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
(84/94)
84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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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
2023.08.23.
“이런 거로 되겠어?”
칼리프는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안은 채 되물었다. 휘감은 손길과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착실하게 허리를 휘감은 손길이 이토록 다정할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종일 가라앉았던 기분이 단박에 회복되는 것 같았다.
“응, 충분해.”
그의 어깨에 기댄 머리를 기분 좋게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대답 없이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벨리아는 미소를 환하게 피워 올리며 눈을 꼭 감았다. 귓가를 울리기 시작한 심장 박동 소리가 웅장했다. 그 박자를 따라 온몸이 둥둥 울렸다.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본능처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집중하면 할수록 피로했던 오늘 하루를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마주 안고 있던 팔을 풀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온전히 회복된 얼굴로 그를 향해 웃을 수 있었다.
“이제 진짜 다 괜찮아진 기분이야.”
“……한결 나아 보이기는 하는군.”
“응. 기분이 많이 좋아졌어.”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기분이 나아졌다. 걱정 어린 그의 눈빛이, 다정한 그의 손길이, 따뜻한 그의 품이 꼭 회복제 같았다. 안고 있는 것만으로 그녀를 종일 힘들게 했던 상념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기분 좋은 감각만을 남겼다.
신기했다. 누군가의 품이 이토록 긍정적인 기운을 전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
“힘들 때마다 네가 이렇게 안아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 정말 진심으로.”
그녀가 눈매를 휘어 접으며 아이처럼 속삭였다.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칼리프는 되레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벨리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표정이야?”
“네 바람이 너무 소박한 거 같아서.”
“내, 바람?”
이벨리아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무슨 말인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미를 알아채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순 그녀를 향한 그의 적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향한 눈빛은 알 수 없는 집요함이 실린 채 점차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가끔, 아니 생각보다 자주 마주해야 했던 눈길이었다.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언뜻 짐승을 닮은 듯 그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안아 주는 게 네게 그 정도의 효과가 있다면 분명 다른 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그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강렬하게 이벨리아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선뜻 그녀를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부지불식간에 밀려온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어쩌지 못하면서도 그녀에게 강압적인 기분은 안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듯이 보였다.
다른 때였다면 너무도 뜨거운 그의 모든 것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엔 그런 그가 두렵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볼 위에 닿는 순간 칼리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변화를 빼놓지 않고 두 눈에 꼭 담으며 그녀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럴까.”
“…….”
“안아 주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기분이 나아졌는데, 다른 건 더 효과가 클까?”
무언가 단조롭기만 한 음색 끝에 그와 오롯이 눈을 맞춘 채,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해도 좋다는 허락의 의미나 다름없는 미소였다.
그 메시지를 오롯이 읽어 낸 칼리프가 억지로 붙잡고 있던 욕망도 놓아 버리곤 그녀의 얼굴을 보드랍게 부여잡았다. 그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 위에 닿는 남자의 입술이 생각보다 단단하고 강직했다. 그것까지도 그를 닮았다는 생각이 이벨리아의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무척이나 생경한 감각에 겨우 안정을 되찾은 심장이 다시금 불규칙한 박자로 요동치는 게 느껴졌지만, 이벨리아는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 닫았다.
어쩐지 그라면 키스도 사납게 몰아붙일 것만 같았는데 생각보다 무척 부드럽고 다정했다. 어쩌면 그것까지도 저를 향한 배려일지도 몰랐다. 다정한 입맞춤 사이로 이따금 강직한 남자의 숨결이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그의 노력이 너무도 여실하게 마음 깊이 전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의 이 입맞춤이 너무 생경하고 어색했지만 그를 밀어낼 순 없었다.
도리어 그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곤 그를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낯선 기분과 달리 심장은 터질 듯 뛰었고, 온몸엔 열이 들끓는 기분이었다. 식을 줄 모르는 열기는 이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펑’ 하고 터질 것 같은 기세였다.
꼭 감은 눈꺼풀 위로 위험 신호가 강렬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벨리아는 칼리프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절대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위험 속에 빠져 있다면 목숨을 던져서라도 지켜 낼 남자였다.
그 믿음은 짧은 사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뿌리내려 어떤 상황에서도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부드러움을 가장한 격렬한 입맞춤은 제법 오래 이어졌다. 그 끝에 입술이 살짝 떨어진 순간, 이벨리아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고 어깨가 큰 폭으로 들썩였다. 내도록 누군가 꽉 붙잡고 있던 심장을 한순간에 놓아 버린 기분이었다.
심장이 큰 폭으로 너울지며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을 몰고 왔다. 묘하게 해방감을 닮은 듯 닮지 않은 그 기분은 이벨리아를 쉬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했다.
한참을 숨을 고르며 감은 눈을 뜨지 못하는데, 그 사이로 불현듯 칼리프의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너무 힘들면 노력하지 않아도 돼, 이브. 네 마음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너무도 다정한 목소리에 이벨리아는 속절없이 눈꺼풀을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자 싱그러운 녹안 가득 그의 얼굴이 차올랐다.
그녀와는 달리 조금의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 없는 그가 오롯이 그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줄곧 참아 왔던 말을 뱉기라도 하듯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이었다.
“네가 힘들다면 내가 하면 돼. 과거의 내가 기억이 나지 않으면 앞으로의 나를 네 기억 속에 남기면 되고, 펠릭스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그러니까 너무 힘들면…….”
잠잠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벨리아가 일순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말을 멈추곤 그녀에게 붙잡힌 손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이벨리아는 그 모습까지도 놓치지 않고 두 눈 가득 채워 넣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뒷덜미가 얼얼하게 당기는 기분이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는 듯 애틋하게 혹은 절박하게 말을 뱉다가도 제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 그는 모든 걸 멈추었다. 마치 그의 중심엔 언제나 그녀가 있다는 것처럼 맹목적이었다.
그게 처음엔 그녀의 마음을 더욱이나 무겁게 했었다. 한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는 칼리프가 있어서 이벨리아는 너무 행복했다. 그가 그렇듯 그녀 역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게 뭐든 다 해내고 싶었다.
이벨리아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골랐다. 그 마음을 그에게 꼭 전하고 싶었다.
“아니. 칼리프, 난 다 해낼 거야. 너도 꼭 다 기억해 낼 거고, 펠릭스와의 문제도 내가 해결할 거야. 꼭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칼…….”
“…….”
“넌 지금처럼 이렇게 내 옆에만 있어 줄래? 그렇게만 해 주면, 난 정말 행복할 것 같아.”
맞잡은 손을 응시한 채 수줍게 속삭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그와 시선이 맞물렸다.
이벨리아는 빠르게 눈을 깜박이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은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곤 예상조차 못 한 듯했다.
그게 순간 너무 귀여워 보여 마음이 따스해졌다가도 고작 이 정도 말에 감동을 받게 한 게 미안했다. 생각해 보면 한 번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도리어 거침없이 다가오는 그를 제지하기에 바빴고, 낯선 제 감정만 돌보기에 급급했다.
그 역시 그랬다. 늘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자꾸 앞서 나가는 그의 감정들을 참고 억누르기에만 바빴었다. 그걸 바보처럼 이제야 눈치채고 말았다.
이벨리아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그를 향해 다시 한번 팔을 뻗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그를 힘껏 껴안았다.
언제나 강하게만 보이던 남자가 순순히 그녀에게 안겨 왔다. 그러곤 그녀의 목덜미에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것까지도 그간 혼자 속앓이했던 그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아서 이벨리아는 그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널 기다리게만 하는 것 같아. 그런데도 화 한 번을 안 내네, 넌.”
“내가 너한테 화를 왜 내.”
그가 단박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어조였다. 이러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이벨리아 캐롤라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야 하는 이유조차 찾지 못하는 그라서.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이나 제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
“고마워, 칼. 지치지 않고 날 기다려 줘서.”
“…….”
“그러니까 이젠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할게. 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네가 내게 해 준 것만큼 나도 널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정말 노력할 거야.”
이벨리아는 온 마음을 담아 그에게 속삭였다. 잠시 미동도 하지 못하던 그가 곧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러곤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아 이내 번쩍 안아 들었다.
“카, 칼!”
놀란 이벨리아가 그의 어깨를 짚은 채 다급히 소리쳤지만, 금세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불시에 그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티끌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환한 미소였다.
“난 네가 이렇게 날 받아들여 준 것만으로 이미 넘치게 행복해. 그러니까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 없어.”
그가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꾸밈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오롯한 진심이 고스란히 그녀의 가슴에 와 박혔다.
이벨리아는 밀려오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다가도 이내 그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