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흉흉한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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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흉흉한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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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흉흉한 소문
2023.07.24.
“이 아비에겐 네 안위를 무사하게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런데 렐리아 영애를 그렇게 만든 것이 결국 너라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의 근원지는 황후궁이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니?”
“…….”
“결국 너를 그런 식으로 몰아 내치겠다는 심산인 게다.”
참고 참았던 말을 내뱉은 에드윅의 미간으로 깊은 주름이 팼다.
이벨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부친이 그 소문의 내용까지 알고 있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렐리아 영애를 하옥시킨 게 태자비궁에서 시작되었더라는 소문은 일부러 꺼내지 않은 말이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부친이 어떤 결단을 내릴지 눈에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리우리안과 관련한 어떤 부탁도 들어주지 않을 터였다. 딸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부탁을 들어줄 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걸 알기에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니, 알면서도 제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거라니.
이벨리아는 밀려드는 죄책감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부친은 시종일관 자신만을 걱정하는데, 자신은 그런 부친보다 리우리안을 더 걱정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원래도 탁하게 죽어 있던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런 딸아이를 바라보며 에드윅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참고 있던 말을 하나둘 꺼내 뱉었다.
“아무리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더라도 황태자는 황후의 아들이야.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쉬이 내칠 수는 없을 게다.”
“…….”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다오. 아비 역시 너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걱정을 하고 있어. 최선의 해결책이 무엇일지 줄곧 고민하고 있었고.”
“…….”
“오래 걸리진 않을 게다. 그러니 그때까진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이브. 그게 네가 황태자 전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에드윅은 온 마음을 담아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경우에도 이벨리아가 먼저 나서는 일은 없어야 했다.
결국 상황이 어그러져 날카롭게 벼려진 칼끝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그걸 마주한 사람은 자신이어야만 할 테니.
***
칼리프는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황태자궁으로 도착한 황후의 전갈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후의 연락을 기다리던 차였다. 렐리아가 투옥된 상황인데도 자신을 전혀 찾지 않은 채 가넷 공작만 만난다 싶더라니, 기어이 이벨리아와 관련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만들어 냈다.
이 모든 상황을 꾸민 것이 결국 이벨리아라고?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일국의 황후와 재상이 머리를 맞댄 결과가 이거라니, 너무 저급해서 그 이상 평가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 인정해 주고 싶은 건 이제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렐리아가 아닌 이벨리아란 건 받아들인 듯하다는 거였다. 그녀를 이런 식으로 이용했다는 건 어떻게도 용납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칼리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콧속을 파고드는 따뜻한 바람 속에 이벨리아가 좋아하는 벚꽃 향기가 은은하게 실려 있었다.
이벨리아를 보지 못한 것이 벌써 닷새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녀를 대신해 만남을 청하는 전갈을 들고 오던 전속 시녀도 이틀 전부턴 오지 않았다.
아마 궁 안에 떠돌고 있는 흉흉한 소문 때문일 터였다. 이 모든 일을 이벨리아가 제게 사주했다는 소문과 더불어 넷트 후작 영애를 버린 황태자가 곧 가넷 공작의 세력으로부터 내쳐질 위기에 있다는 소문까지 떠돌고 있었으니까.
온통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지만, 며칠째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는 렐리아가 그 모든 헛소문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었다.
모두가 소문이 진짜인 양 떠들어댔을 테니 아무리 이벨리아라고 하더라도 소문을 마냥 소문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제게 만남을 청하는 일도 그만두고 가만히 태자비궁을 지키는 것뿐이었겠지.
칼리프는 재차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벨리아만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제가 벌인 일의 대가를 그녀가 치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1분 1초라도 빨리 그녀를 고통 속에서 구해 줘야 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재차 정신을 차리곤 정면을 보았다. 어느덧 또렷해진 눈동자에 황후궁이 선명하게 비쳤다.
칼리프는 그 광경을 눈에 꽉꽉 담으며 맞물린 이에 힘을 주었다.
***
“찾으셨습니까.”
칼리프는 알현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유스티아를 향해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유스티아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손짓했다.
“어서 와서 앉으렴, 리우.”
그녀는 며칠 사이 무척이나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향한 눈에 마치 구세주라도 본 듯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의외의 상황에 칼리프는 눈썹을 씰룩거리다가도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무슨 일로 찾았냐니. 그게 무슨 말이니, 리우. 어미가 아들을 찾는데 이유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 같구나.”
“더는 찾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최근 황궁을 떠들썩하게 한 소문을 저 역시 들었거든요.”
칼리프가 거침없이 문제를 꼬집었다. 이렇게까지 직설적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유스티아의 얼굴이 일순 경직되었다.
“리우, 그건…….”
“가넷 공작께서 저를 내치기로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나…….”
“아니다, 리우. 그럴 리가 있겠니? 그저 공작께서는 네가 렐리아를 투옥시킨 일에 잠시 화가 나셔서 그러신 거야.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렴.”
유스티아가 손사래까지 치며 그를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리프는 그 모습이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자신이 그 소문에 상처받았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우스웠다.
“헛소문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공작께서 저를 내치기로 했다는 말이나, 그래서 제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 우스울 뿐이에요.”
“리우.”
“그렇잖아요. 공작이 뭐라고 감히 제국의 황태자인 제 입지를 흔들다 못해 내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칼리프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가넷 공작과 황후를 함께 보았던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리우리안 페트로프를 연기하지 않았다.
황후는 물론 가넷 공작 역시 달라진 자신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 같긴 했지만, 설마하니 자신이 리우리안이 아닐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황후는 제 부친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새 달라진 제 모습에 적응을 한 건지,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소문에 상심한 나머지 실성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황후의 눈빛에 역겨운 동정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리우, 네가 세력에서 내쳐지는 일이나, 그로 인해 황태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란다. 그건 이 어미가 확실히 약속해 줄 수 있어. 하지만…….”
“…….”
“렐리아는 이만 풀어 주자꾸나.”
유스티아가 애원하듯 말했다. 칼리프는 대번에 눈썹을 추켜세우곤 날카롭게 물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그래야 하냐니. 리우, 렐리아 영애가 누구인지 몰라서 묻는 말이니? 후작께서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당장 렐리아를 풀어 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성화야!”
“더 들을 필요도 없겠군요. 저를 보자고 하신 게 렐리아 영애의 이야기 때문이라면 전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칼리프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스티아의 옆을 지나 알현실 출입문으로 향하는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몇 발짝만 더 떼면 문손잡이가 손에 닿을 듯한 자리였다.
“리우리안.”
억눌린 유스티아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칼리프는 선선히 뒤로 돌아 기꺼이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네가 자꾸 고집을 피우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분명 네 꼴이 우스워질 거란다. 그러니까 리우, 제발 이 어미 말을…….”
“이미 어머니께선 직접 나서서 저를 우습게 만드셨던데요.”
“뭐? 대체 그게 무슨……!”
“영애를 감옥에 투옥시키도록 제게 사주한 것이 태자비라는 헛소문을 만들어 내신 게 어머니 아닙니까?”
칼리프는 유스티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줄곧 그를 언짢게 했던 사실을 지적했다.
순간 당황한 유스티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게 칼리프의 마음을 더욱 비틀리게 했다.
“덕분에 저는 여자 말이라면 간, 쓸개 가리지 않고 꺼내 줄 머저리가 되고 말았네요.”
“머, 머저리라니! 누가 감히!!”
“그뿐일까요. 태자비의 유혹에 넘어가 오래된 연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파렴치한까지 되었던 걸요.”
유스티아는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 만든 것이 황후 본인이란 말을 정확히 해 줬음에도 반성은커녕 시종들이 제 아들을 두고 우습게 떠들었다는 것에만 꽂혀 있는 듯했다.
정말 아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황후에게 정말이지 진저리가 났다. 더는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칼리프는 마지막 경고나 다름없는 말을 시작했다.
“저는 가넷 공작도, 공작이 거느리고 있는 세력도,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쥐고 있는 황태자라는 자리는 공작이 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던 것이 아니에요. 제가 어머니의 아들이자, 황제 폐하의 아들이기 때문이지요.”
“…….”
“그러니 더는 제게 그들의 허수아비가 되란 뜻이나 다름없는 말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제 뜻을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황후가 더없이 바보처럼 나오니 하는 수 없었다.
“저는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입니다. 가넷 공작에게 모든 권력을 갖다 바칠 머저리가 아니고요.”
어차피 마음 가는 대로 저질러 보겠다 작정한 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리우리안이란 이름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