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은밀한 행보 (31/94)


  • 31화. 은밀한 행보
    2023.07.01.


    에드윅은 뻣뻣하게 굳은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바삐 움직였다. 갑자기 찾아온 누군가로 인해 예정에 없던 일이 생긴 탓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위해 시중을 받던 때였다.

    [후작님,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부산을 떨며 침실로 들어온 집사장이 믿을 수 없는 말을 전해 왔다.

    에드윅은 옷에 팔을 꿰어 넣던 것도 잊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조금 전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와 후작님을 만나 뵙고 싶다 은밀히 청을 하셨습니다.]

    [……전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선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두 번을 듣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황태자가 누구이던가.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로 제 딸의 남편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라고 소문난 여자를 끼고돌며 제 딸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안하무인, 그게 바로 리우리안 페트로프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이른 아침, 후작저를 은밀히 찾아왔다니, 무슨 꿍꿍이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에드윅은 걸음에 더욱 속도를 더했다. 그간 겪었던 황태자의 횡포나 다름없는 행동들을 떠올리면 문전박대를 해도 모자랐지만, 어쨌든 그는 제 딸의 남편이었고 존경하는 황제의 아드님이었다.

    그것만으로 황태자를 만나 볼 이유는 충분히 있는 거라고, 에드윅은 합리화하듯 생각했다.

    어느덧 코앞에 응접실 입구가 보였다. 근처를 지나던 시종들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에드윅은 급히 응접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전하.”

    안으로 들어서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리우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익히 알고 있던 황태자의 이미지와는 퍽 다른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그게 묘한 긴장감을 일으켰지만, 에드윅은 우선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셨군요, 후작.”

    리우리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윅을 반겼다. 그 별거 아닌 모습에 순간 에드윅은 뼈마디가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이상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리우리안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더욱이 그의 입가에 걸린 온화한 미소는 느닷없는 행동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게 했다.

    에드윅의 눈동자가 엷게 흔들렸다. 하지만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황태자를 향해 단정한 걸음을 떼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후작께 미안하지요. 너무 이른 아침에 찾아와 놀라진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궁에서 저를 찾으셨어도 되었을 텐데, 이곳까지 직접 행차해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에드윅이 슬며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에 칼리프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대답은 물론 이어진 행동까지, 무엇 하나 신하 된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 없었다. 어지간한 마음가짐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자신을 리우리안이라고 생각할 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원망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인지.

    “이곳까진 무슨 일로 걸음 하셨는지요, 전하.”

    우직한 음성에서조차 다른 감정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칼리프는 순간 말을 잃은 채 에드윅을 빤히 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소싯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이벨리아는 내가 방으로 데리고 갈 테니 자네는 어서 의원을 불러오게.]

    열이 펄펄 끓는 이벨리아를 등에 업은 채 나타난 남루한 차림의 자신을 보고도 미간 한 번 구길 줄을 몰랐다.

    도리어 그는 딸을 소중히 품에 안고도 한동안 제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곤 마침 옆을 지나던 하녀를 붙잡아 명했다.

    [저 아이에게 옷 한 벌과 따뜻한 차를 내어 주거라. 비가 그칠 때까지 머무를 방도 하나 내어 주고.]

    칼리프는 그날의 에드윅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처음으로 받아 보는 어른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었다. 생소했지만 싫지 않았고, 그런 아버지를 둔 이벨리아가 부러웠다.

    “전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길어지는 침묵에 에드윅이 다시금 말을 붙였다.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온 칼리프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이 계신 거라면 편히 말씀하시지요.”

    “그런 것 아닙니다. 내가 후작을 찾아온 건 긴히 할 말이 있어섭니다.”

    고개를 내저은 칼리프가 후작저를 찾은 이유에 대해 운을 뗐다. 에드윅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반쯤 숙였다.

    “말씀하시지요, 전하.”

    “그러기 전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후작께서 잠시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군요.”

    에드윅은 연신 아래로 내리고 있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이벨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녹안엔 온통 의문이 가득했다. 하지만 칼리프는 작은 힌트도 주지 않았다.

    곧 기다리는 이가 도착할 터였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적막하던 응접실 안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동시에 적의로 가득한 시선이 칼리프를 향했다.

    “마침 왔네요.”

    “아니, 네가 여긴 왜…….”

    담담한 목소리와 당혹감에 젖은 음성이 한데 섞였다.

    “내가 불렀습니다.”

    칼리프가 간략하게나마 에드윅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그러곤 다시금 적의를 폴폴 풍기는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서 와요, 소후작.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이드 캐롤라인.

    이벨리아의 하나뿐인 오라버니이자, 캐롤라인 후작가의 차기 가주였다.

    ***

    “전하, 놀튼 영애께서 오전에 선물을 보내오셨어요. 홍차인 것 같은데 향이 무척 좋더라고요! 괜찮으시면 차를 올릴까 하는데, 어떠세요?”

    테이블 위를 정리하던 페일린이 갑자기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종알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허리를 편 그녀가 주인을 찾아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창가에 선 이벨리아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페일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벨리아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이벨리아가 고개를 들곤 페일린을 보았다.

    “응? 뭐, 뭐라고 했어, 페일린?”

    이벨리아가 퍽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페일린은 수상쩍은 기분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지만, 그러면서도 주인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오전에 놀튼 영애께서 향긋한 홍차를 선물로 보내오셨어요.”

    “디아나가?”

    “네. 괜찮으시면 차를 올릴까 하는데, 어떠세요?”

    “아…… 좋아. 그럼 준비는 응접실에 해 줄래?”

    “응접실에요? 혹시 오늘도 손님이 오시나요?”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페일린의 얼굴로 금세 화색이 돌았다. 이벨리아가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전하 혼자 응접실에서 차를 드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되묻는 페일린의 얼굴에 언뜻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럴 만도 했다. 태자비궁의 응접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 중 하나였으니까.

    이벨리아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로 굴리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어쩐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라…….”

    떠올린 핑계가 영 실속이 없었다. 페일린의 귀에도 이상하게 들렸는지, 시원시원한 눈매가 자꾸만 가늘어졌다.

    이벨리아는 지레 찔려 서둘러 입술을 달싹였다.

    “그, 그럼 준비 부탁할게, 페일린!”

    페일린은 쉬이 의문을 걷어 내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급히 창가로 향했다.

    “왜 또 왔어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틀 위였다. 정확히는 그 위에 앉아 태평하게 그루밍을 하고 있는 햄스터였다.

    “내 말 안 들려요? 여길 왜 온 거냐니까?”

    이벨리아는 연신 뒤를 살피면서도 펠릭스를 매섭게 다그쳤다. 그런데도 햄스터는 하품만 늘어지게 할 뿐이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뭘 그렇게까지 초조해하고 그래? 내가 오면 안 될 곳에라도 왔나?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하죠.”

    -왜? 태자비궁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기되어 있기라도 한 거야?

    햄스터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빠르게 눈을 끔벅였다. 바짝 약이 오를 정도로 얄미운 모습이었다.

    이벨리아는 미간을 팍 구긴 채 허리 위로 양손을 올렸다.

    “이봐요. 여기는 내 침실이에요. 난 그쪽 친우의 아내이고요.”

    -나도 알고 있어.

    “아는데도 이런다고요?”

    -그게 뭐가 문제지? 나는 그저 지나는 길에 잘 지내나 궁금해 잠시 들렀을 뿐이야. 순수한 의도로 방문한 거였다고. 그런데 이벨리아 네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매우 불순한 의도로 찾아왔다는 듯이 들리네.

    이벨리아는 입을 꾹 다물곤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기가 막혔다. 순수한 의도로 방문했다기엔 햄스터 꼴을 한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그토록 떳떳했다면 왜 정식 절차를 거쳐 본래의 모습으로 오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입 안 가득 차올랐지만, 이벨리아는 따져 묻는 대신 한숨만 푹 내쉬었다.

    옳은 소리를 한다고 귀담아들을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이치에 안 맞는 말대답을 듣지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이럴 땐 무시가 가장 좋은 답이었다.

    “좋을 대로 생각해요. 어쨌든 여긴 내 침실이고, 초대도 없이 불쑥 찾아온 그쪽은 불청객이나 다름없으니 이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요.”

    이벨리아는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대로 응접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등 뒤로 도도도도 하는 앙증맞은 걸음 소리가 따라붙었다.

    -어디 가?

    “돌아가 달란 내 말이 안 들리던가요?”

    -불청객도 손님은 손님인데, 이런 식으로 대우한다고?

    불청객도 손님은 손님이라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서곤 그를 향해 따져 물었다.

    “그럼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무례한 손님에게 어떤 대우를 해 드려야 하는 거죠?”

    제법 화난 듯 보이는 표정이 발밑의 작은 햄스터를 향했다. 펠릭스로선 처음 보는 이벨리아의 표정이었다. 그게 못내 난감하기만 한데, 그때 뜬금없는 노크 소리가 침실 안을 선명하게 울렸다.

    똑똑-

    당황한 건 펠릭스뿐만이 아니었다. 이벨리아가 황급히 뒤돌았다.

    “전하.”

    “페, 페일린.”

    “문 앞에 서서, 뭐 하세요?”

    놀란 이벨리아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변명의 말을 고민했다. 그때 드레스 끄트머리에서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으, 응접실로 가려던 길이었어. 지금쯤이면 준비가 됐을 것 같아서…….”

    이벨리아는 떠오르는 아무 말을 최대한 그럴싸한 투로 내뱉었다. 그러는 동시에 페일린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손바닥 위로 올라오라는, 펠릭스를 향한 신호였다.
     

    16882097021226.jpg

    1688209702123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