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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진심 어린 걱정 (34/94)


  • 34화. 진심 어린 걱정
    2023.07.04.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리우리안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펠릭스가 일순 고개를 홱 돌렸다.

    -……정말 곤란한 질문이군.

    그가 난감한 듯 중얼거리며 이벨리아의 목에 바짝 몸을 붙였다. 강렬하다 못해 맹렬하기까지 한 리우리안의 시선을 어떻게든 피하려는 몸짓 같았다.

    둘의 대화에 혼란해진 건 이 자리에 오직 이벨리아 뿐이었다.

    “마법이 아닌가요? 그럼 대체 어떻게…….”

    이벨리아는 눈을 빠르게 끔벅였다. 마법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마법이 아니면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햄스터로 변신을…….

    생각에 잠겨 있던 이벨리아는 별안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법과 관련한 서적에서 보았던 또 다른 구절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 책에 의하면 마법이 존재하던 시절엔 악령이라고 칭해지는 악한 기운이 공존했는데, 그들은 사람의 몸에 기생하거나 영혼을 갉아먹으며 세상에 혼란을 불러왔다고 했다.

    설마 펠릭스가…….

    이벨리아는 뻣뻣해진 고개를 돌려 리우리안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였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리우리안이 문득 피식거렸다.

    “나의 비께서 무척 겁에 질린 듯 보이는군. 그러니 이만 내려와, 펠릭스. 좋게 말로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반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 무척이나 다정한 음색을 타고 새어 나왔다. 이벨리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숨기고 있던 펠릭스가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펠릭스는 혹여나 리우리안에게 잡힐세라 짧은 다리를 황급히 놀렸다. 이벨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타고 땅으로 내려간 그는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나서야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방해꾼은 이만 사라져 줄 테니 즐거운 시간 보냈으면 좋겠군.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한 펠릭스가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너무 느닷없는 퇴장이었다.

    이벨리아는 펠릭스가 사라지는 광경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응접실에선 동행하겠다고 그토록 고집을 피우더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기이한 능력을 지니긴 했지만, 보다시피 그냥 얼간이일 뿐이야.”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의 퇴장과 군더더기 없이 잘 어울리는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리우리안의 친우일지도 모를 사람을 두고 너무 솔직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니까, 제가 방금 고개를 끄덕인 건…….”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거겠지.”

    “전하, 그게…….”

    “펠릭스가 나 몰래 그대에게 접근했다는 건 무척 언짢지만, 그대가 그런 마음으로 펠릭스를 대하고 있었다니 그것만큼은 마음에 드는군.”

    변명할 말을 고민하던 이벨리아가 일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자신을 보며 선명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 대조되는, 너무 따뜻한 미소에 순간 그녀는 멍해졌다.

    “그자가 혹 그대를 놀라게 한 일은 없었나? 갑자기 모습을 바꾸는 것 말고 말이야.”

    넋을 놓은 걸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그가 눈썹을 한데 모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마저도 너무 다정해서, 이벨리아는 그저 눈만 끔벅일 수밖에 없었다.

    “이벨리아?”

    그의 채근이 이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없었어요.”

    “그래, 그러면 됐어. 펠릭스가 그대를 해치는 일은 없을 테니 겁먹지 않아도 돼.”

    고작 그뿐인데, 이벨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야만 했다. 귓속에 와닿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달콤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내가 최선을 다해 그대를 지킬 테니 염려하지 마.”

    그가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대답은커녕 무언가를 열심히 참고 있는 사람처럼 꽉 쥔 주먹을 펼 수가 없었다.

    일순 두려움을 내비쳤다는 이유로, 그가 몇 번이고 다정한 말로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이벨리아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이벨리아는 빠르게 눈을 끔벅였다. 자꾸만 눈가에 열감이 몰렸다. 방심했다간 눈물이라도 머금을 것 같았다. 그런 속도 모르고 그가 그녀의 앞으로 손을 내밀어 왔다.

    “그대의 말처럼 정말 완벽하게 좋은 날이군. 그래서 말인데.”

    “…….”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이제 진짜 데이트를 해 볼까?”

    이벨리아는 제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눈물은 슬프고 힘들 때만 나는 건 줄 알았는데, 가슴이 너무 벅차서 울컥 눈물이 맺혔다. 그 벅찬 기분을 몇 번이고 되뇌며, 이벨리아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좋아요, 전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눈매를 곱게 휘어 접었다. 그러곤 그와 나란히 걸음을 떼었다.

    꿈만 같았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간절하게 바랐다.

    부디 오래도록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그와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기를.

    ***

    어둠이 깊은 밤, 에드윅은 서재 책상 앞을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전에 없이 머리가 복잡했다. 오전에 있었던 황태자와의 일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은밀히 자신을 찾아온 거로 모자라 제이드까지 찾을 줄이야. 더욱 놀라운 건 제이드까지 자리에 앉은 후 이어진 그의 말이었다.

    [후작은 물론 소후작까지, 제 사람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 전하께서 이른 아침부터 뭘 잘못 드신 모양이군요.]

    [제이드.]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아버지와 제 앞에서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에드윅은 단호한 시선으로 제이드를 만류했지만, 성정이 솔직한 아들은 한껏 흥분한 기색을 쉬이 감추지 못했다.

    원래라면 따끔하게 훈계라도 했을 테지만, 에드윅 역시 그럴 수가 없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제이드 못지않게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그간 이어진 황태자의 행실에 끊임없이 상처받았던 이벨리아를 떠올리면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제이드의 말처럼 어찌 감히 제 앞에서 힘이 되어 달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 건 유난히 올곧은 황태자의 눈빛 때문이었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전하.]

    에드윅은 마음을 가라앉히곤 차분히 물었다. 정확한 이유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벨리아를 누구도 감히 얕잡아 볼 수 없을 만큼 오롯한 황태자비로, 장차 제국의 완벽한 황후로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하!]

    황태자의 굳건한 태도에도 제이드는 거친 탄식을 참지 못했다. 에드윅에게 쓴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에드윅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황태자만 빤히 바라보았다. 에드윅의 눈동자가 폭풍 속의 격랑처럼 일렁였다.

    [그런 이유라면 몇 번이고 전하의 사람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다만, 제게 조금의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전하의 제안이 달갑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달라진 전하의 생각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드윅은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상대가 안하무인이던 예전의 황태자라면 몰라도 지금의 황태자라면 제 뜻을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믿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후작께서 필요한 게 그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라면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지켜보기 위함이라면 차라리 원하는 바를 말씀하셨으면 좋겠군요. 그런 식으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으니.]

    [전하를 지켜보기 위함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그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입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전하를 찾아뵙겠습니다.]

    에드윅은 마지막까지 정중하게 그를 대했다. 그러고 나서야 황태자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후작가를 나섰다.

    제이드가 무섭게 뒤를 쫓으며 조금 전의 일에 대해 따져 물었지만, 에드윅은 단호한 눈빛으로 저지하곤 곧장 서재로 향했다.

    그렇게 찾은 서재를 늦은 밤이 되도록 벗어날 수가 없었다. 창가에 선 에드윅은 환하게 떠오른 달을 빤히 바라보았다.

    “……올 때가 되었는데.”

    나직이 중얼거린 그가 침음을 흘렸다. 그때, 기다리던 노크 소리가 서재를 선명하게 울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레이튼이었다.

    “각하.”

    “그래. 왔구나, 레이튼.”

    에드윅은 예의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걸곤 서재 중앙에 놓인 소파로 향했다.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렀다.”

    “말씀하시지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 돌려 말하지 않으마. 영지에 다녀왔으면 좋겠구나.”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이튼이 처음으로 시선을 들어 후작을 보았다.

    “영지에 다녀오려면 적어도 닷새는 자리를 비워야 할 것입니다. 그럼 그동안 비 전하는…….”

    “이벨리아에겐 내가 잘 이야기해 두마. 사병들 훈련 문제 때문이라고 하면 충분히 이해할 게다.”

    “……알겠습니다.”

    레이튼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태자비의 호위까지 마다하고 해야 하는 일이라니, 후작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제가 영지로 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레이튼은 지체 없이 자신이 해야 할 몫을 물었다. 그러자 후작이 처음으로 망설이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튼, 이벨리아가 요양차 영지에 가 있었던 때를 기억하느냐.”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에 레이튼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제 주인이 영지로 요양을 갔을 때라면 자신이 운 좋게 후작가에 들어와 마구간 청소 일을 하던 시기였다.

    “예, 기억합니다.”

    “갑자기 이벨리아가 사라졌던 날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에드윅은 다행이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튼이 기억하고 있다니 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그날 이벨리아를 업고 왔던 남자아이를 찾아보아라. 그 아이의 이름이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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