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다음 계절과 함께 (39/94)


  • 39화. 다음 계절과 함께
    2023.07.09.


    이벨리아는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책에 빠져 있었다. 어제 오후 태자비궁으로 돌아오기 직전 디아나가 골랐던 책 중 몇 권을 침실에 가져왔는데, 도저히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디아나가 들려준 트리탄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웠던 덕분인지,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트리탄은 신전이 무척 발달한 왕국으로 푸른빛의 비늘로 뒤덮인 용을 그들의 수호신이라고 믿었으며…….”

    이어지는 구절을 소리 내어 읽던 이벨리아가 문득 입술을 맞붙였다. 그러곤 바로 직전에 보았던 글씨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푸른빛의 비늘로 뒤덮인, 용?”

    그러고 보니 책에 실린 그림 중 청룡이 그려진 인장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정말 용이 있다고 믿었단 말이야?”

    이벨리아는 동그랗게 뜬 눈을 빠르게 끔벅였다. 용을 수호신이라고 생각하며 섬겼다니 놀라웠다. 더욱이 이어지는 설명엔 신성력을 가진 자에 한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을 직접 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진짜 용이 있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사람이 용을 보기도 하고?”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용에 대한 이야기는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그 말인즉 용은 전설 속이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영물이란 의미였다.

    그런데 수백, 수천 년 전에는 그 존재를 온 마음을 다해 믿으며 섬긴 거로 모자라, 보기도 했다니…….

    “다음에 디아나와 이야기해 봐야겠다.”

    퍽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린 이벨리아가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었다. 다음 내용을 더 읽고 싶었지만, 종일 한자리에만 앉아 있던 탓인지 몸 이곳저곳이 찌뿌드드했다.

    “으아아.”

    일어서서 기지개를 쭉 켜자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온몸이 뻐근하긴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잊었던 취미 생활을 만끽한 덕이었다.

    이벨리아는 테이블 위의 책을 대충 정리하고는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벌써 저녁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출출한 것 같기도…….”

    납작한 배를 쓸어내리며 중얼거리던 이벨리아가 일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곤 창가로 바짝 다가갔다.

    태자비궁 정원 한가운데로 장신의 실루엣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올 거란 소식은 들은 바가 없는데. 이벨리아는 믿기지 않아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곧바로 뒤로 돌았다.

    믿을 수 없는데, 그가 보였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남자, 제국의 황태자였다.

    ***

    “전하!”

    이벨리아는 뛰다시피 태자비궁을 빠져나와 남자 앞에 섰다. 정말 리우리안이었다.

    “어떻게 알고 나오는 거지?”

    리우리안이 평소답지 않게 놀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전하가 오고 계신 게 보여서…….”

    “그래서 이렇게 한달음에 뛰어나온 것인가?”

    수줍은 대답에 퍽 짓궂은 장난이 돌아왔다. 고작 그 한마디에 이벨리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직은 리우리안의 장난보단 타박이 익숙한 그녀였다. 뒤늦게 제국의 비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죄송해요, 전하. 전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해야 했는데…….”

    이벨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곤 습관이나 다름없이 사죄의 말을 전했다. 고작 며칠이지만 그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일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신중을 기할 수 있도록 더 신경…….”

    “무엇이 내게 누가 되었다는 건지 통 모르겠군.”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못한 리우리안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고개를 들도록 했다. 예상 못한 접촉에 이벨리아가 놀란 얼굴로 리우리안을 보았다.

    “전하.”

    “나를 마중하기 위해 서둘러 나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아니에요, 전하. 창 너머로 태자비궁에 오고 계신 전하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그런 것인데…….”

    “그게 정말이라면 뭐가 문제인지 더욱이나 모르겠군. 오히려 그대가 날 보고도 시큰둥하게 굴었다면, 그편이 더 서운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꿀을 바른 듯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여과 없이 찌르고 들어왔다.

    며칠간 그를 겪으며 생각한 것보다 그가 훨씬 다정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지만, 여전히 이벨리아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정한 그를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호흡은 걷잡을 수 없이 가빠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자꾸만 현실감이 사라져서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꼭 병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들이 싫지 않았다. 도리어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해도 좋으니, 다정한 그를 아주 오래도록 마주하고 싶었다.

    이벨리아는 한참이나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일깨운 건 리우리안의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조금 전까지 혼자하고 있던 생각을 그에게 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하게 둥둥 뛰었다.

    “그런데 전하, 말씀도 없이 태자비궁엔 어쩐 일이세요?”

    이벨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제 생각을 들켜 그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큰 의미 없이 건넨 질문에 그가 어울리지 않게 연신 머뭇거렸다. 그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니, 의아한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했다.

    그녀는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온 건 아닌 듯했다. 그는 한참이 더 지나서야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그대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잠깐 들렀어.”

    “주고, 싶은 것이요?”

    이벨리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줄곧 한쪽 손을 너른 등 뒤로 감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손에 제게 주고 싶은 무언가가 들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벨리아는 잠잠히 그가 제게 감춘 손을 보여 주길 기다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는데, 그의 손을 보기까진 더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앞에 내민 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전하, 이게…….”

    이벨리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건 투박하게 꺾인 벚나무 가지였다.

    “그대가 좋아하는 벚나무 가지를 조금 꺾어 왔어.”

    그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벨리아는 그가 내민 벚나무 가지를 쉬이 건네받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왜 제게 이걸 주고 싶어 하는 건지, 그의 마음이 읽히지 않았다.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곧 이어진 그의 말에 이벨리아가 단박에 고개를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냐고? 아니, 절대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여서 문제였다.

    벚나무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더욱이 그것을 건네는 이가 다름 아닌 그인데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마음에 들지 않기는커녕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벚나무를 좋아한다는 걸, 그가 어떻게 안 것일까.

    “전하…… 어떻게 아셨어요?”

    “무엇을 말이지?”

    “제가 벚나무를 좋아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벨리아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그의 눈동자가 옅게 진동했다.

    그 별거 아닌 떨림이 제법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잠깐도 리우리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쉬이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럴수록 이벨리아의 마음은 더욱이 기대에 차올랐다.

    그녀는 태자비가 된 이후 누구에게도 제 꽃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저 연분홍 꽃잎이 화사하게 피는 계절이 찾아오면 아무도 모르게 눈에 담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그가 보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런 게 아니고서는 제 취향에 대해 알고 있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냥…….”

    “…….”

    “왠지 그대가 좋아할 것 같단 느낌이 들더군.”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렇게 대답했다. 결코 그녀가 기다리던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실망스럽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느낌은 ‘그냥’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정확히 그녀의 취향을 알고 가져왔단 맹목적인 확신이 밀려왔다.

    무엇에서 비롯된 확신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꼭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그녀 역시 ‘그냥’이었다.

    “감사해요, 전하.”

    이벨리아는 조금은 늦어 버린 타이밍에 벚나무 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도 그는 흔쾌히 그녀에게 가지를 건네주었다.

    그 찰나의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남녀의 손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어쩌면 스쳤단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를 사소한 접촉이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애틋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의 진심을 느끼기엔 조금도 짧지 않은 접촉이었다. 아니, 더없이 충분했다. 그래서 그녀는 온전히 행복한 마음으로 힘껏 웃을 수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달콤하면서도 싱그러운 벚나무 꽃향기를 가득 싣고 있었다.

    이벨리아는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숨에 이 순간 느낀 행복을 가득 담아 길게 내쉬었다. 그렇게 제게로 불어온 바람결에 오늘의 행복을 한 아름 실어 보냈다.

    그러곤 간절히 바랐다. 부디 연분홍 꽃이 피는 다음 계절과 함께 오늘 실어 보낸 행복도 함께 돌아오기를.

    그렇게만 된다면 그가 다시 그녀를 다정하게 봐 주지 않는다고 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또다시 그를 혼자 사랑해야 한다고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녀의 마음에 잔인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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