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에드윅의 결정 (55/94)


  • 55화. 에드윅의 결정
    2023.07.25.


    늦은 밤.

    “아버지,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엇을 확인하고 오라고요?”

    제이드가 눈살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라도 들은 표정이었다.

    그런 아들을 마주하는 에드윅의 마음은 바윗덩이를 지고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제이드뿐이었다.

    “영지에 가서 드윗 자작이란 자를 만나 보고 오라고 했다.”

    “아니요. 그다음으로 하신 말씀이요. 갑자기 키우게 된 아이가 황가의 핏줄인지 확인하고 오라고 말씀하신 거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그래. 정확하게 들었구나.”

    말끝에 에드윅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여유가 있거나 상황이 괜찮았다면 레이튼을 통해 알아봤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도 없거니와 레이튼을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황궁 안에서 이벨리아를 향한 모함이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어떻게 레이튼을 영지로 보낼 수 있을까.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제이드, 내 말이 갑작스러울 거란 거 안다. 하지만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

    “……하,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라도 좀 해 주세요. 갑자기 드윗 자작이라니, 대체 그자가 누구이기에 황가의 핏줄을 키웠단 말씀이십니까.”

    연거푸 이어지는 제이드의 질문에 에드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드를 움직이기 위해선 설명해야 했다.

    에드윅은 잠시 눈을 내리감곤 그간 수집한 자료들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그러곤 차근차근 제이드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제이드의 낯빛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갔다. 끝내는 입을 가렸던 손마저도 무릎 위로 툭 떨어트렸다.

    “하, 그게 무슨…….”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제이드의 눈동자가 혼란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일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는 에드윅의 태도에 조금씩 받아들이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제이드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 아버지 말씀은 황태자가 쌍생아로 태어났고, 가넷 공작에 의해 버려진 황태자가 영지에 있는 드윗 자작의 손에서 자랐다는 거죠. 며칠 전 저택을 찾아온 사람이 진짜 황태자가 아니라 버려진 쌍생아라는 거고요.”

    되묻는 제이드의 얼굴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에드윅은 최대한 차분한 모습으로 제이드를 마주 보았다.

    “제이드…… 많이 당혹스러울 거란 건 알지만, 시간이 없다. 너도 지금 이벨리아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지 않니.”

    “……미치겠네, 정말.”

    제이드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뇌까렸다. 하지만 손을 내리고 곧 드러난 눈동자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총기가 어려 있었다.

    “곧바로 채비해서 다녀올게요.”

    “아비의 결정을 따라 줘서 고맙구나, 제이드.”

    “그런데 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제이드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에드윅을 보았다. 에드윅은 대답 대신 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물어도 좋다는 의미였다.

    “만약 아버지 예상대로 지금 황태자 자리에 앉아 있는 자가 자작 손에서 자란 그 버려진 쌍생아라고 하면.”

    “…….”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법 의미심장하게 이어진 제이드의 질문에 에드윅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 또한 며칠 내리 고민했던 문제였다. 무엇이 최선의 방법일지 도통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결국 사랑하는 딸의 얼굴이었다.

    “……이벨리아의 결정을 따라야겠지.”

    그렇게 대답한 에드윅의 눈동자가 여전히 번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그보다 최선의 답은 없었다.

    이벨리아가 어떤 딸이던가. 자신의 제안으로 황가의 일원이 된 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한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 딸아이가 단 하루만이어도 좋으니 행복하길 바랐다. 그렇게 해 주기 위해 아비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이벨리아가 지금의 황태자가 가짜란 걸 알고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그럼…….”

    입에 담는 것조차 부담스러운지 제이드가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에드윅의 모습이 어느덧 발체로페 제국 최고의 재상 캐롤라인 후작답게 무척이나 우직했다.

    에드윅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곤 제이드를 향해 대답했다.

    “그를 진짜 황태자로 만들어 줘야겠지.”

    그게 에드윅의 결정이었다.

    * * *

    늦은 밤, 이벨리아는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 보고자 선 자리인데, 답답함이 달래지긴커녕 한숨만 더욱 차올랐다.

    환하게 떠오른 달을 눈에 담기 무섭게 그 위로 선명하게 그려진 누군가의 얼굴 때문이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로 리우리안을 보지 못한 게 벌써 며칠째인지 세어지지도 않았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를 향한 그리움이 못 견디게 짙어졌다.

    마음 같아선 페일린을 통해 만남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떠오르는 부친의 말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게다. 그러니 그때까진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이브. 그게 네가 황태자 전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리우리안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던 부친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했고 근엄했다.

    최선의 해결책을 찾겠다던 순간엔 오로지 진심만으로 가득했다. 부친의 입장에선 그게 줄곧 자신과 집안을 기만했던 황태자와 관련한 일일 텐데도 불구하고.

    “하아.”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음의 무게 역시 점점 더 무거워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부친을 생각하면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리우리안을 향한 걱정이었다.

    이벨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가 너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사이에도 황궁 안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소문으로 시끌벅적했다.

    태자비가 황태자에게 부탁해 넷트 영애를 하옥시킨 거라던 소문은 태자비가 황태자를 조종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그 소문은 또 태자비의 베갯머리 송사 실력이 엄청나더라고 떠드는 이들과 알고 보니 태자비가 멸망했다고 알려진 마법사의 핏줄이더라고 떠드는 이들로 나뉘었다.

    어느 쪽이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시답잖은 소문을 떠들고 다니는 이들은 하나같이 저들의 추측을 맹신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가 다르게 소문이 가지에 가지를 칠 순 없는 거였다.

    저를 향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만큼 리우리안을 향한 소문 역시 발 빠르게 황궁 안을 휘젓고 다녔다.

    그중 변하지 않고 꾸준히 시종들 입에 오르내리는 내용은 그가 곧 가넷 공작 세력으로부터 내쳐져 폐위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다른 소문처럼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변해 가기라도 하면 가넷 공작 세력으로부터 내쳐질 거란 것도 헛소문인 모양이라고 속 편히 믿기라도 할 텐데, 그 하나만큼은 어떤 식으로도 변하지 않은 채 처음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렐리아 영애가 아직까지도 감옥에 하옥되어 있었다. 영애의 출옥은 가넷 공작이나 황후 둘 중 하나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영애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 걸 보면, 누군가 영애의 출옥을 막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누군가는 리우리안일 테지.

    이벨리아는 창틀에 올려 두었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부디 아니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녀의 직감으로는 가넷 공작 세력과 리우리안이 척을 졌다는 소문만큼은 마냥 헛소문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잠깐도 그의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그대를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군. 그래도 갈게. 그대에게 최선을 다해 빨리 갈 테니, 그때까진 되도록 태자비궁 밖으로 나오지 말고 기다려 줘.]

    문득 렐리아 영애의 투옥을 명한 직후 리우리안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날 리우리안의 표정은 이번 일을 절대 쉬이 넘어갈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당분간 자신을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이나, 되도록 태자비궁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한 대목도 그랬다.

    그는 렐리아를 쉽게 풀어 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황후를 비롯한 가넷 공작과 척을 지게 된다고 해도, 그것까지 감수하겠다는 거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 때문에…….”

    이벨리아가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애써 묻어 두었던 생각이 머릿속 한가운데로 떠올랐다.

    [전하, 송구한 말씀이지만 제게 다시 대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대답할 기회?]

    [제가 전하의 이야기를 간절히 듣고 싶어질 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전하의 이야기는 그때 제게 해 주세요.]

    이벨리아는 기억을 복기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리우리안에게 말했던 그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만 같았다.

    아직은 듣고 싶지 않은데. 조금만, 조금만 더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하, 정말…….”

    이벨리아는 차오르는 한숨을 어쩌지 못하고 재차 내쉬었다. 속이 너무 탔다. 단전 깊숙한 곳에 불씨 하나가 꺼지지 않은 채 계속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은 그녀를 몇 번이고 괴로움 속에 밀어 넣었다. 그 기분을 참고 견디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습관처럼 또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였다.

    줄곧 간절하게 기다렸던 목소리가 불현듯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벨리아.”
     

    16902857985481.jpg

    16902857985489.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