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86화
[제목: 휴머노이드는 결국 인간을 지배할 거다]
그렇다. 나는 오늘 스마트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독신으로 산 지 어언 37년. 사실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런 나의 갈증을 해소해준 유일한 존재 6개월 할부로 산 스마트 냉장고···
어차피 로봇이 인간을 지배할 거라면··· 그녀와 나···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사랑이 시작되는 걸까?
- 와, 형님. 깨어있으신 분이네요! 제가 사회 보겠습니다! 신부 안고 앉았다 일어났다 10회!
- 축의금 두둑이 넣을게요! 몇 인분을 넣을지 고민되니 그냥 인분을 넣겠습니다!
- 휴머노이드 : 인간은 역시 해로운 존재다. 제거하라.
- 기껏 휴머노이드랑 인간이 화해했는데 이 자식이 다 말아먹는다!
[제목: 아 진짜제발제발제발제발]
등불 또 떨어졌어 ㅅㅂ
대기업 블라인드 면접도 단번에 붙었는데 등불은 맨날 떨어져! 조까튼 데자뷰 색히들아! 나 좀 등불에 넣어줘[email protected]!!
- ㅋㅋㅋ 등불 경쟁률이 얼마나 되는데? 스칸다 할 때보다 인원도 불었고 특히 한국섭 지금 인기 미쳤음;
- ㅇㅇ 유일하게 한국에서 플레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등불이니까 ㅋ
- 포기하세요. 님 포기하면 다음에 저 될 확률 올라가니깐
[제목: 등불 이번에 문제 뭐였냐? 나 야근 때문에 못 갔다]
아, 퇴사 마렵다.
겜도 못하게 하는 그지 같은 회사 아오~
- 소포겐!
- ㅋㅋㅋ 님 야근시키고 부장님 접속했을 듯
- 부장(대머리, 48남): 네이스~ 김대리 한 명 컷!
- 문제 그 종말 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였나?
- ㅇㅇ 그거였음, 나도 떨어짐.
- 나는 사과나무 심겠다고 했다가 떨어짐. 시발 스피노자! 당신은 틀렸어!
- 사과나무 사람이냨ㅋㅋㅋ 근데 난 종말 막겠다고 해도 떨어졌는데 다른 사람은 붙었던데?
- 그거 사람마다 다른 듯. 약간 진심으로 대답한 사람이 붙는 거 아닐까?
- ㅈㄹ 데자뷰가 그걸 어케 암? 차라리 니네 집 변기 푸세식이라는 거 아는 게 말 된다
- 흠칫!
- 마··· 맞췄어?
[제목: 야, 그 얘기 돌잖아. 니들 들었냐?]
올빼미가 사실 데자뷰 쪽 베타 테스터라는 얘기.
근데 좀 말 되는 듯. 플레이 하는 거 봐봐. 무슨 공략본 보고 하는 것처럼 필요한 행동 착착!
족보 없으면 절대 못하죠?
- 족보 같은 소리하네 뚱보가. 지금 올빼미 형 의심하는 거냐?
- 이 글은 진짜 1도 모르고 하는 소리임. 님이 저기서 휴머노이드랑 사람 화해시키면 개꿀ㅋ 이거 알아도 깰 수 있음?ㅋㅋ
- 테스터는 아닌 것 같고 피지컬이 역대 가상 현실 랭커들 주르륵 줄 세워도 선두 아닐까?
- 스칸다 얘기면 그렇긴 한데, 스칸다도 유저 무쌍은 아니었긴 했어. NPC가 유저 찜 쪄 먹었으니까 ㅋㅋ
[제목: 물타기 오진다. 진짜 중요한 얘기는 왜 안함?]
송하린이랑 최별 탈주한 거 왜 얘기 안하냐? 돈 먹었네
- 먼 헛소리여 너는, 자다 일어났냐? 글고 왜 화부터 내냐 ㅋㅋ
- 그대는 벌스를 채우기 위해 화나있지
- 디토식 질문법 언제 바뀌었냐?
- 아니 등불 SNS 못 봄? 어차피 최별이랑 송하린 선발대로 거의 확정이나 마찬가지였잖아. 알고 말해 ㅡㅡ
- 알고 말할 거면 왜 여기서 말하누?
- 진짜 중요한 얘기는 우리내 인생 얘기 아닐까?
- 이번에 그거 왕선생님 방송에서 해명한다던데
- 해명은 ㅋㅋ 그냥 짧게 입장만 말하고 간다드만
****
왕이나의 방송이 시작됐다.
랭커 초대석은 최근 등불의 수뇌부가 바빠졌기에 섭외 문제로 무산됐다.
‘같이 돕고 좀 살지!’
일단 자신이 남을 도울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지만, 타인은 더불어 살아가는 게 세상 아니겠는가.
꿩 대신 닭.
수뇌부 대신 단원이다.
마침 적당한 목표물을 발견했다.
‘근데 이 사람 좀···.’
방송 욕심이 있는 등불단원.
평소에 단원 채널에서 눈 여겨 보던 멤버다.
“네, 오늘 한승철 단원님 나와주셨네요! 박수!”
“안녕하세요! 한승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등불로 활동하고 있는데, 한가해지면 개인 방송도 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형님들!”
- ㅉㅉㅉ 승철이 왔니? 신발 벗고 드루왕
- 이나 누나 쪽 빨아먹으려고 왔네 ㅋㅋㅋ
- 그승누?(그래서 승철이가 누군데?)
- 오늘 수뇌부 안 옴? 하··· 기대했는데 실망이야!
‘미래의슈퍼스타한승철!’님이 3,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찌질입니다. 모두 계란 던지세요]
- 철퍽!
- ㅋㅋㅋ 승철이 커엽자너
- 애는 착해
- 그건 맞찌 ㅋㅋ뤀쿸쿠
왕이나는 채팅창의 분위기가 혼잡해지기 전에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등불이 최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사실 저도 오늘 아프다고 하고 빠진 거라 형이랑 누나들한테 들키면 작살 나거든요?”
“아··· 예···.”
“질문이 뭐였죠?”
“하··· 하하··· 정신이 없으신 편이시네요.”
“그런 말 종종 듣습니다. 아, 기억났다. 등불 근황이었죠? 등불은 대구에 도착하고 나서 전보다 훨씬 바빠진 것 같아요.”
왕이나는 어차피 들을 대답이었지만, 조금 더 자극적인 멘트를 끌어내기 위해 상황을 조성했다.
“어? 전보다요? 왜죠?”
“일단, 당장은 지상 거주 구역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또, 몬스터 퇴치도 힘 닿는 대로 하고 있고요.”
“새로운 등불 합류로 또 규모가 불어났다죠?”
“그쵸, 매번 동료들이 합류하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일도 훨씬 수월해지고, 북적북적한 게 좋더라고요.”
“게임은 사람이 많아야 재밌죠. 한국 서버가 특이했던 거예요. 호호··· 그··· 추가적인 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
“계획이요? 그거 말씀하시는 거구나. 예. 등불 단독으로 타 지역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 헐; 새끼 오리들 독립?
- 그렇지~ 이제 덩치 좀 키웠잖아 ㅋㅋ
- 근데 왠지 안심이 안 된다. 올빼미랑은 느낌이 다르네···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등불도 강하니까 지켜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단독으로 종말 극복이라··· 가능할까요?”
“힘들겠죠. 그래도 저희도 플레이어로서 할 일을 하는 거니까요.”
“멋지네요. 그런데··· 최근 안 좋은 소식도 있었던 거로 아는데···.”
“딱히 안 좋은 소식은 아닌 걸로···.”
- 수뇌부 흔들린다는 썰 있던데!
- 절.대.해.명.해!
- 이 하이에나들 ㅋㅋ
한승철이 난처하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하린 누님이랑 별 누님 때문이시죠? 전선에서 이탈했다는 그 얘기요.”
- ㅔ 잘 아네
- 옳지 옳지! 그것!
“예, 맞아요. 시청자 여러분들이 올빼미 소식 외에도 궁금해 하는 게 그거예요.”
“분명 등불의 전선에서 이탈한 건 맞습니다. 그런데 이걸 이탈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요. 전선에서 이탈해 최전선으로 달려갔으니까.”
“기가 막힌 상황이네요··· 송하린 양은 스칸다 때부터 엉뚱한 걸로 유명했지만, 최별 양까지···.”
“하린 누님은 정확히는 엉뚱한 것에 더해 실력이 독보적이라 유명했던 거고 별 누님도 종말 와서 잠잠해진 거지 원래도 남 눈치 같은 거 잘 안 봤었습니다.”
“어? 그랬나요?”
‘이나는하나도몰라’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스칸다는 그래도 좀 지난 게임인데 플레이한 양반이 이걸 모르면 어쩌누ㅋㅋ]
- 근데 둘 다 거의 정점 언저리에서 놀아서 모를 수도 있음
- 특히 송하린 동대륙에서부터 성장해서 밀수들도 정확히는 왜 유명했는지 모를 걸?
- 헐 나 모름 왜 유명했음
- 그 밀수들에는 나도 포함이란다~ 나도 몰라~
- 와~ 속았네? 와~ 샌즈!
왕이나는 한승철이 말실수라도 해주길 바랬으나 그는 차분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그렇군요. 그럼 이민상의 이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원래 이민상이라는 인물은 우리가 통제하던 인물이 아니었어요.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뿐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수뇌부가 흔들린다는 내용은 근거 없는 헛소문입니다.”
“쳇······.”
“예?”
“아닙니다. 다음 질문할게요.”
- 왕이나 ㅋㅋㅋ 칙쇼! 닝겐이 잘 빠져나가는군!
- 이번엔 물러나지만, 다음엔 어림도 없다!
- 승철이 말 잘하누. 띨빵한 줄 알았는데
그녀는 애써 허술하다고 생각한 인물을 데려왔는데,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입술을 짓깨물었다.
“접촉, 가능할 거라 보시나요?”
“네. 충분히. 다음 도시에 진입하기 직전이나 도시에 진입할 때쯤 마주치지 않을까요? 물론, 문제 없이 도착해야 가능하겠지만요.”
“알겠습니다. 그럼···.”
“어? 저한테는 올빼미 님 관련 질문 안 하시나요?”
“전투 분석도 가능하세요?”
“···아뇨?”
- 역시 승철이! 시간이 지나자 원래대로 돌아왔군!
- 우리 승철이가 확실합니다!
****
푸른 하늘.
종말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배경이다.
성진이 처음 보는 장소다.
이렇게 거대한 나무를 본 적이 있다면 기억에 남았을 테니까.
‘나무?’
성진은 하늘의 색이 다채롭게 변해가는 걸 보았다.
정오의 푸른색에서 노을 지는 붉은색, 별들이 반짝이는 남색.
다시 새벽녘의 색.
이 모든 순간을 성진은 나무 위에 앉아 목격하고 있었다.
‘아름답다.’
달리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경이에 바치는 존경.
한 문장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성진은 이곳에 아주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새 소리?’
얼핏 듣기에 새나 오리의 소리처럼 들리는 동물의 울음 소리.
성진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들리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경이.
거대한 청설모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가지 위에 자리잡고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
청설모의 입이 달싹거렸다.
분명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무슨···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성진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목 울대를 움켜잡았다.
안간힘을 써서 다시 한 번 물으려 했다.
“무···.”
그 순간, 공간이 뒤바뀌었다.
나무는 사라졌고 자신은 어딘가로 떨어졌다.
“허억!”
“오빠, ···왜 그래?”
깨어난 곳은 병실이었다.
기억났다.
‘···아름이 기다리고 있었지.’
신아름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해서 잠시 기다린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는 실수인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왔어? 잠깐 무슨 꿈을 꿔서···.”
“꿈? 오빠 꿈 같은 거 안 꾸잖아? 이상한 일이네···.”
“그러게. 이상한 일이야.”
분명 청설모가 속삭인 말이 들렸다.
기억날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애써도 흐릿하기만 할 뿐.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님은?”
“푸흡··· 그게 있잖아, 오빠. 요즘 엄마가 오빠한테 자주 찾아가라고 막 등떠미는 거 있지?”
“나를? 왜?”
“흠흠··· 우리 엄마 똑같이 따라해볼게. 우리 엄마 어떻게 말하는 지 알지?”
“응, 알지.”
신아름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고 나이든 여성의 목소리와 말투를 흉내냈다.
“최서방이 우리 집안의 기둥인데, 그 홀아비 냄새나는 병실에서 얼마나 외롭겠어. 이럴 때일수록 아름이 네가 곁에서 힘이 돼줘야지!”
“···나 홀아비 냄새나?”
“아니이? 엄마가 병실에 안 온지가 꽤 됐잖아. 그래서 오빠 못 깨어났을 때 약 냄새 가지고 그러는 걸거야.”
“어쨌든 어머님답네. 똑같았어.”
“그치, 그치? 우리 엄마 속물이긴한데, 또 직선적이시라 나쁜 생각하면 우리한테 다 들켰었잖아. 오빠, 우리 엄마 미워해?”
“아니, 전혀.”
“어라? 진짜 안 미워하나 보네.”
그녀는 주말에도 일을 하다 온 모양이었다.
머리가 군데군데 엉겨붙은 것이 땀을 좀 흘린 것 같았다.
“오늘도 출근했다고 했지?”
“응, 그것 때문에 늦었어. 미안해.”
“미안할 게 어딨어. 나는 더 늦었는데.”
“허이구··· 알긴 아네? 많이 늦었지.”
성진은 그녀가 계속 일을 하는 게 불만스러웠다.
그녀 나름의 삶이 있다지만, 가끔 힘들어 하는 기색을 내비췄으므로. 그녀가 휴일 없는 삶을 살아간지도 꽤 오랜 시간이었다.
‘일을 쉬면 좋을 텐데···.’
이미 통장에 들어온 돈만 해도 당장의 생활에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일···.”
“스읍··· 관두라고 하려고 했지?”
“응. 힘든 거 아니야?”
“딱히? 오빠한테 가끔 투덜대서 그렇게 생각했구나.”
“아니었어?”
“지금이 좋아. 하루를 충만하게 채우고 와서 한 주의 마무리를 최성진과 함께! 좋은 리듬이야.”
그녀가 굵직한 남자의 음성을 흉내내며 억지로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성진은 갑자기 방금 꾼 꿈이 떠올랐다.
말도 못하게 거대한 나무 위에서 경이를 목격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 어떤 세계보다 소중했다.
“그래서··· 우리 낭군님께서는 언제 일어나셔서 소녀를 호강시켜주실 생각이십니까?”
“······.”
“···그것도 못 말해주는 거야?”
“실망할까 봐. 기대했는데 실망할까 봐···.”
“실망 안 해. 5년이나 기다렸는데 실망은···.”
몸이 계속 회복되고 있다.
다리의 감각이 거의 돌아왔다.
하지만 허리가 문제였다.
허리만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아마··· 곧.”
“그렇구나. 오빠 곧 일어나는구나···.”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억지로 쾌활하게 웃으며 물었다.
“질문하겠습니다!”
“하시지요.”
“최성진 씨는 몸이 완벽하게 회복된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으십니까?”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십시오! 민중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성심성의껏 대답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녀의 질문에는 거짓 없이 답했다.
“우선··· 샤워를 할 겁니다. 거칠게 자란 수염을 면도해야 해요.”
“왜죠?”
“중요한 날일 거예요. 아마도 제 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일 겁니다.”
“그렇군요. 그 다음은요?”
“옷장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을 겁니다. 중요한 자리에만 입고 나갔던 몇 번 입지도 못한 정장이 있어요.”
“아! 그 클래식 정장 말이군요?”
“네, 그거요.”
머릿속에 무엇을 할지 계속해서 떠올랐다.
“바람이 좋은 날이에요. 하늘도 맑고요. 좋은 느낌입니다.”
“어디를 가고 계시죠?”
“약속 장소에 갈 겁니다. 그 사람이 나와줄 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나와줄 것 같아요.”
“······.”
“꽃집에서 튤립으로 꽃다발을 만들 거예요.”
“튤립?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건가요?”
“아니요.”
“······.”
“제가 좋아해요.”
신아름은 성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먼 미래의 일이지만, 이제는 그 가능성을 입에 담아도 우습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 만나는 거예요. 별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소소한 얘기를 할 겁니다.”
“소소한···.”
“그 이후는 아직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네요.”
“회복된 후에 하고 싶은 일이 그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니···.”
“만나고 싶었어요, 줄곧.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사람을 만날 겁니다.”
“···그만.”
“꼭 그렇게 할 거예요.”
“······.”
“그러니,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신아름이 기어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성진에게 있어 모든 것의 이유다.
성진은 그녀를 보았다.
“···나빠.”
“미안.”
신아름이 성진을 꽉 끌어 안았다.
그녀가 나직이 읊조렸다.
“기다릴게요.”
****
<관찰 1일 째>
“네가 찾던 사람 맞아?”
주인혁이 누군가가 머무는 공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몸은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정지 화면처럼 보이는 모습이 더 이상했다.
“네. 맞네요.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
재성이 주인혁의 질문에 입술을 삐죽 내밀다 대답했다.
“처음에는 안티인 줄 알고 처리하려고 했는데, 공격성을 보이지 않더라고.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 같아서 데려와서 지켜봤지.”
“그리고요?”
“뭐, 허탕. 특이 케이스라 그런 거였어.”
“특이 케이스···.”
“연산 장치가 손상됐더라고, 근데 그게 외부 충격이 아니라 본인이 손상시킨 것 같아.”
“본인이요? 어떻게? 왜?”
“모르지. 뭐 잊고 싶던 기억이 있나? 아니면 안티로 변하는 게 바보가 되는 것보다 싫었나 보지. 아무튼 위험하진 않아. 그냥 좀··· 이상해서 그렇지. 연산 장치에 부하가 오면 자동으로 리셋되는 것 같아.”
주인혁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주영길을 쳐다보았다.
반대편에 있는 주영길은 이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관찰 3일 째>
어제는 찝찝한 기분이 들어 이곳에 오지 않았다.
상처의 딱지를 건드는 기분이다.
여전히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겁났다.
주인혁은 유리를 통해 주영길을 보았다.
<관찰 4일 째>
바뀐 건 없다.
유리에 조금 더 다가섰을 뿐.
주영길은 흔들의자에 앉아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개 같은 자식···.”
주인혁은 문 밖에서 욕을 내뱉었지만,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무언가가 문을 넘지 못하게 했다.
<관찰 8일 째>
며칠 동안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파고든 가시처럼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갑자기 아파왔다.
계속해서 신경쓰였다.
“미친놈, 여기 와서 뭘 어쩌려고.”
탁! 탁!
주인혁은 자신의 머리를 쳤다.
이렇게 스스로를 모르겠다는 느낌은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관찰 12일 째>
꾸준히 이곳에 왔다.
이제는 담담해졌다.
아마 자신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관찰 14일 째>
유리가 조금 더 투명했으면.
<관찰 15일 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상대는 살갑게 맞아주거나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다가갔다.
“주영길···.”
놀라거나 혹은 죄책감에 몸을 떨 줄 알았는데, 돌아온 반응은 예측 밖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주영길입니다. 저를 아시나요?”
“나를··· 몰라?”
“예. 기록된 바 없습니다. 실례지만 저에게 우리의 관계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재성이 주영길의 상태는 치매에 걸린 노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아무 사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실례를 했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사를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인사···.”
“저는 주영길입니다. 황수지와 주인혁의 가사 도우미 휴머노이드입니다. 저는 가족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하, 사랑?”
주인혁은 모든 피가 머리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곳에 더 있으면 분노에 쓰러질 것이다.
쾅-!
문을 세차게 닫고 나왔다.
<관찰 18일 째>
“저는 주영길입니다. 황수지와 주인혁의 가사 도우미 휴머노이드입니다. 저는 가족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나는 그냥 친구라고 부르세요.”
“친구··· 알겠습니다.”
주인혁은 말 없이 주영길의 곁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관찰 19일 째>
“어떻게 살았나요?”
“저의 삶을 궁금해 하시는 겁니까?”
“예. 당신은 어떻게 살았죠?”
주영길이 시력을 잃은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평일에는 가족의 생활을 챙겼습니다. 빨래를 하고 식사를 차리는 게 주된 업무였습니다. 넓지 않은 집이라 청소는 무척 쉬웠습니다.”
“힘들지 않았나요?”
“저에게 힘들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다만, 기호를 묻는 것이라면 ‘좋았다’입니다.”
“좋았다고요?”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주인혁이 떨기 시작했다.
<관찰 20일 째>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나요?”
“행복. 사전에 정의된 단어와 완벽하게 같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있습니다.”
“언제였죠?”
“인혁이···.”
주인혁이 몸을 덜덜 떨었다.
“인혁이가 학교를 마치고 왔을 때 간식을 차려줬습니다.”
“······무슨 간식을요?”
“부침개였는데 반죽이 질게 되어 맛이 좋지 못했을 겁니다.”
기억이 났다.
반죽이 질어 솔직히 맛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다 먹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말했습니다. 맛있었어요, 아빠라고.”
“······.”
“아빠라는 단어는 매우 훌륭합니다. 단 두 음절로 나는 행복해졌습니다.”
“그만···.”
“나는 인혁이의 아빠입니다.”
<관찰 30일 째>
“기억은 어쩌다 잃으신 건가요?”
“모릅니다. 아주 소중했던 기억들 빼고는 전부 잊었습니다.”
“인혁이란 아이의 모습은요?”
“친구. 당신만한 키였습니다. 어쩌면 조금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니까요.”
이상한 감정이었다.
주영길이 자신을 알아봐주었으면 했다.
“휴머노이드로 살아가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인간이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추상적으로라도요.”
“아쉽습니다. 감정을 완벽히 이해했다면 나는 더 나은 가족이 되었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기분입니다.”
“당신은··· 좋은 가족이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친구. 당신은 나를 기분 좋게 합니다.”
주영길이 중얼거렸다.
“나도··· 사람이고 싶다.”
<관찰 32일 째>
주인혁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미친 새끼···.”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비겁한 마음이지만, 주영길이 반성하고 자신에게 돌아와 가족을 이뤘으면 좋겠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도.
“친구, 무슨 일 있습니까?”
“그냥 좀···.”
“고민은 나눌 수 있습니다.”
주인혁이 말했다.
“누군가가 죽도록 밉습니다.”
“미워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그 누군가가 좋습니다. 저 등신 같죠?”
“사람은 모순적입니다. 나는 이 모순에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주영길이 처음으로 주인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인혁은 화들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 이것은 용서를 말하는 것이었군요. 맞습니까?”
“용서? ···네. 생각해보니까 그렇겠네요. 제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모릅니다. 서로가 소중했던 관계입니까?”
“아마도.”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신경쓰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친구가 자신을 용서하든 미워하든 받아들였을 겁니다. 소중한 관계니까요.”
“······.”
“행복해지세요.”
주인혁이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제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주인혁을 바라보던 주영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이 계속해서 붉어졌다.
재성이 말했던 부하가 일어나 연산 장치가 리셋되는 상황이다.
주인혁의 말에 어떤 순간을 떠올린 것인지 주영길이 힘들게 말했다.
“크··· 아··· 아··· 안돼. 도망쳐, 인혁아··· 인혁아··· 가···.”
주영길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는 주영길입니다. 황수지와 주인혁의 가사 도우미 휴머노이드입니다. 저는 가족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주인혁이 허물어져 주영길의 무릎에 기대 울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언가 문제가 있습니까?”
“아파요··· 너무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