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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슬픈 미소 (37/94)


  • 37화. 슬픈 미소
    2023.07.07.


    “정말 놀라워요, 디아나!”

    디아나를 마주한 이래로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가장 생기 있게 빛났다. 그 반응까지도 디아나는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제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귀 기울여 주신 분도 전하께서 처음이란 거 아세요?”

    “말도 안 돼요. 이렇게 흥미로운데, 아무도 디아나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벨리아는 진정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은 전하의 말씀처럼 오래된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하니까요.”

    “전혀요. 디아나에게 방해가 되는 것만 아니라면 더 듣고 싶어요. 정말 흥미로워요.”

    “그럼 조금 더 얘기해 드릴까요?”

    “디아나만 괜찮다면요!”

    이벨리아의 대답에 디아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테이블을 가운데에 둔 두 여인의 대화는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노을이 질 때까지도 이어졌다.

    “와, 디아나 정말 대단해요. 머릿속에 역사서 수백 권이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아요. 당장 고고학자로 나서도 전혀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이벨리아는 디아나를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역사서를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역사의 커다란 줄기는 물론 그것들을 잇는 사소한 내용들까지 완벽하게 꿰고 있었다.

    게다가 설명하는 실력은 어찌나 뛰어난지 이벨리아는 디아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단 한 번도 지루하단 느낌을 받지 못했다.

    도리어 더 남은 이야기는 없을까, 애가 탈 지경이었다.

    “과찬이세요, 전하. 열심히 공부한 건 맞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부족하다니요. 지금도 너무 훌륭한 걸요?”

    “트리탄 왕조에 대해선 제법 많은 책을 읽긴 했지만, 트리탄 왕국의 시대적 배경이나 다름없는 정확한 문명에 대해선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아요. 특히 신전에 관해서는 무지한 수준이고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신전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죠?”

    이벨리아는 전혀 지치지 않은 얼굴로 상체를 당겨 앉았다. 그 모습이 자못 귀여워 디아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전에 대한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관련한 서적을 열심히 찾아봤는데, 북부에서 찾은 몇 권을 빼면 남아 있는 게 전혀 없다시피 하더라고요. 그러다 듣게 된 소문이 황궁 도서관엔 쓸 만한 자료가 꽤 많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전하께 부탁드리게 된 거고요.”

    “아, 그래서…….”

    이벨리아는 디아나가 골랐던 책등의 제목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트리탄 고고학》,《신전의 기원》,《트리탄은 왜 멸망하였는가?》, 《트리탄의 수호신》

    그러고 보니 하나 같이 트리탄의 문명을 암시하는 제목들이었다.

    “이 책들이 디아나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죠! 그간 찾았던 책은 물론 처음 보는 책도 많아요. 황궁 도서관에 이런 보물들이 잠들어 있을 거라곤 정말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디아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구열 높은 그녀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된 듯해 이벨리아는 괜스레 뿌듯해졌다.

    “앞으로도 도서관에 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정말요?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대신 그때마다 내게도 트리탄 왕국에 대해 조금씩 얘기해 줄 수 있겠어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전하!”

    디아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누군가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었다는 생각에 덩달아 이벨리아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때 내도록 조용하던 도서관의 문이 살며시 열렸다. 그 사이로 나타난 건 페일린이었다.

    “전하. 오늘은 이만 태자비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점심도 거르셨잖아요. 저녁은 꼭 챙기셔야 해요.”

    페일린이 퍽 난감한 얼굴로 재촉했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시간이 꽤 지났음을 깨달았다. 페일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디아나를 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나한테 이야기해 주느라 책은 한 글자도 못 봤으니, 이걸 어쩌죠?”

    “괜찮아요. 전하께서 언제든 와도 좋다고 해 주셨잖아요.”

    디아나는 구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이벨리아는 미안한 기색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로 디아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

    다음 날 오후.

    “남부에 있는 광산?”

    가드로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다 말고 눈매를 날카로이 치켜떴다. 리우리안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은 결국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제국이 입은 재정적 피해는 물론 제국에 충성을 바친 수많은 기사의 안타까운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아니, 틀린 구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가드로는 여전히 날 선 눈으로 리우리안을 바라보았지만, 속으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언제나 유스티아에게 휘둘리며 얼간이처럼 굴기만 하더니. 리우리안을 지켜본 이래로 이토록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았던 적이 없었다.

    가드로는 침음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아들과 좀 더 대화를 나누며 그 생각을 읽어 보고 싶다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꼭 그 대가가 남부에 있는 광산이어야만 하는 게냐?”

    “그 광산만큼 적당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리우리안답지 않은 확고한 대답이었다. 가드로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되물었다.

    “이유는?”

    “그 광산은 엘리아 왕국과 수도 없이 접전하며 뺏고 빼앗겼던 광산입니다. 그들이 그 광산에 그토록 목을 맸던 데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이유라……. 짐작 가는 것은 있고?”

    “단순하게만 놓고 보아도 그들이 남부에 있는 광산에 집착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엘리아 왕국의 영토는 대부분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광산이라곤 국경에 걸쳐 있는 그 광산 하나뿐이지요. 더욱이 그 광산에서 채굴되는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엄청나니 그들의 입장에선 쉬이 포기할 수 없었을 겁니다.”

    가드로의 표정이 속절없이 이지러졌다. 리우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논리적이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뜻대로 하라 윤허하기에 충분했지만, 가드로는 좀 더 아들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렇다고 하여 전쟁으로 인해 타격받은 국고를 채울 수는 없지 않겠느냐. 광산의 소유주는 몬트롤 백작이고, 그런 이상 결국 백작의 잇속만 챙기게 할 뿐일 텐데.”

    “온전한 광산을 소유하여 가장 먼저 잇속을 챙기게 되는 것은 백작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백작이 거둬들이는 수익이 커진다는 건 결국 제국에 환납해야 하는 세금 역시 늘어날 것을 의미하겠지요.”

    리우리안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문득 백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제게 수익의 40퍼센트를 약속하면서까지 광산의 온전한 소유권을 원할 정도로 탐욕스러웠지만, 그에 따라 늘어나는 책임까지 헤아릴 정도로 똑똑한 자는 되지 못했다.

    아마 눈앞에 놓인 이득만을 좇느라 추후 부과될 세금에 대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날 이후 자신과 마주할 때마다 아둔하게 웃는 꼴만 보아도 확실했다.

    딴에는 자신과 한배를 탔다는 생각에 보내는 신호일 테지만, 리우리안에게 몬트롤 백작은 그저 이용 가치가 충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게 정말 네가 결정한 일이란 말이냐.”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기어이 가드로가 놀란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고작 이 정도에 놀라는 황제의 얼굴이라니. 그간 진짜 황태자가 얼마나 얼간이처럼 살았던 건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칼리프는 속내를 감추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지난했던 전쟁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정석의 대답이었다. 가드로의 성정을 고려해 고르고 고른 대답이기도 했다.

    그는 이어진 침묵을 여유롭게 음미하며 곧 떨어질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뜻대로 하거라.”

    가드로가 흔쾌히 허락했다. 무척 달가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칼리프는 감정을 억누르며 마지막까지 리우리안을 연기하는 데에 집중했다.

    “……정말이십니까.”

    “이번 전쟁과 관련한 문제의 결정권은 전부 네게 일임하겠다 하지 않았느냐. 네 생각대로 잘 마무리해 보거라.”

    “아버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정답과 같은 대답을 내놓으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황제에게 볼일은 끝이었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리곤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가드로는 아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참으로 오래도 기다렸구나. 네가 이토록 장성하기만을…… 큽!”

    아련하게 속삭이던 그가 별안간 단전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날카로운 호흡을 참지 못하고 기침을 토했다. 한번 터진 기침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고약했다.

    한참 만에 안정을 되찾은 그는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곤 간신히 숨을 골랐다. 순간 그의 시야에 붉은 선혈이 들어왔다. 머릿속이 정지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다행이란 말만이 계속해서 입 안을 맴돌았다. 제 몸이 아들의 성장을 기다려 주어 다행일 따름이라고.

    “……때가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야.”

    나직이 속삭인 그가 조금 전 아들이 나갔던 알현실의 문을 애틋하게 응시했다. 아들을 향해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눈길이었다.

    그는 한참을 더 자리를 지킨 후에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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