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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아버지의 마음 (53/94)


53화. 아버지의 마음
2023.07.23.


[이틀 전부터 렐리아 영애님께서 투옥되신 일이 태자비궁에서부터 시작된 일인 것 같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뭐? 그게 무슨……!]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유혹하여 그간 눈엣가시 같던 영애님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 것이 아니겠냐는 소문인데…….]

[…….]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보려고 은밀히 알아보았더니…… 아무래도 황후궁에서 시작이 된 것 같더라고요.]

[하…….]

이벨리아는 터져 나오는 탄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리우리안을 유혹하여 렐리아를 투옥시켰다니,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었다.
그런데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며칠째 가넷 공작님은 물론 황후 폐하께서도 황태자 전하를 찾으시지 않으니…… 황태자 전하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들려오고 있어요.]

[하, 말도 안 돼. 도대체 누가 감히 황태자 전하의 입지를 운운한단 말이야! 그 소문은 도대체 어디서…… 하, 설마.]

리우리안과 관련한 이야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그녀가 순간 허망함에 젖은 눈으로 페일린을 보았다.

제발, 제발 그 소문만큼은 황후궁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고 말해 줘, 페일린.

차마 입에 담을 엄두도 나지 않는 끔찍한 가정에 이벨리아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갔다.

간절한 바람을 담아 페일린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이벨리아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 소문 역시 황후궁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어요.]

이벨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지난 기억을 되짚었을 뿐인데,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리우리안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이 황후궁에서 시작된 거라면 최악의 경우 황후와 가넷 공작이 리우리안을 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봐야 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인 것이다.

이벨리아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날 렐리아를 향해 내린 리우리안의 처분은 자신 때문이었다.

[영애가 나는 물론 나의 비까지 그토록 우습게 봤다니, 무척 유감이야.]

[전하, 오해세요. 전하를 우습게 보다니요. 말도 안 되는 억측이십니다!]

[그래? 그 말은 나의 비를 하찮게 본 건 사실이란 의미인가?]

렐리아의 하옥을 명하기 직전까지의 대화만 다시 떠올려 봐도 그랬다. 그는 렐리아가 자신을 하찮게 보고 있다는 사실에 꽂혀 있었다. 억울하다는 렐리아의 항변에도 그는 맹목적으로 그 사실에 집착했다.

[저런, 대답을 못 하는군. 하긴 아니란 말은 할 수 없겠지. 영애가 태자비에게 대드는 거로 모자라 감히 태자비의 몸에 상처를 낸 꼴을 본 사람이 오늘만 해도 이렇게 여럿이니 말이야.]

[…….]

[이런, 나의 렐리. 가련하게도 떨고 있군. 하지만 어쩌겠어. 이토록 많은 이의 앞에서 그대가 보란 듯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말이야.]

이어진 말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렐리아 영애가 제게 대드는 거로 모자라 상처를 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그 행동을 ‘대역죄’라고 칭했다. 그것이 리우리안이 렐리아를 하옥시킨 명분이었다.

물론 그날 렐리아의 언행은 하나같이 도를 지나쳤다. 하지만 그게 ‘대역죄’라는 명목으로 하옥을 명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이전의 리우리안이라면 절대 그런 처분을 내리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모든 상황이 가리키고 있는 건 한 가지였다. 리우리안이 자신을 위해 황위와 관련한 위험까지 감수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게 이벨리아가 줄곧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자, 아침 동이 트기 무섭게 에드윅을 불러야만 하는 이유였다.

“전하, 후작님께서 드셨습니다.”

연거푸 내쉬는 한숨 사이로 줄곧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전해졌다.

이벨리아는 지그시 내리감고 있던 눈을 뜨곤 서둘러 대답했다.

“어서 드시라고 해.”

그렇게 대답해 놓고도 타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 쪽으로 향하는 성급한 걸음이 응접실의 절반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에드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묵례하는 에드윅의 어깨가 차분한 원래의 성품과 달리 불규칙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급하게 찾는다는 전갈에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 역력해 보였다.

“우선은 앉으세요, 아버지.”

이벨리아는 송구한 마음을 가득 담아 부친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곤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그 잠깐 사이에도 내내 속에만 담고 있던 말들이 서로 앞다투어 목을 찌르고 올라왔지만, 애써 꾹꾹 참으며 부친의 앞에 준비해 뒀던 차를 내밀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너무 이른 시간에 갑자기 입궁해 달라고 부탁드려 많이 놀라셨죠?”

“몇 해 전부터 아침잠이 많이 줄어 제게 이른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에드윅이 인자한 미소를 감아올렸다. 그 안엔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녹아 있었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무거운 마음을 쉬이 감추지 못했다.

“혹 바쁘신 중인데 제가 연락을 드려 억지로 시간을 내신 건 아니신지요.”

“아닙니다. 마침 아침 식사를 다른 때보다 이르게 시작했던 터라, 식사 마치고 일어나던 중에 집사장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셨다니 그나마 다행이에요.”

“설령 바쁜 와중이었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찾으시는 일인데, 열 일 제쳐 두고서라도 달려와야지요.”

에드윅은 연거푸 고개를 내저으며 딸이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편치 않을 딸아이에게 저까지 짐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벨리아를 보고 있긴 했지만, 사실 에드윅은 그녀가 왜 자신을 이렇게 급히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황태자 때문일 것이다. 최근 그와 관련한 문제로 황궁 안이 떠들썩했다. 그러니 딸의 의중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에드윅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이벨리아가 운을 떼길 기다렸다. 말을 고르는 건지 한참을 입술만 우물거리던 그녀가 기어코 소리를 낸 건 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혹 렐리아 영애와 관련한 소식을 알고 계시는지요.”

“예. 그간 황후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영애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줄곧 주변의 이목을 끌고 다녔던 영애이다 보니 소문도 빠르게 퍼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럼 영애의 하옥을 명한 것이 전하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에드윅의 표정이 처음으로 어둡게 침잠했다. 그게 내내 초조함에 시달리던 이벨리아의 마음에 더욱 불을 지폈다.

“저 때문에 그리하신 것입니다. 영애가 제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고 전하께서 화가 나셔서 그런 명을 내리셨어요. 하지만 그날 영애의 태도도 분명 선을 넘었고, 지나치게 무례했어요. 하옥까지 시킨 건 조금 지나친 처분이었을지도 모르나, 전하께서 충분히 화가 나실 만한 상황이었어요.”

“…….”

“하지만 그 일이 황후 폐하와 가넷 공작님에겐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거예요. 페일린을 통해 들은 말에 의하면 최근 황후 폐하는 물론 가넷 공작님께서도 전하를 전혀 찾고 계시지 않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전하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고…….”

“…….”

“다 저 때문이에요. 그러니 제가 전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하는 일은 전부 전하를 곤란하게 해 드릴 게 분명해요.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뵙길 청했어요.”

“…….”

“아버지께서 황제 폐하께 말씀 좀 올려 주시면 안 될까요? 폐하께서 전하께 힘이 되어 주신다면 말도 안 되는 소문은 금방 사그라질 거예요. 분명해요.”

횡설수설 상황을 설명하던 이벨리아의 눈가에 기어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에드윅은 순식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이벨리아와 제이드에게 어린 시절부터 중요하게 가르친 것이 어떤 상황 속에서나 차분하게 평정을 지키는 일이었다.

제이드와 달리 이벨리아는 차분한 성품을 타고나 그의 가르침을 수월하게 따라오곤 했었다.

그랬던 제 딸인데, 지금의 이벨리아에게선 그런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창백한 안색과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며칠 동안 딸아이가 했을 마음고생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목 끝을 치고 올라온 침음을 속절없이 내뱉었다.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릿속이 더욱 혼란해지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어느덧 미지근해진 찻잔을 들어 입가에 기울였다. 수분으로나마 타는 듯한 가슴속 갈증을 해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해갈되는 기분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증명하듯 잇새로 바싹 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선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보시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이벨리아가 점점 더 조급해지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성마르게 드러냈다. 그에 에드윅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곤 단호하게 딸을 응시했다.

“이브.”

그녀가 황가의 일원이 된 이후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애칭이었다. 그게 순간 이벨리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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