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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비참함의 시작 (40/94)


40화. 비참함의 시작
2023.07.10.


렐리아는 멀리 보이는 황후궁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내디뎠다. 황후와 약속한 시간이 한참 전에 지났지만, 속도를 내는 게 여의치 않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장면이 쉬이 잊히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대가 좋아하는 벚나무 가지를 조금 꺾어 왔어.]

황후궁으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황제궁에서 나오는 리우리안을 발견했다. 승전 파티 이후 처음 보는 터라 반가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샘솟았다.

줄곧 마음에 품고 있던 서운함도 잊고 그를 향해 방향을 돌렸다. 리우리안의 뒤를 쫓아간 건 지극히 충동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비록 태자비와 함께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물론 해명도 하지 않은 그였지만, 그게 그를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하는 이유가 되진 못했다.

승전 파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과 함께 다정히 산책도 하며 변함없이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봐 주던 그였다. 그런 그가 엄한 이유로 태자비와 파티에 참석했을 리가 없었다.

황후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가 태자비를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는 단지 정치적인 명분 때문이라고.

그래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게 변함없이 다정했던 그라서, 제국의 태양과 견주어 유일하게 밀리지 않는 황후가 한 말이어서.
그날의 굴욕스러운 사건은 행복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래었다.

“그런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어……?”

배신감에 들끓는 목소리가 위태로이 허공을 갈랐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호위 기사까지 물리곤 황제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벚나무 앞까지 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벚꽃이 만개한 가지만을 골라 투박한 손길로 툭툭 꺾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종종 자신과 꽃구경을 위해 산책을 나서 주던 그였지만, 그는 꽃을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벚나무의 가지를 저리도 정성스레 꺾고 있단 말인가.

렐리아는 심장이 폭주하듯 뛰는 것을 느꼈다. 황후와의 약속도 잊을 만큼, 자존심도 없이 그의 뒤를 쫓을 만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예감했을 때부터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한 눈물은, 그가 멈춘 자리가 어디인지 명확해졌을 때에야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졌다.

[전하…… 어떻게 아셨어요?]

[무엇을 말이지?]

[제가 벚나무를 좋아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들이 볼 수 없는 자리에 꼭꼭 숨었는데, 야속하게도 그들의 목소리는 더없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렐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눌린 신음과 함께 울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더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위험할 듯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태자비궁을 빠져나갈 방향을 찾았다.

그렇게 막 한 걸음 떼었을 때였다.

[그냥…….]

[…….]

[왠지 그대가 좋아할 것 같단 느낌이 들더군.]

하아…….

억누르고 억눌렀던 신음이 기어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비참했다. 그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치욕스러웠다.

그는 제게 한 번도 꽃을 선물한 적이 없었다. 선물은커녕 취향을 알아준 적도 없었다.

렐리아는 튤립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햇빛이 따뜻해지고 바람이 포근해지는 시기면 유난히 그에게 산책을 조르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는 귀찮은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결국 함께 산책을 나가 주긴 했지만, 튤립 앞에서 한참이나 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뭐라고?

이벨리아가 좋아할 것 같아서 벚나무 가지를 정성스레 꺾어다 바친 거라고?

“하, 진짜…….”

렐리아는 입 안 가득 욕지기가 차올랐다. 선 자리가 어디에나 눈이 있고 귀가 있다는 황궁이라 속 시원히 욕지기를 뱉을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못내 짜증이 치밀었다.

연거푸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런데도 숨이 막혔다. 마음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렐리아는 황후궁을 향해 억지로 걸음을 뻗었다. 이렇게 된 이상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할 것 같았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황후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짓는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전에 없이 독기로 가득 차올랐다.

***

알현실로 향하는 유스티아는 미간의 주름을 펴지 못했다. 조금 전 렐리아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선 길인데 영 마뜩잖았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도착한 것도 심사가 뒤틀릴 지경인데, 도착을 알리며 시녀장이 덧붙인 말이 그녀의 심기를 몇 번이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폐하, 렐리아 영애께서 방금 막 알현실에 도착하셨습니다.]

[하, 이제야 도착했단 말이야?]

[예, 폐하.]

[뭘 해도 예쁘다고만 해 주니 슬슬 기어올라 보겠단 심산인 건가? 말도 없이 이렇게 늦다니, 기가 막혀서, 원.]

[저…… 그런데 폐하, 영애님의 안색이 영 심상치가 않습니다.]

[안색?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것이…… 꼭 화가 잔뜩 나신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계셨습니다.]

꼭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고. 그 말을 다시 한번 입 안에 굴렸을 뿐인데, 형언할 수 없이 언짢아졌다.

“감히 제까짓 게 내 궁에 들어오면서 인상을 써?”

참지 못한 신경질이 그녀의 잇새로 표독스럽게 흘러나왔다.

유스티아는 눈꼬리를 매섭게 치켜올리곤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코앞에 알현실 문이 보였다.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에 맞춰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사이로 유스티아는 곧장 발을 뻗어 넣었다.

기척을 감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존재감을 과시하며 건방진 기세를 한풀 꺾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렐리아는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

진짜 제대로 기어올라 보겠다, 이것인가?

유스티아는 밀려 올라오는 욕지기를 씹어 삼키며 렐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비틀려 올라간 새빨간 입술이 비아냥거릴 준비를 모두 끝마쳤을 때였다.

유스티아는 목 끝을 치고 올라온 말을 뱉지도 못한 채 입술을 아연하게 벌려야 했다.

“……영애?”

그녀의 부름에도 렐리아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뿐일까, 얼굴이 엉망이었다. 심상치 않다던 시녀장의 말대로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화가 난 듯 뻣뻣하게 굳어 있단 얼굴 위로 물기가 흠뻑 묻어 있다는 것이었다.

유스티아는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영애, 대체 이게 무슨…….”

차마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렐리아의 얼굴은 더욱이나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얼마나 운 건지 두 눈은 퉁퉁 부을 대로 부어 평소의 반만큼도 떠지지 않았고, 입술은 얼마나 물어뜯은 건지 피가 맺혀 있었다.

유스티아는 상체를 바짝 기울여 렐리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소식도 없이 늦은 그녀를 향한 언짢은 마음은 가신 지 오래였다.

“렐리아, 무슨 일이 있던 거니. 감히 누가 너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거야!”

유스티아는 다른 의미로 들끓기 시작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리도 엉망이 된 렐리아의 모습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감히 누가 그녀를 건드린단 말인가. 이 발체로페의 황후인 유스티아가 든든하게 뒤를 지키고 있는 렐리아 넷트를, 도대체 누가 감히!

“렐리아, 어서 말해 보렴. 누가 너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건지 말이야. 그게 누구든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란다.”

유스티아는 참지 못하고 렐리아를 채근했다. 그제야 한 곳만 멍하니 바라보던 렐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폐하.”

“그래, 영애. 어서 말해 봐.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응?”

유스티아는 안절부절못하며 렐리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에서조차 생기가 넘치던 아이인데, 작은 기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폐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은 널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인지부터……!”

“폐하.”

렐리아가 유스티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감히 당치도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유스티아는 잘잘못을 따질 생각도 못 한 채 렐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를 위한 승전 파티가 열리기 사흘 전 밤에 제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영애에게 했던 말? 어떤 말 말이니?”

“폐하께서 분명 제게 그러셨습니다. 전하께서 비 전하와 파티에 참석하시는 건 정치적인 명분 때문일 뿐이라고.”

유스티아가 미간을 좁혔다. 너무 뜬금없었다. 그거라면 이미 진작에 끝난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래, 그랬지. 그런데 이제 와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 말끝에 폐하께서 당장은 달갑지 않은 순간이 되겠지만, 훗날 돌아보면 제 손에 쥐게 될 권력을 위한 작은 과정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니?”

유스티아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렐리아를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렐리아의 꼴에 잠시 잊고 있던 부아가 다시금 스멀스멀 치밀었다.

그녀는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내쉬며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떼었다.

“영애, 오늘따라 내 앞에서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지 통 이해할 수가 없구나. 기별도 없이 늦은 행동을 훈계할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영애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으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마.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폐하께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렐리아가 다시금 유스티아의 말을 겁 없이 잘랐다. 유스티아는 붙잡고 있던 렐리아의 손을 매정하게 놓아 버렸다. 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노여웠다. 기어오르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렐리아는 그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어서고 있었다.

유스티아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방진 꼴을 더 마주하고 있다간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스티아는 한 발짝도 채 뗄 수가 없었다.

“대답해 주세요, 폐하. 정말 여전히…… 여전히 그날의 굴욕이 훗날 제가 손에 쥐게 될 권력을 위한 작은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

“대답해 주세요, 제발.”

렐리아가 애원하다시피 그녀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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