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 아이의 이름
(35/94)
35화. 그 아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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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그 아이의 이름
2023.07.05.
에드윅이 미간을 좁히며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네 이름을 말한다고 하여 추후에 이번 일로 너를 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약속하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제 딸을 업고 왔던 남루한 차림의 남자아이는 궁에 있는 황제의 아드님과 너무도 똑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칼리프.]
그래, 분명 칼리프라고 했었다.
“칼리프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를 찾아보면 좋을 것 같구나.”
에드윅은 망설임 없이 그 이름을 레이튼에게 전했다. 그러자 레이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걸음을 뒤로 물렸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에드윅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충성스러운 기사는 곧 소리도 없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제야 에드윅은 참았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가로 향했다.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냈을 뿐인데 걷잡을 수 없이 속이 시끄러워졌다.
밤하늘 한가운데에 박힌 달이 야속하리만치 선명했다. 그 위로 과거에 보았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부디 괜한 기우여야 할 터인데.”
나직이 중얼거린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
이른 아침, 칼리프는 옷시중을 받기 무섭게 테이블 앞에 앉아 투명한 그릇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그 꼴을 하고 있을 작정이지?”
팔짱을 끼고 미간을 좁힌 폼이 불만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럴수록 햄스터의 모습을 한 펠릭스는 작은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요한 생각 중이라고 몇 번이나 얘기하지 않았는가.
“퍽이나 그렇겠군.”
-왜, 조잡한 능력 몇 가지를 가졌을 뿐인 나는 중요한 생각도 하면 안 되는 건가?
작은 원 모양의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펠릭스가 울컥한 얼굴로 속엣말을 와다다 쏟아 내었다.
칼리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침부터 별꼴을 다 보겠군. 설마 그 말에 삐치기라도 했다는 건가?”
-사람 마음에 대못을 박아 놓고 말하는 본새하고는!
돌아온 대답이 새침하기 그지없었다.
칼리프는 미간을 팍 구겼다. 이벨리아를 봐서라도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 꼴같잖은 짓은 이쯤에서 그만두지 그래. 내게 말도 없이 이벨리아를 찾아간 건 네가 아니었나?”
-누, 누가 뭐라고 했는가? 나는 분명 중요한 생각 중이라고……!
“내가 왜 어제 침실에 돌아온 후에도 너를 찾지도, 그 일을 문제 삼지도 않았다고 생각하지?”
-그, 그거야……!
“이벨리아와 함께 있으면서 좋았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이유는 그뿐이야.”
그러니 이제라도 어제의 일을 문제 삼기 전에 더 이상 제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칼리프는 매서운 경고를 말로, 눈빛으로, 표정으로 전했다. 그제야 펠릭스가 칼리프의 눈치를 살피며 햄스터 집에서 슬슬 기어 나왔다. 그러곤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곧 푸른 기운이 햄스터의 작은 몸을 가득 감쌌다. 작은 빛은 곧 빛무리가 되었고, 섬광처럼 폭발하듯 밝아졌다.
칼리프는 익숙한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창가에 걸터앉아 있는 펠릭스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는 평소처럼 뻔뻔하게 웃고 있었지만, 억지로 끌어올린 듯한 입꼬리는 불편하게 달달 떨리고 있었다. 단박에 불쾌감이 밀려오는 더러운 표정이었다.
칼리프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정말 별꼴을 다 보겠군.”
매정하게 그 한마디만을 내뱉곤 칼리프는 진저리를 치며 서둘러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어떤 식으로든 그의 화를 피하는 게 펠릭스의 목적이었다면 대성공이었다.
칼리프가 나가고 난 침실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그제야 펠릭스는 테이블 의자에 편히 앉았다.
그는 언제 미소 지었냐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참았던 숨이 쏟아져 나왔다. 칼리프 앞에선 장난인 척 새침하게 말했지만, 줄곧 머리 아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제의 일 때문이었다.
“……도대체 뭐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혼란에 절어 있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손끝엔 어제 느꼈던 감촉이 선명했다.
[나도 두 사람 산책에 끼워 줬으면 좋겠는데.]
산책을 나서려던 두 사람에게 동행을 청한 건 그저 눈치 없이 한 말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칼리프의 등장으로 확인하지 못한 답을 찾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단호한 칼리프의 거절은 그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돼 주었다. 포악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던 그의 행동을 핑계로 이벨리아의 어깨에 자연스레 오를 수 있었으니까.
펠릭스는 언제 날아올지 모를 칼리프의 손을 경계하면서도 그녀의 몸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을지 모를 신성력을 찾기 위해 온정신을 모았다.
한참을 그녀의 어깨에 납작 붙어 있고 나서야 겨우 미약한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결코 그가 기대했던 힘은 아니었다.
그녀가 쓰러졌던 날 밤, 칼리프가 보는 앞에서 주입했던 제 힘이 아직 잔류하고 있다면 딱 그 정도였을 터였다.
펠릭스는 묘한 실망감에 미간을 구겼다. 칼리프의 미움까지 사며 억지로 끼어들었는데 결과가 너무 허무했다. 궁금했던 답도 얻었으니, 더는 두 사람의 데이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빠질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펠릭스는 믿을 수 없는 기운을 감지하게 되었다. 별안간 칼리프가 짓궂은 표정으로 제게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그럼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보지 그래. 넌 마법사인가? 이벨리아의 말대로 이제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 존재야?]
[……정말 곤란한 질문이군.]
난감한 척했지만 사실 그는 지루한 산책을 끝낼 틈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운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마법이 아닌가요? 그럼 대체 어떻게…….]
정확히는 이벨리아가 칼리프와 제 대화를 듣고 혼란해하며 중얼거렸을 때였다.
줄곧 제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던 그녀가 어깨에 감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생경한 기운이 펠릭스를 덮쳤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다시금 이벨리아에게 집중했을 뿐인데, 그녀에게 신성력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당황해 정신을 집중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처음 겪는 일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순간, 이벨리아에게 흘러가던 신성력이 멈추더니 곧 어마어마한 양의 힘이 몸속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정확하진 않아도 다시 돌아온 힘이 족히 배는 될 것 같았는데…….”
펠릭스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칼리프처럼 신성력을 가진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었다.
습관처럼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가늘게 뜬 눈매 사이로 신비로운 푸른빛의 눈동자가 날렵하게 움직였다.
사소한 노력만으로도 태자비궁은 선명하게 보였다. 이벨리아의 시녀가 기쁜 얼굴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칼리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다시 그녀에게로 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제 차례가 아닌 듯싶었다.
펠릭스는 체념하며 한숨을 푸 내쉬었다. 마침 한잠도 이루지 못한 간밤의 피로가 몰려왔다.
***
“허, 페일린. 그게 다 뭐야?”
이벨리아는 막 침실에 들어온 페일린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에 띄는 드레스 몇 벌 챙겨 왔어요, 전하!”
“그냥 몇 벌이 아닌 거 같은데?”
이벨리아는 뒤뚱거리며 침대 앞으로 걸어가는 페일린을 급히 쫓았다. 한 아름 품에 안은 드레스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지 페일린은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시야를 확보했다.
페일린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된 건 그녀가 침대 위에 드레스를 전부 내려놓았을 때였다.
“죄송해요, 전하. 깔끔하게 준비해서 와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 그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데 이게 다 뭐야? 갑자기 드레스는 왜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야?”
이벨리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페일린을 보았다. 페일린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환하게 웃기만 했다.
“오늘 놀튼 영애님께서 아침 일찍 태자비궁에 방문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설마, 그것 때문에 이 많은 드레스를 가져온 거야?”
“태자비궁을 찾아 주시는 귀한 손님이신데, 전하께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맞아 주시면 더 좋지 않을까 하고요.”
주먹까지 옹골차게 말아 쥔 페일린이 의욕적으로 말했다. 디아나의 방문이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물론 저 역시 디아나가 반갑긴 하지만, 오늘 방문은 이렇게 꽃단장까지 하며 맞이할 일이 아닌 듯했다.
<전하께서 승낙해 주신다면 내일 오전에 찾아뵙고 싶어요. 전하가 그립기도 하고 긴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추신. 부탁드리고 싶은 것보단 전하를 뵙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크답니다.>
편지 말미에 자신을 만나고 싶어 그런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오늘 디아나의 방문 목적은 제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였다.
이벨리아는 눈썹을 위로 들썩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평소의 모습으로 디아나를 맞이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잔뜩 들뜬 페일린을 보고 있노라니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승전 파티가 있던 날, 리우리안이 자신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갈을 보내왔을 때만큼이나 들떠 있었다.
이벨리아는 그런 페일린을 보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오늘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체념의 숨을 내쉬는 일뿐인 듯했다.
이벨리아는 페일린의 손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