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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넌 대체 뭐야. (82/94)


82화. 넌 대체 뭐야.
2023.08.21.


이벨리아는 태자비궁에 도착하기 무섭게 페일린에게 차를 부탁했다. 그러곤 곧장 응접실로 가 펠릭스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다.

황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주머니 안에서 많이 답답했던 듯 그는 나오자마자 사람의 모습을 하더니 기지개부터 쭉 켰다.

“으으, 삭신이 다 쑤시는 기분이네.”

“고생했어요. 아버지 일은 다시 한번 너무 고맙고요.”

이벨리아는 여전히 수심 가득한 얼굴로 펠릭스를 향해 억지로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런 이상한 표정을 지을 거면 차라리 웃지 마.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나름대로는 그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 건데, 돌아온 대답이 그녀를 퍽 민망하게 했다. 그래도 억지로 지웠던 미소를 거둬 내니 적어도 안면 근육이 땅기진 않았다.

이벨리아는 참았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펠릭스의 말대로 일단 황궁에 돌아오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에 없이 불편했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에드윅이 깨어난 걸 보지 못한 게 마음의 짐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있을 순 없었다.

신분이 달라지고 불편한 점이 제법 많았지만, 그중 가장 불편한 것이 이런 부분이란 걸 이벨리아는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부친이 이렇게 아픈데도 곁을 지킬 수 없다니 무기력함에서 쉬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황궁으로 나서기 전 제이드에게 부친이 깨어나는 대로 전갈을 보내 달라 신신당부를 했으니 연락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그녀의 잇새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즈음 이벨리아의 부탁으로 차를 준비하러 간 페일린이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 후작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페일린은 테이블 위에 조심히 차를 내려놓으면서도 조급하게 물어왔다. 이벨리아는 곧장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떼었지만, 다시금 원래대로 꾹 다물어야 했다.

페일린의 뒤편에 서 있는 펠릭스의 존재가 이제야 신경 쓰인 탓이었다. 이벨리아는 당혹한 얼굴로 페일린과 펠릭스를 번갈아 보았다.

“저, 페, 페일린…….”

“네?”

펠릭스에 대해 무어라 변명해야 할까 머리를 급히 굴려 보지만, 이미 당황한 머리는 제 기능을 해내지 못했다.

이벨리아는 연신 진동하는 눈으로 페일린을 보았다. 그 모습이 페일린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페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벨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그때 별안간 펠릭스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웅웅 울렸다.

“그냥 하던 대로 해. 어차피 네 시녀는 날 보지 못하니까. 아, 내 목소리도 듣지 못할 테니까 그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벨리아는 다가오는 페일린을 바라보다가도 펠릭스에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할 거라니. 제 눈엔 이토록 선명한 그인데 페일린이 보지 못할 거란 말이 지나치게 놀라웠다.

“전하, 왜 그러세요?”

페일린이 하얗게 질린 이벨리아를 걱정스레 보다 이내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에 화들짝 놀란 이벨리아가 페일린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페일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벨리아는 잔뜩 긴장한 낯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페일린은 의아한 얼굴로 다시 그녀를 보았고, 펠릭스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했다.

“전하, 아무래도 오늘은 침실에서 이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차는 나중에 다시 준비해 드릴 테니 오늘은 이만 침실로 가세요.”

“페, 페일린…….”

“네, 전하.”

페일린이 이벨리아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녀의 안색은 온통 걱정으로만 가득했다. 이벨리아가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 지우지 못할수록 페일린의 걱정은 더욱 짙어져 갔다.

“정말, 네 눈에는…….”

이벨리아가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가도 펠릭스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네 눈에는 정말 보이지 않는 거냐는 말 따위는 페일린에게 없던 혼동을 안겨 주는 셈이었다.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순 없었지만 애써 괜찮은 척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아니야, 페일린. 난 괜찮아. 아버님은 어젯밤보단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 그래도, 난 아직 마음이 조금 불편해서…… 차라도 마시며 진정 좀 할게.”

가까스로 전한 이벨리아의 말에도 페일린은 쉬이 표정을 바꾸지 못했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그녀를 테이블 앞까지 부축하고 나서야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등 뒤로 문이 꽉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벨리아가 펠릭스를 향해 믿을 수 없단 눈길을 보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이벨리아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그가 신비한 능력을 지닌 자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런 능력까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펠릭스는 피곤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곤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에 이벨리아가 몸을 움찔 떠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젠 그녀 역시 다 알아야 할 사실이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내가 햄스터의 몸을 빌릴 수 있다는 거나, 네 몸을 고쳐 준 것, 아까 네 아버지에게 기운을 불어넣은 것까지.”

“…….”

“따지고 보면 그 일들도 놀랍고 믿지 못할 일인 건 마찬가지인 거 아닌가?”

이벨리아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믿지 못할 거로 따지자면 줄곧 봐 왔던 그 모든 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놀란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우선 앉아. 서 있기 힘들어 보이는군.”

펠릭스는 무척이나 담담히 중얼거리며 페일린이 준비해 준 차를 찻잔에 쪼르르 따랐다. 그러곤 제 앞에 하나를, 다른 하나는 그녀의 앞에 놓아 주었다.

이벨리아는 차를 들이켜는 그를 빤히 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돌이켜 보면 저와는 달리 그는 언제나 태평했다.

문밖에 페일린을 비롯한 제 시녀들이 수시로 드나든다는 걸 알면서도 눈치를 살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말은 곧 그는 다 알고 있었다는 의미일 터였다. 문밖의 시녀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할 거란 걸. 그렇다면 이것까지도 그가 의도한 능력인 것일까.

“이것도 마법, 같은 건가요?”

“너는 날 보지만, 네 시녀는 날 보지 못하는 거 말이야?”

“……네.”

“글쎄. 마법과는 개념이 좀 다르지.”

펠릭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이었다. 마법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했지만, 페일린이 그를 발견하지 못할 거란 건 확신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이벨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그가 저와 똑같은 조건의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선 여전히 알지 못했다.

마법사인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지만, 펠릭스와 칼리프 역시 시원하게 그렇다고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다만, 그게 이해하기 쉽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는 식의 대답만 돌려줬을 뿐.

그래서 그간은 그저 펠릭스가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법은 아니라고 말하니 확실히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정체에 대해서.

“펠릭스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마법사는 아니라고 했으면서 어떻게 이런 능력을 쓰는 거죠? 이젠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괜히 말 돌릴 생각이라면…….”

“걱정하지 마. 그럴 생각 없으니까.”

노파심에 덧붙인 이벨리아의 말을 펠릭스가 단호하게 잘랐다. 그 탓에 이벨리아는 더욱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는 날 볼 수 있지만, 네 시녀는 날 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먼저 설명할까?”

제법 뜸을 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펠릭스는 거침이 없었다. 되레 그게 자꾸만 이벨리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벨리아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심장이 거칠게 쿵쿵 뛰었다. 그때 멈춘 듯했던 펠릭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네 시녀가 날 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해. 네 시녀가 신성력을 가진 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신성력, 이라고요?”

“그래.”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이벨리아는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펠릭스의 말이 온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뭔데요? 그럼 나한텐 그런 게 있는 건가요? 그래서 펠릭스를 볼 수 있는 거고요?”

“내가 궁금한 것도 그거야.”

“네?”

“대체 넌 날 어떻게 보는 거지? 넌 신성력을 타고난 인간도 아닌데.”

펠릭스가 가늘게 뜬 눈으로 이벨리아를 직시했다. 그 말에 곧장 혼란함에 물든 그녀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악의 기운을 느끼고 난 후였다. 당혹스러울지언정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그녀가 빨리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이게 최선이었다.

“지난번에 네게 물었지. 너의 어렸을 적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야. 넌 분명 그렇게 대답했어. 특별할 것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

“네가 날 볼 수 있을 정도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면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순 없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신성력이 네 몸에 흘러 다녔을 거고 그로 인한 불가피한 일들이 분명히 생겼을 테니까. 게다가 넌…….”

거침없이 말을 잇던 펠릭스가 일순 미간을 좁히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벨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당황한 이벨리아가 그를 피해 몸을 뒤로 물렸지만, 앉은 자리에서 멀리 도망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펠릭스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에 기운을 모았고, 푸른빛이 절정에 달한 순간 그녀를 향해 흘려보냈다.

당황한 이벨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도 펠릭스의 기운은 착실히 그녀의 몸에 흘러 들어갔다. 그러곤 그가 멈춘 순간, 그녀의 몸에 흡수됐던 기운이 순식간에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돌아왔다.

잠시 주춤거린 그가 흘려보낸 기운의 배 이상을 돌려받고 나서야 다시금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이, 이게, 무슨…….”

“넌 대체 뭐야, 이벨리아.”

펠릭스가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벨리아를 보며 매섭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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