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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그녀가 원하는 남자 (43/94)


43화. 그녀가 원하는 남자
2023.07.13.


늦은 밤, 칼리프는 피곤도 잊은 채 급히 태자비궁으로 향했다. 황태자궁 침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펠릭스에게 전해 들은 말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게 와?]

[정말 어지간하군. 일찍 오면 일찍 온다고 잔소리고 늦으면 늦는다고 잔소리이니, 누가 보면 네가 나의 비라도 되는 줄 알겠어.]

[하, 쓸데없는 말은 됐고 얼른 이벨리아에게 가 봐.]

뜬금없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도 그동안은 이벨리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진 않았는데, 이젠 저 몰래 그녀를 만나고 다니는 일을 대놓고 드러낼 생각인가 싶었다.

당장에 으름장이라도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입을 떼기도 전에 펠릭스의 목소리가 귓속을 헤집었다.

[오늘 오전에 황후가 이벨리아를 찾았어.]

[뭐? 황후가?]

[낌새를 눈치챈 건지 네가 이벨리아에게 목걸이를 선물한 일을 핑계로 은근하게 그녀를 떠보더군.]

펠릭스의 설명은 방금 전 본 일을 설명하듯 자세했다. 하지만 칼리프의 귀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악랄한 황후의 횡포에 상처받았을지 모를 이벨리아의 마음만이 신경 쓰였다.

펠릭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지만, 칼리프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황태자궁을 나섰다.

오늘따라 태자비궁까지의 거리가 왜 이리도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럴수록 그는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멀리서 태자비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뿐인데도 칼리프는 가슴이 불안하게 뛰는 걸 느꼈다. 황후를 만나고 온 이벨리아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생각하니 숨이 탁 막혔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자 이토록 힘을 내어 버티는 것인데, 그게 왜 이리도 어려운지 모르겠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빠르던 걸음이 달음박질이 되다시피 했다.

어서 그녀가 보고 싶었다.

***

침대 위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이벨리아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최근 며칠간은 제법 수월하게 잠을 이뤘는데, 오늘은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전의 일로 마음이 뒤숭숭한 탓이었다.

눈만 끔벅이며 자리를 지키던 그녀가 결국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짧지 않았던 불면 생활로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 알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침실 한쪽에 걸려 있는 두툼한 숄을 어깨에 두르곤 침실을 나섰다.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게 최고였다.

페일린이 알면 경악을 하다못해 기절할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고 싶었다.

이벨리아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크지 않은 걸음 소리에 태자비궁에 기거하는 시종 중 하나를 깨우기라도 할까 봐 까치발까지 들었다.

마지막 계단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그녀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뒤를 살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계단과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탈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전하?”

이벨리아는 놀란 얼굴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태자비궁 입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리우리안이 보였다.

홀린 듯 다리가 움직였다. 그의 앞에 서자 가늘어진 시선이 단박에 그녀의 실루엣 위로 달라붙었다.

“이 시간에 이런 차림으로 어딜 가는 거지?”

마뜩잖은 목소리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내려 제 몸을 훑어보았다. 숄을 걸쳤을 뿐 잠옷 차림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코앞의 정원을 나가는 거라고 하더라도 적절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이벨리아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사이 그가 그나마 남아 있던 거리를 빠르게 좁혀 왔다.

머리 위로 언뜻 거친 그의 숨결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은은하게 상기되어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게 순간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설마 여기까지 뛰어오셨어요?”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습관처럼 그럴 리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숨이 이렇게 거칠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서.”

그가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 대답했다. 그의 대답이 안 그래도 애틋하게 너울지던 이벨리아의 마음에 파동이 일게 했다.

그녀의 입가로 속절없이 미소가 번졌다.

이것 때문이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리우리안의 이런 모습을 아직은 더 보고 싶어서. 꿈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분 좋은 설렘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어서. 그래서 황후 앞에서 기꺼이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 선택을 한 것에 일말의 후회도 들지 않았다.

“밤 산책을 나가던 길인데, 같이 가시겠어요?”

도리어 행복했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어서.

이 늦은 밤, 그에게 스스럼없이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어서.

“좋아.”

더할 나위 없이 기다리던 대답이 돌아왔다.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꽉 맞잡았다.

***

“어머니가 그대를 황후궁으로 불렀단 얘기를 들었어.”

태자비궁 정원의 중간부를 지날 무렵,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잠시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 그녀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전하께서도 황후 폐하를 만나고 오신 거예요?”

이벨리아가 놀란 투로 되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슬쩍 들어 살핀 안색이 수심으로 가득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이전이라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의심부터 했을 텐데, 이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배려하고 있는 그의 반응이 그저 기쁘고 고마울 뿐이었다.

이벨리아는 고민했다.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이 그를 지금 느끼고 있을 유쾌하지 않은 기분에서 구해 줄 수 있을까.

때마침 불어오는 향긋한 바람을 맞으며, 이벨리아는 더욱 환한 미소를 감아올렸다.

“제가 황후 폐하를 만났다는 걸 알고 급하게 달려오신 건가 보네요.”

“……어머니께서 그대에게 좋은 말씀을 하셨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제 마음이 상했을까 봐 걱정이라도 하신 거예요?”

“아니라곤 못 하겠군.”

어떤 여지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답에 이벨리아가 주춤거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시선이 절로 그를 향했다.

“아니, 사실 많이 걱정했어. 그대가 상처받았을까 봐.”

“…….”

“이제야 겨우 그대와 웃으면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관계를 다시 망치게 될까 봐…….”

칼리프가 입 안에 담아만 두었던 말을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곤 빈틈없이 맞추고 있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자꾸만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이벨리아라니 꿈에 바라던 순간임이 분명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모래성 위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란 걸 그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녀의 행복만을 바라며 시간을 쪼개고 쪼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 또한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잠깐도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5년 전 용병단 침실에서 다시 눈을 뜰지 몰랐다. 그러고 나면 진저리나는 끔찍한 과정을 또 반복하게 되겠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칼리프는 속절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 괜찮아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는 건 솔직히 거짓말이겠지만…….”

“…….”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고 이렇듯 전하께서 한달음에 달려와 주셨잖아요.”

한숨의 의미를 달리 해석한 듯 그녀가 조바심 묻어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칼리프는 여전히 불안에 넘실거리는 눈으로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고작 그것만으로 가슴이 거칠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봐 온 얼굴인데, 여전히 그의 눈에 그녀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잔잔히 흩어져 나오는 숨결마저도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달큼했다.

그런 그녀를 잠깐도 원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갈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함께 나눴던 추억은 한 자락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벨리아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이 유난히 몸집을 부풀리는 날이면, 그는 그녀를 붙잡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제 그만 날 좀 기억해 주면 안 되는 건가. 그대 기억 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우리의 추억을, 이젠 제발 떠올려 주면 안 되는 건가…….’

칼리프는 힘없이 늘어져 있던 양쪽 손을 꽉 움켜쥐었다. 지나친 힘에 뼈마디가 부서질 것만 같았지만, 힘을 풀 순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의 손을 애처로이 붙잡고 정말 애원이라도 할 것 같았다. 마음으로는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한 일이었다.

“전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생각처럼 폐하께서 모질 게 굴지도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괜한 걱정 때문에 마음 불편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조심스레 팔을 붙잡은 채 어여쁘게도 말하는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온통 걱정뿐인 눈길은 다정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도, 애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건 칼리프 드윗이 아니라 리우리안 페트로프였다. 그녀가 원하는 남자 역시 칼리프 드윗이 아닌 리우리안 페트로프였다.

그리하여 오늘도 칼리프 드윗에겐 그녀를 붙잡아 애원할 자격도, 애원해 볼 용기도 없었다.

제 욕심을 위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래. 그대가 괜찮다면, 그거로 됐어.”

리우리안인 척하며 건네는 몇 마디 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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