 휘두르자 열두 자루의 검이 부러졌다.
기사들은 동시에 외쳤다.
“부러졌습니다!”
“부러졌습니다!”
검은 기사에게 신념의 상징이자, 명예 그 자체였다.
부러진 검은 더는 기사를 상징할 수 없다.
란슬롯이 나직이 말했으나, 내전의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신념과 명예는 부러졌습니다. 이제 우리를 얽매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최별이 뭐에 홀린 듯 열두 조각으로 나뉜 원탁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특이한 광석이었다.
“열두 자루의 검을 새로이 벼리겠다.”
“우리는 그 검을 받겠습니다.”
“우리는 그 검을 받겠습니다.”
란슬롯이 모두를 대표해 선언했다.
“아서, 이제 당신의 신념의 저희의 신념이며 당신의 명예 또한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너희를 성배라 칭하겠다.”
태양의 기사단, 성배.
태양왕의 자리에 오른 최별이 첫 번째 명을 내렸다.
“명하겠다.”
“예!”
대회의장의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해 가만히 멈춰 선 귀족들과 서둘러 내전을 빠져나가는 귀족들로 나뉘었다.
최별이 선언했다.
“앞으로 영원히 이방인 노예를 금한다.”
“이는 태양의 뜻입니다.”
성진과 송하린이 웃었다.
***
스칸다이자 종말 이후의 세계를 빠져 나온 최별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푸슈우.
“하아…… 하아아…….”
“일어났니, 별아.”
“……아버지.”
최별의 캡슐 앞에는 잠을 못자 피곤해 보이는 최재욱이 있었다.
그는 최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힘들었지?”
“아, 아니에요.”
그녀는 말을 하며 앞니가 제대로 붙어 있는 걸 확인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의사와 동석하고 아버지와 즐겁게 대화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나자 조금 쓸쓸하게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거울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이럴 수가…….”
거울에 비친 그녀는 단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