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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눈속임 (42/94)


  • 42화. 눈속임
    2023.07.12.


    푸르른 잎사귀가 싱그럽게 피어오른 풀밭 사이로 햄스터 한 마리가 빠르게 가로질렀다. 태자비궁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펠릭스는 목 끝까지 숨이 차올라 헐떡이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칼리프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책에서 단서 찾는 건 무리일 거 같고, 이벨리아랑 대화를 하다 보면 뭐라도 얻는 게 있겠지.’

    어느덧 코앞에 자리한 태자비궁을 보며 펠릭스가 생각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답만이 나왔다.

    신성력이란 신이 존재할 때나 가치가 있는 힘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소멸이 아닌 봉인되어 잠들어 있었던 거라지만, 칼리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 깨어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랬다면 여전히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신성력 역시 점점 퇴화하여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어야 맞았다. 그게 세상의 순리고 이치였다.

    ‘아직까지 그 힘이 남아 있다면 그래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겠지.’

    펠릭스는 퍽 비장한 표정으로 짧은 다리를 더욱 빠르게 놀렸다. 그리하여 막 태자비궁 입구에 들어서려던 찰나, 별안간 그가 방향을 틀어 풀밭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침실에 있을 줄 알았던 이벨리아가 시종들을 이끌고 태자비궁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벨리아의 표정이 전에 없이 굳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뿐일까,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그녀의 전속 시녀 역시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숨을 죽인 채 몸을 숨기고 있던 펠릭스가 고민 끝에 그녀의 뒤를 쫓았다.

    ***

    이벨리아는 유리온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먼저 도착해 있던 황후의 앞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폐하.”

    황후를 향해 단정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그제야 고개를 든 유스티아가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왔군요, 태자비. 갑자기 보자고 하여 놀랐을 텐데, 어서 앉으세요.”

    이벨리아는 말없이 눈을 끔벅였다. 황제와 함께할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친절한 태도였다.

    자못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황후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황후를 오롯하게 바라보았다.

    미소 지은 얼굴에선 여타 다른 감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벨리아는 여전히 확신했다. 황후가 자신을 찾은 이유는 리우리안 때문이 분명할 것이라고.

    그녀는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황후를 향해 지체 없이 물었다.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폐하.”

    “얼마 전 황후궁으로 향이 좋은 차가 선물로 들어와 함께 들면 좋을 것 같아 불렀습니다.”

    유스티아는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곁에 선 시녀장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시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바로 앞에 놓인 찻잔에 쪼르르, 홍차를 따라 주었다.

    이벨리아는 붉게 우러난 차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곧장 이어진 황후의 말소리가 은근하게 그녀를 채근했다.

    “마셔 보세요. 향이 아주 좋답니다.”

    황후는 여유로워 보였다. 입가에 잔을 기울이는 손짓마저 그랬다. 바로 본론을 꺼내길 바랐으나,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벨리아는 나직이 숨을 내쉬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쥐었다. 너무 뻣뻣하게 굴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황후라면 그것마저 자신의 흠으로 만들 사람이었다.

    찻잔을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황후의 말대로 향긋한 홍차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그렇다고 해도 입맛이 당기진 않았다.

    예의상 한 모금을 들이켰을 때였다. 황후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지난 1년간 리우의 걱정으로 마음고생이 많았지요. 진작 이런 자리를 만들어 회포라도 풀었어야 했는데…… 내가 그간 너무 무심했어요.”

    유스티아가 퍽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진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본론을 꺼내기 위한 서론일 뿐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잠시 숨을 고르는 척 적당한 말을 골랐다.

    “아닙니다, 폐하. 저보단 폐하께서 더 마음고생이 많으셨지요. 진작 찾아뵙고 안부를 여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태자비라고 그럴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태자비가 그리 말해 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요.”

    유스티아가 자애로운 척 웃으며 다시금 찻잔을 기울였다. 온통 가식으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럴수록 이벨리아는 더욱 자리가 불편해졌지만, 본론이 이어지기만을 묵묵히 기다렸다.

    “근래 들어 리우가 태자비를 종종 찾고 있단 말을 들었어요. 무심한 어미를 대신해 리우라도 태자비를 신경 쓰고 있던 것 같아 어찌나 다행인지요.”

    이벨리아는 내내 테이블 모서리에 처박고 있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황후의 입가로 가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승전 파티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던지……. 너무 잘 어울려서 보자마자 깜짝 놀랐을 정도였답니다.”

    “…….”

    “생각해 보니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게 국혼 이후 처음이더군요. 리우도 리우지만, 그날 파티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이를 꼽으라면 단연 태자비라고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당치 않은 칭찬이 연이어 이어졌다. 진짜 묻고 싶은 말을 꺼내기가 어지간히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답할 말은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이벨리아가 고민에 잠겨 있던 때였다. 유스티아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날 리우가 태자비에게 제국의 하나뿐인 목걸이를 선물했다지요?”

    이벨리아는 고민하고 있던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찾아온 듯했다. 본능처럼 잠시 내려놓았던 긴장의 끈을 바짝 붙잡았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그리해 달라고 제가 전하께 부탁드렸습니다.”

    이벨리아는 차분한 얼굴로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침착하게 뱉었다.

    황후를 눈속임해야 했다. 리우리안의 마음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식의 방해 공작을 해올지 알 수 없었다. 그간 봐 온 그녀라면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런 상황이 오길 바라지 않았다. 아직은 리우리안과 다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꿈같은 행복의 불씨가 오래 유지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금방 꺼지길 바라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황후를 완벽히 속여야 했다.

    “태자비가, 부탁을 했다고요?”

    유스티아가 예상치 못한 듯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바라던 반응이었다. 이벨리아는 서둘러 말을 보탰다.

    “네. 처음으로 전하의 파트너로 참석한 자리이니만큼 전하께 누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단장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

    “이런 말씀 올리기 송구스러우나, 줄곧 렐리아 영애와 파티에 참석하시던 전하께서 별안간 제게 파티에 함께하자고 하신 이유도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벨리아는 준비한 말을 침착하게 전하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입 안이 썼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찾은 자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제 가치를 떨어트리는 일이 아무렇지 않을 순 없었다.

    “그러니까 태자비 말은, 리우의 평판을 위해 태자비가 몬트롤 백작가의 목걸이를 선물해 달라 직접 부탁을 했다는 말인가요?”

    유스티아는 미간에 팬 주름을 감추지 못한 채 재차 물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곧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니 유스티아는 더욱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리우리안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캐롤라인 후작 세력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면 태자비를 완벽하게 꾸며 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황태자에게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불운의 황태자비라고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함께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의아하게 생각은 할 테지만, 확실한 한 방이 있어야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초석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분명 그랬다. 캐롤라인 후작 세력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이벨리아를 완벽하게 꾸며 놔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당시에는 제 아들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한 건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이벨리아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유스티아는 입 안 가득 차오른 한숨을 억지로 삼켜 냈다. 그 모든 게 이벨리아의 생각이었다니, 그건 그것대로 신경이 쓰였다.

    순진한 제 아들이 간악한 태자비의 술수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태자비가 리우를 위해 그렇게까지 생각해 줬다니 너무 고맙군요.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전하의 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날의 일로 렐리아 영애의 마음이 많이 상한 듯하여…… 아무래도 폐하께서 갑자기 저를 찾으신 이유도 그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신지요.”

    일순 유스티아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제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니, 역시나 영악한 캐롤라인 후작의 여식다웠다.

    “아닙니다. 난 정말 태자비와 회포를 풀고 싶었을 뿐이에요. 말했듯이 선물로 들어온 차가 맛이 무척 좋기도 했고 말이에요.”

    유스티아는 입매를 힘껏 휘어 올렸다. 아무래도 적당한 틈을 찾아 이벨리아와의 자리를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눈치 빠른 태자비를 오래 마주하고 있어 봐야 제게 좋을 것이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이벨리아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었다.

    당장 리우를 불러들여 간악한 술수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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