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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트리탄 왕국 (36/94)


  • 36화. 트리탄 왕국
    2023.07.06.


    “전하!”

    “어서 와요, 디아나.”

    이벨리아는 막 태자비궁 입구로 들어서는 디아나를 다정하게 반겨 주었다. 디아나는 며칠 전 보았던 해맑은 모습 그대로였다.

    “어찌 여기까지 나와 계세요? 설마 저를 마중 나오시기라도 한 건가요?”

    디아나는 상기된 얼굴로 두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아직 대답을 하기도 전인데 잔뜩 감동을 받은 얼굴이었다.

    “마침 영애를 만날 준비가 끝나기도 했고, 영애가 곧 도착할 것 같기도 하여…….”

    “전하, 너무 감동이에요. 이러지 않으셔도 제가 서둘러 찾아뵈었을 텐데, 저를 위해 입구까지 귀한 걸음을 해 주셨다니요!”

    이벨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디아나가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벨리아는 그런 디아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해맑은 모습이 참 보기 좋긴 하지만, 이럴 때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일단은 응접실로 갈까요? 영애가 보내 준 홍차를 준비해 뒀답니다.”

    “어머, 홍차는 입맛에 맞으셨나요? 향이 너무 좋아, 전하 생각이 나서 바로 보낸 것인데, 전하께선 어떠셨을지 모르겠어요.”

    “나 역시 입맛에 너무 잘 맞았어요. 근래 마셔 본 홍차 중에 제일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향이 좋던 걸요?”

    “정말요? 그 정도로 입맛에 맞으셨다니 너무 기뻐요, 전하.”

    디아나가 볼을 감싸 쥐며 수줍게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열렬한 애정으로 가득한 그 눈길이 퍽 부담스러워 이벨리아는 서둘러 입술을 움직였다.

    “우선은 응접실로 갈까요?”

    “네! 좋아요, 전하.”

    이벨리아는 싱긋 웃어 보이곤 앞장서 걸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향긋한 홍차 향이 두 사람을 가장 먼저 반겨 주었다.

    이벨리아는 디아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어서 앉아요, 디아나. 디저트는 지난번에 디아나가 좋아하던 것들 위주로 준비해 봤어요.”

    “전하께서 절 위해 준비해 주신 거라면 그게 뭐든 전 다 좋아요.”

    디아나는 고민의 기색도 없이 곧장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뭐라고 이벨리아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향긋한 향과 함께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 나서야 그녀를 향해 물었다.

    “디아나, 내게 하고 싶다는 부탁은 무엇인가요?”

    “아, 전하. 그게…….”

    디아나는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이벨리아는 무슨 부탁일까 궁금해하면서 그녀의 대답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어떤 내용의 부탁이든 되도록 들어줄 생각이었다. 태자비가 되고 처음으로 생긴 친우이자 자신을 이토록 좋아해 주는 디아나에게 그 정도 아량은 베풀고 싶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한참이 지나도록 말문을 떼지 못했다.

    “디아나, 괜찮으니 편하게 이야기해요.”

    “그게……. 황궁 안에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가 보고 싶은 곳이요?”

    “네. 황궁엔 황실 일원들만을 위한 도서관이 있다고 하던데…….”

    이벨리아는 동그랗게 뜬 눈을 빠르게 끔벅였다. 황실 일원들만을 위한 도서관이라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황궁 도서관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설마 그게 부탁인 건가?

    “그러니까 황궁 도서관에 가 보고 싶다는 말인가요?”

    “……네. 그곳은 황실 일원과의 동행이 아니면 외부인은 출입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디아나가 소심하게 눈치를 살폈다. 전혀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황실 도서관에 함께 가는 것이 부탁이라면 전혀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이벨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요.”

    “정말이세요?”

    “물론이죠. 언제가 좋겠어요? 디아나가 원하는 시간을 말해 주면…….”

    “지금 당장도 괜찮을까요?!”

    별안간 디아나가 상체를 확 당겨 앉으며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냈다. 너무 격렬한 반응에 화들짝 놀란 이벨리아가 겨우 대답했다.

    “영애가 원한다면 물론 지금도 가능하지만…….”

    “그럼 지금 함께 가 주시면 안 될까요?”

    디아나는 좀처럼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벨리아가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을 땐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고작 도서관에 동행하는 것에 이토록 행복해하다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는 페일린에게 행선지를 알린 후 디아나와 함께 태자비궁을 나섰다. 멀지 않은 도서관에 도착하기까지, 디아나는 줄곧 설레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디아나는 도서관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홀린 듯 책 앞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뒤를 이벨리아가 서둘러 쫓았다.

    “책에 이렇게까지 관심이 많을 줄 몰랐어요.”

    워낙 해맑은 모습만 보인 그녀였기에 이런 정적인 취미보다는 또래의 영애들과 함께하는 사교 자리를 즐길 줄로만 알았다.

    “책 속엔 없는 것이 없어요. 사소한 잡지식부터 수백 년,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까지 모든 게 담겨 있어요.”

    디아나는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책등을 빠르게 훑으며 대답했다. 어찌나 집중한 모습인지, 이벨리아는 선뜻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곧 책 몇 권을 고른 디아나가 도서관 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책에 집중한 나머지 디아나는 이벨리아를 잊은 듯 보였다. 이벨리아는 그 모습에 기분이 상하기보다는 그저 신기했다. 책에 이렇게까지 몰두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말이다.

    “정말 엄청나요. 이 책을 구하려고 제국의 서점이란 서점은 다 찾아다닌 것 같은데.”

    디아나는 책 한 권을 펼치며 중얼거렸다. 이벨리아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보다는 테이블 위에 쌓인 책들의 제목을 살폈다.

    《트리탄 고고학》,《신전의 기원》,《트리탄은 왜 멸망하였는가?》, 《트리탄의 수호신》

    그 외에도 몇 권의 책이 더 있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트리탄’과 ‘신전’에 관한 서적이란 거였다.

    “트리탄이라면 설마 고대에 존재했던 왕국을 말하는 건가요?”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책에 빠져 있던 디아나가 일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전하께서도 트리탄을 알고 계신가요?”

    휘둥그레진 눈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이벨리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잘 아는 건 아니고, 어릴 때 책에서 봤던 기억이 나서요.”

    “세상에! 어릴 때부터 이런 서적에 관심이 있으셨다니! 이런 역사서는 보통 고리타분하게만 여겨지잖아요.”

    “아,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럼 역시 전하께서도 신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으신 걸까요?”

    “신전……이요?”

    이벨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트리탄 왕국에 대한 서적을 어릴 때 보았던 기억은 있지만, 그뿐이었다. 의문을 품었다거나, 디아나처럼 열정적으로 탐구한 적은 없었다.

    “그냥 책에서 가볍게 본 게 다예요. 트리탄 왕국에 대해서도 신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진 못해요.”

    이벨리아는 민망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답했다. 그럼에도 디아나의 적극적인 기세는 잦아들지 않았다.

    “알고 계신 거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세요. 보통은 트리탄 왕국의 존재조차 모르거든요. 제게 트리탄이 고대에 존재했던 왕국이냐고 물었던 사람은 전하가 처음이세요.”

    “워낙 고대 왕국이다 보니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리탄 왕국은 연구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트리탄의 끝은 발체로페의 시작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트리탄 왕국 멸망 후에 제국이 세워졌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사이의 공백이 꽤나 길지 않았던가요?”

    이벨리아는 머릿속 귀퉁이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헤아려 보았다. 하지만 빛바랜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잠시 끙 하고 앓던 그녀가 결국 포기하곤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수백 년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맞아요. 추측 값이긴 하지만, 역사서에 의하면 발체로페는 트리탄 멸망 이후 642년이 지난 후에 건국되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트리탄 왕국의 끝이 발체로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전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해요. 왕국이 멸망한 건 맞지만, 그걸 트리탄 국민들이 전부 죽었다는 의미로 볼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트리탄 왕국의 멸망과 발체로페의 건국 사이엔 642년이란 공백이 있잖아요. 트리탄 멸망 당시 국민들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멸망한 왕국의 황폐해진 자리를 642년간 지키지 못했을 거예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선대가 후대에게, 후대가 또 그 후대에게 기록으로 남겼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 않을까요?”

    디아나가 펼쳤던 책까지 덮곤 이벨리아를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기록의 증거물로 초대 황제께서 남기신 유품이 있다고도 들었어요.”

    “유품이요?”

    이벨리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역사 속 왕국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라 퍽 흥미가 돋았다.

    “아마 황궁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초대 황제 폐하의 유품 중 낡은 지도가 있었다고 해요. 과거에는 트리탄 왕국의 위치이자 지금은 제국의 위치라고 볼 수 있는 자리에 정확한 표식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선대 황제들이 남긴 유품들에 대해 정리한 책에서 본 것이니, 아마 정확할 거예요.”

    이벨리아는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황궁 안에 선대 황제들이 남긴 유품들을 보관해 놓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그 물품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디아나의 말처럼 그런 지도가 정말 존재하는 거라면…….

    “그 지도가 트리탄 왕국의 선조들이 남긴 기록이라면, 어쩌면 초대 황제 폐하의 뿌리는 트리탄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저는 물론 전하께서도 트리탄의 후손인 셈이 될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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