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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벚나무 아래 (38/94)


  • 38화. 벚나무 아래
    2023.07.08.


    황제와의 알현을 마무리하고 나온 칼리프는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오늘도 여지없이 빽빽한 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황제와의 일정까지 무사하게 소화했지만, 아직 레탄 후작과의 만남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제국 안팎에서 최고라고 소문난 정보상의 숨겨진 주인이었다. 제 사람으로 만들어 둔다면 훗날 이벨리아의 눈과 귀가 되어 줄 사람이었다.

    칼리프는 그와 나누어야 될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황후의 사람인 그는 몬트롤 백작과는 달리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제국 내 구석구석 숨어 있는 정보는 물론 외교 사정까지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자이다 보니 어지간한 눈속임엔 넘어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칼리프는 호흡을 고르며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찰나, 향기로운 꽃내음이 그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

    자리에 멈춰 선 그는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장렬히 지고 있는 태양 바로 아래, 벚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별거 아닌 장면일 뿐인데,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 이벨리아와 자신이 함께 어울려 놀던 시절이었다.

    지금보다 키가 훨씬 작았던 시절의 이벨리아는 종종 그의 볼을 어루만지며 속상한 표정을 짓곤 했다. 아래로 축 처진 눈꼬리와 삐쭉 나온 입술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그럴 때마다 칼리프는 대답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이벨리아에게 시선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연분홍 드레스를 입고 나온 이벨리아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벚나무 아래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넋을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꽃이고 무엇이 사람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이벨리아가 자신의 팔을 잡고 흔들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넋을 놓고 있었을 터였다.

    [칼, 너는 왜 매일같이 얼굴에 멍을 달고 있으면서 아프단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아?]

    [별로 아프지 않으니까.]

    [어째서? 여긴 빨갛고 여긴 파래. 다 너무 아파 보이는 색이란 말이야.]

    [……맞을 땐 아팠는데,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아. 괜찮아.]

    어린 칼리프는 표정 한번 찡그리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말 아프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배를 잘못 맞아 며칠이나 꼼짝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때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두 다리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이 정도 멍 자국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문제였던 걸까? 느닷없이 이벨리아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칼리프는 순간 돌처럼 굳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꽃처럼 웃기만 하던 이브인데, 전부 다 제 잘못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까 아픈 게 맞는 거 같아. 조금 아니, 조금보다는 더 많이 아파. 응. 나, 아파. 아픈 것 같아.]

    칼리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아프지 않다는 말을 듣고 울기 시작했으니, 아프다고 말을 바꾸면 금세 눈물을 그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벨리아의 울음소리는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흐어엉, 많이 아파?]

    유리알 같은 눈물이 더욱 빠른 속도로 그녀의 볼 위를 적셨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프지 않다고 했을 때도, 다시 아프다고 말을 바꿨을 때도 그가 바란 건 하나였다. 그녀가 울지 않길 바랐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 될까? 그럼 이벨리아가 눈물을 그칠까?

    [사실은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정말 안 아파.]

    [얼굴이 이렇게 알록달록한데 어떻게 하나도 안 아플 수가 있어, 이 멍청아! 흐아아앙.]

    이벨리아가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욱 큰 소리로 울었다.

    칼리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한 번도 누군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생활 반경이라고 해 봐야 집과 그 근처가 전부인 그는 이벨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친구랄 것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땐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는 건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미안해, 이브. 내가 잘못했어.]

    칼리프는 뒷걸음질 쳤던 만큼 이벨리아를 향해 성큼 다가가 기계적인 사과를 건넸다. 여전히 이벨리아가 우는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제 말에 이벨리아가 울기 시작했다는 거고, 그러니 뭐가 됐든 제 잘못이 맞았다. 칼리프는 어서 이벨리아가 울음을 멈추고 제 사과를 받아 주길 바랐다. 서럽게 우는 이벨리아가 다시는 자신을 만나 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이 바보야, 네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사과를 해?]

    [뭐가 됐든 다. 전부 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이브.]

    칼리프는 잘못했다는 말을 기계처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벨리아의 눈물만 멈출 수 있다면 이깟 미안하단 말쯤이야 백번도 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잘못된 모양이었다. 이벨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칼,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아니야.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아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기계처럼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이벨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제야 칼리프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럼 왜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너는 왜…….

    [……그럼 왜 이렇게까지 우는 거야?]

    [그거야……!]

    이벨리아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그녀를 서럽게 울렸다가 무엇이 또 그녀를 이토록 화나게 한 걸까.

    칼리프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그녀가 더는 울지 않는다는 거였다.

    [칼, 나는 있지, 네 얼굴이 지금처럼 알록달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벨리아는 한참 만에야 애끓는 눈으로 칼리프를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아프면 아프다고 그냥 편하게 말했으면 좋겠어.]

    [그치만 난 정말 아프지 않은데…….]

    칼리프가 그 말을 뱉기 무섭게 이벨리아는 퍼렇게 멍든 칼리프의 입술 끝을 힘주어 꾹 눌렀다.

    [아야…….]

    칼리프의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에 이벨리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떨고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그를 응시했다.

    [너 방금 소리 냈지? 그거 아파서 그런 거야. 넌 아픈 게 맞아. 그래서 소리를 낸 거라고.]

    […….]

    [얼굴이 이렇게 빨갛고 파란데 어떻게 아프지 않다고 할 수가 있어?]

    이벨리아가 눈매를 사선 아래로 내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추측은 곧 강한 확신이 되었다. 그녀가 제 볼을 감싸고 있던 따뜻한 손을 매정하게 거둬 가 버렸다.

    칼리프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무작정 그녀의 손을 다시 제 볼 위에 가져다 대었다.

    떨어지기 싫었다. 조금만 더, 그녀가 자신을 어루만져 주었으면 했다. 그 마음을 가득 담아 간절하게 그녀를 보았다.

    잔뜩 화가 나서 이번에도 단숨에 손을 거둬 갈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나직이 한숨만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화가 완전히 풀어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칼리프는 열심히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는 동안 그녀가 마음이 바뀌어 다시 등을 돌리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을 향해 포근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벨리아가 좋아할 만한 바람이었다.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그녀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에도 개의치 않고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바람에 흔들린 벚나무 가지가 꽃잎을 우수수 쏟아 냈다. 연분홍 꽃잎이 살랑살랑 춤을 추다 이내 그녀의 볼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칼리프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그녀의 볼에서 꽃잎을 떼어 냈다. 아무렇게나 버릴까 하다가 어쩐지 이걸 건네면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벨리아는 벚꽃이 가장 좋다고 했으니까.

    그는 그녀의 앞으로 꽃잎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아니었나, 칼리프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그녀가 작게 속삭여 왔다.

    [칼, 나는 있지…….]

    […….]

    [네 얼굴이 이 벚꽃잎 색으로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한 이벨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꽃잎을 향해 있었다.

    칼리프는 그날 이벨리아가 했던 말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년이 더 흐르고 나서야 모두가 저처럼 매일 밤 매를 맞고 살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날 이벨리아가 제게 했던 말은 매일 시퍼런 멍을 달고 사는 제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걱정이자 위로였던 것이다.

    “……저건 기억해 주려나.”

    상념에서 빠져나와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퍽 애달팠다.

    곧 있을 레탄 후작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는데 쉬이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발끝에 힘을 주었다 빼길 몇 번이나 더 반복하고 나서야 칼리프는 등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를 향해 명을 내렸다.

    “갑자기 다른 일이 생각났어. 미안하지만, 경이 먼저 가서 레탄 후작에게 사정을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예, 전하. 후작께 무어라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폐하와의 자리가 길어진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호위 기사는 우직한 성품답게 군말 없이 움직였다. 그제야 칼리프는 떨어질 줄 모르던 걸음을 가뿐하게 떼었다. 발끝이 향하는 방향은 벚나무가 있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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