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이렇게 해 줘 (83/94)


  • 83화. 이렇게 해 줘
    2023.08.22.


    “나는…… 난…….”

    펠릭스를 보며 말을 더듬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 제 손바닥을 보았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 제 눈으로 보고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펠릭스가 제게 무슨 짓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방금 같은 이상한 일은 벌어질 수 없는 거였다. 하지만 펠릭스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나한테 물어봐야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없어. 난 네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네 몸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일 뿐이지. 그래서 나도 혼란스러운 거고.”

    “말도 안 돼요. 당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내 몸이 이렇게 반응한다고요? 도대체 어떻게요? 방금 내게 무슨 짓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이벨리아가 조금은 과격한 어조로 항변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펠릭스는 절로 한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벨리아의 항변에도 단호한 태도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올수록 그는 더욱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방금 내가 네게 보낸 힘은 마법 같은 게 아니라 단순히 내 에너지의 일부를 너에게 주입했을 뿐이야. 그리고 넌 내가 주입한 힘을 최소 배 이상으로 불려서 내게 돌려준 거고.”

    “하,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믿기지 않는다고 해도 별수 없지. 그게 진실이고 사실이니까.”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입술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펠릭스의 표정이 너무도 고요했다. 저처럼 놀란 기색은 물론, 자주 보였던 장난기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정말 진실이고 사실이라는 듯이. 그는 얌전히 제 대답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상황의 해답을 제게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

    “…….”

    이벨리아는 서둘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곤 한참 전부터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머릿속에 집중했다.

    [지난번에 네게 물었지. 너의 어렸을 적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야. 넌 분명 그렇게 대답했어. 특별할 것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

    [네가 날 볼 수 있을 정도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면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순 없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신성력이 네 몸에 흘러 다녔을 거고 그로 인한 불가피한 일들이 분명히 생겼을 테니까. 게다가 넌…….]

    펠릭스를 볼 수 있는 조건이 신성력이고, 그걸 가졌다면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없었을 거라고…….

    이벨리아는 펠릭스의 말 중 핵심을 정리해 그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었다. 유난히 자주 앓았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하아.”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조차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두통이 일었다.

    이벨리아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미안한데, 나 좀 혼자 있게 해 줘요.”

    “이벨리아, 난 하루라도 빨리 너에 대해…….”

    “생각해 볼게요.”

    조급하게 이어진 펠릭스의 말을 이벨리아가 단호하게 딱 잘랐다. 본 적 없는 태도에 순간 당황한 펠릭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곧 고개를 든 이벨리아가 펠릭스를 날카롭게 직시했다.

    “지금껏 펠릭스가 날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대한 적 없잖아요. 안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러니까 고민해 볼게요. 그러니까 혼자 있게 해 줘요.”

    너무도 올곧고 똑 부러진 태도였다. 그에 펠릭스는 더 이상 무어라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옅게 한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창가로 향했다. 닫혀 있던 문을 활짝 연 그는 손바닥 위에 올려 둔 햄스터에 집중했다.

    어느덧 익숙해진 푸른빛이 강하게 발산되더니 곧 주변이 고요해졌다. 펠릭스도, 햄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밀려오는 피로에 온전히 잠식될 수 있었다.

    * * *

    늦은 밤, 칼리프는 태자비궁 정원을 말없이 서성거렸다. 펠릭스를 통해 이벨리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곤 고민할 것도 없이 찾은 곳인데, 막상 그녀를 만나러 가려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혼란스러워 보였어. 혼자 있고 싶다길래 우선은 그렇게 해 줬고.]

    […….]

    [하지만 나는 확신해. 이벨리아는 분명 변이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 능력을 오늘 또다시 확인하기도 했고.]

    펠릭스가 전해 준 말은 꽤 많았지만, 그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건 ‘혼자 있고 싶다.’라고 했다던 부분이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또 직접 듣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저 또한 처음 펠릭스의 말을 듣고 많이 놀라지 않았던가. 그런데 당사자인 그녀는 오죽할까 싶었다.

    “……이브.”

    칼리프는 닫혀 있는 이벨리아의 침실 창문을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녀의 침실로 가, 자는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저 때문에 편치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녀이지 않은가. 괜히 그녀의 눈에 띄었다간 이벨리아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만 할 것 같았다.

    입 안 가득 차오른 한숨을 푹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아쉬움에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발끝에 힘을 주었다.

    막 걸음에 속도가 붙던 찰나였다. 칼리프는 별안간 코끝을 맴도는 익숙한 체취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앞선 몸이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뒤로 돌았다. 그러곤 체취의 주인을 찾아 분주히 눈동자를 굴렸다.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정면에 그녀가 보였다. 그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단박에 그녀를 향해 넓은 보폭으로 걸었다.

    “이브.”

    그는 걸음을 멈추기 무섭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쩐지 수척해 보이는 뺨을 지분거리며 금방이라도 품에 안을 것처럼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가 옅게 미소를 감아올렸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가 뒤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네 향기가 나서.”

    “내 향기?”

    “응.”

    칼리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잠시 놀란 듯했던 그녀가 이내 다시금 배시시 웃어 보였다.

    “무슨 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향기만으로 내 앞까지 한걸음에 다가올 만큼 내가 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왜 그냥 가?”

    “……내가 널 더 혼란하게 할까 봐.”

    언뜻 장난기가 묻어나는 이벨리아의 질문에 칼리프는 거짓 하나 더하지 않은 대답을 착실하게 내어 주었다.

    애써 노력 중인 듯 보이는 그녀에 맞춰 저 또한 듣기 좋은 말을 돌려줘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되었지만, 역시나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거짓말이라면 이미 지금껏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해 오지 않았던가.

    칼리프는 이제 거짓말이라면 인이 박였다. 그게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펠릭스한테 얘기 들었구나?”

    “응.”

    “생각보다 둘 사이가 아주 끈끈한가 봐.”

    이벨리아가 문득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게 마음이 상했다는 대답처럼 들려 칼리프는 순간 긴장했다.

    “그럼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건 내가 걱정돼서 그런 거겠네?”

    이벨리아가 퍽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칼리프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별로다.”

    이벨리아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칼리프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서둘러 변명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이브, 난 그냥 네가 걱정이 되어서…….”

    “너 말고, 나 말이야.”

    불현듯 이벨리아가 칼리프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칼리프의 시선이 절로 그녀에게 잡힌 자리로 향했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그녀의 말과 행동이 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속상하다는 듯 찡그린 그녀의 표정은 자꾸만 그를 불안하게 했다.

    선뜻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한참 만에 입술을 떼었다.

    “늘 너한테 걱정만 끼치잖아. 그러기 싫은데…….”

    칼리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속상해하는 이유를 듣고 나니 그녀가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 위해 잠기 생각에 잠겼던 그가 곧 불거진 턱을 움직였다. 어느덧 긴장한 기색은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왜 그런 이유로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응?”

    “왜 안 그래도 되는 일로 속상하다는 듯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고.”

    칼리프가 퍽 단호한 어조로 되물었다. 어투 때문인지 표정까지 차가워 보였다. 정말 그녀가 왜 속상해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탓에 이벨리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야.”

    “난 숨기지 않고 네 걱정을 할 수 있어서 좋은데, 넌 그게 왜 싫은 거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의문이 덧대어졌다. 그게 이벨리아의 말문을 완전히 막히게 했다.

    이벨리아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빈틈없이 저로 채워진 그의 눈동자가 온통 진심으로 가득했다. 정말 자신을 걱정하는 일까지도 좋은 듯했다.

    순간 이벨리아는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걱정하는 게 뭐라고 이토록 진실된 표정까지 짓는 것인지. 그의 진심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실소는 어느덧 애정 가득한 미소로 바뀌었다. 이벨리아는 입매를 환하게 휘어 올린 채 그의 허리를 꼬옥 껴안았다. 그러곤 나직이 속삭였다.

    “다음부턴 이렇게 해 줘.”

    “……다음부턴?”

    “내가 걱정될 때마다 이렇게 해 달라구.”
     

    16927015407113.jpg

    1692701540712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