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황후의 부름 (41/94)


  • 41화. 황후의 부름
    2023.07.11.


    이른 새벽.

    유스티아는 밤새도록 한잠도 이룰 수가 없었다. 지난 오후에 보았던 렐리아의 얼굴이 도통 잊히지 않은 탓이었다.

    [폐하, 제발 그렇다고 해 주세요. 갑자기 황태자 전하의 마음이 바뀌었을 리는 없잖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폐하.]

    애원으로 시작된 렐리아의 넋두리는 무언가를 강하게 부정하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유스티아는 당혹스러웠다. 느닷없는 렐리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그녀의 말이 불편하게 귀에 걸려들었다.

    [리우리안의 마음이 바뀌었을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렐리아, 리우리안과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거니?]

    [폐하, 전하께서……. 전하께서, 흐윽.]

    유스티아가 다급히 묻자 렐리아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우는 모습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암시했다.

    그게 유스티아의 마음을 못내 불안하게 했다.

    렐리아는 한참이 지나도록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유스티아가 다그치다시피 렐리아를 채근했다.

    [이렇게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렐리아. 어서 내게 이야기해 보려무나.]

    [……이곳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황태자 전하를 뵈었어요.]

    겨우 말문을 뗀 렐리아의 눈망울엔 여전히 물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유스티아는 렐리아가 또 입을 다물어 버릴까 봐 서둘러 물었다.

    [리우를? 그런 거라면 이렇게까지 서럽게 울 일이 아니지 않니? 설마 리우랑 다투기라도 한 거야?]

    [아니요. 전하께선 저를 보지 못하셨어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저만 전하를 알아보았어요.]

    유스티아가 미간을 구겼다. 혼자만 리우를 본 것이라면 아들과 다툼이 있던 것도 아니란 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유난이란 말인가.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 렐리아. 아무래도 오늘은 네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런 날은 별 이유도 없이 충분히 예민할 수 있어.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푹 쉬는 게 좋겠구나.]

    [폐하.]

    [더 듣고 싶지 않구나. 나도 이만 쉬어야겠어.]

    유스티아는 잠시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아무래도 렐리아를 궁으로 부른 것이 실수였던 것 같았다.

    파티 이후 리우와 이렇다 할 교류도 딱히 없는 것 같았고, 며칠째 풀 죽어 지낸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소소하게나마 위로를 해 주려던 것뿐이었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속을 뒤집어 대다니, 유스티아는 더 이상 렐리아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알현실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렐리아를 위해 준비하라 일렀던 차는 침실에서 혼자 즐겨야 할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마침 알싸한 두통이 묵직하게 일기 시작했으니.

    유스티아는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그러나 막 문손잡이를 쥐려던 찰나, 예상하지 못한 말소리에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저만 멀리서 뵌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딘가로 향하던 길에 갑자기 방향을 바꾸셨습니다. 호위 기사도 물리고 향하신 곳은 태자비궁이었어요.]

    […….]

    [그곳에 도착하신 전하께선 비 전하를 찾으셨고, 비 전하께 꽃 선물까지 하셨습니다.]

    유스티아는 뻣뻣해진 목을 돌려 렐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채 다시금 서러운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거짓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유스티아는 렐리아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동이 트기 직전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렐리아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유스티아는 답답함을 지우지 못하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리우가 어째서 이유도 없이 태자비를 찾아간단 말이야. 게다가 꽃을 선물했다고? 꽃이라곤 거들떠보지도 않던 애가?”

    리우리안은 제 배로 낳은 아드님이었지만, 저와는 성향은 물론 취향까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그래서 유스티아는 리우리안에 대해 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리우리안은 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가 이유도 없이 태자비를 찾아가 꽃을 선물했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렐리아가 제게 거짓말을 한 것인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 영애가 어째서, 그것도 리우리안을 두고 거짓말을 한단 말이야.”

    유스티아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쯤 되니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렐리아의 울음소리가 이명처럼 울렸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위화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혼잡하게 헤집었다.

    “……하긴 갑자기 태자비와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한 게 좀 이상하긴 했지.”

    유스티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아무리 1년간 떨어져 지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개월 동안 제 배 속에 품었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뱉던 말들이 하나같이 그녀가 아는 아들의 입에서 나올 법한 것들이 아니었다. 당시엔 그저 거친 전장 속에서 1년을 누볐으니, 빠르게 철이 든 모양이라고만 여겼는데.

    “그러고 보니 파티에서도 이상했고…….”

    캐롤라인 후작 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한 거라기엔 태자비에게 제국의 하나뿐인 목걸이를 선물한 거로 모자라 태자비를 향한 아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기까지 했다. 그것 때문에 저 역시 파티 내내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던가.

    설마 그때부터 리우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던 건가?

    일순 유스티아의 낯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 일이었다. 황제가 된 리우리안의 모후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쥘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더욱이 이 사실이 부친인 가넷 공작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당장 리우리안의 목숨까지 위험해질지 몰랐다.

    가문의 명성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친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리우리안을 대신할 새로운 황태자를 만들어 내는 건 공작에게 일도 아닐 터였다.

    더군다나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안전 역시 보장할 수 없었다. 하나뿐인 황태자의 모후였기에 그나마 가넷 공작에게 이만한 대우 정도는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감투까지 잃는다면…….

    “아, 안 돼. 그것만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별안간 두려움에 휩싸인 유스티아가 손을 벌벌 떨었다. 아무래도 불길했다. 이번만큼은 제가 직접 확인을 해야 할 것 같단 직감이 밀려왔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유스티아는 침실 문을 향해 거침없이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는가!”

    ***

    이른 아침, 이벨리아는 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느닷없이 이어진 페일린의 보고 때문이었다.

    [전하…… 황후궁에서 아침 식사 마치시는 대로 유리온실로 걸음 하시라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이벨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페일린을 보았다. 너무 뜬금없는 부름이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니? 가령, 렐리아 영애도 참석하는 티파티 자리라거나…….]

    [아니요. 그런 말은 전혀 없으셨어요.]

    이벨리아는 당혹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페일린 또한 마찬가지인지, 그녀 역시 혼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알겠어. 전해 줘서 고마워.]

    이벨리아는 억지로 미소를 감아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스레 페일린까지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최대한 복잡한 심경을 감추며 페일린의 분주한 손길에 묵묵히 몸을 맡겼다. 부스스한 흔적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지워져 갔다. 그러는 중에도 이벨리아는 황후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골몰했다.

    갑작스러운 부름의 이유를 대충이라도 알아야 마음의 준비를 할 수가 있었다. 최소한의 준비도 없이 마주하기엔 황후는 제게 너무 독살스러운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리우리안 때문이겠지.’

    이벨리아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황후가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야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이번처럼 명분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녀를 찾은 적은 없었다.

    당연했다. 황후는 사람들의 시선에 무척 민감한 편이었고, 모두의 눈에 자애로운 황후로 비치길 바라곤 했으니까.

    황후는 이벨리아를 괴롭히고 싶을 때마다 티파티를 열었다. 그녀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렐리아와 그의 친우들만을 초대하여 그들 앞에 이벨리아를 내던졌다.

    그저 방관만 하면 렐리아와 그 친우들이 알아서 이벨리아를 비웃음거리로 만들며 악랄하게 괴롭혔다.

    황후의 입장에선 이벨리아를 괴롭히는 방법으로 그보다 더 안성맞춤인 것은 없었다. 직접 나서지 않고도 눈엣가시 같은 태자비를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그랬던 황후가 어떠한 명분도 없이 그녀를 찾고 있었다.

    ‘리우리안 때문에 그러는 게 분명해. 그것 말곤 황후의 이성을 이렇게까지 뒤흔들 수 있는 게 없어.’

    이벨리아는 확신했다. 국혼 이후 리우리안과 근래처럼 다정한 한때를 보낸 적은 없었고, 황태자 부부의 사생활을 황후에게 전할 눈과 귀는 황궁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니 이유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전하…….”

    깊어진 생각 사이로 걱정 어린 페일린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또렷해진 눈으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곧장 황후를 만나러 가기에 손색없는 모습이었다.

    “전하, 우선은 식사를 올릴 테니 식사부터 하시고…….”

    “아니, 페일린. 아침은 됐어. 준비하지 않아도 돼.”

    “전하…….”

    단호한 거절 의사에 페일린의 낯빛이 더욱 걱정으로 짙어지는 게 보였지만, 이벨리아는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시간에 잠시 후 있을 일을 고민하고 대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긴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명분 때문에라도 쉬이 이어질 수 없던 관계를 억지로 붙잡았을 때부터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벨리아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어느 때보다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16890771917845.jpg

    168907719178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