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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버림받은 아이 (30/94)


  • 30화. 버림받은 아이
    2023.06.30.


    “……예전에 얘기했던 그 계획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란 말인가?”

    “그래.”

    칼리프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펠릭스로선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매일 황태자의 침실만 지키는 것이 지루하던 참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계획을 시작한다니 생각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린 칼리프의 의중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우선은 달라진 황태자의 모습을 이벨리아가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그 말은 이제 이벨리아가 너를 받아들이기라도 했다는 거야?”

    “……어느 정도는.”

    허공만 정처 없이 바라보던 칼리프가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이벨리아와의 관계가 한결 수월해진 건 맞지만, 그녀에게 아무것도 털어놓지 못했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원래대로라면 이벨리가아 준비가 될 때까지 얼마든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사전에 충분한 눈속임을 했음에도 황후의 반응이 이토록 즉각적일 줄이야.

    물론 적당한 해명으로 당장의 의심은 거둬들였지만,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었다.

    이벨리아를 위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이상 황후는 매번 의심의 씨앗을 품을 것이고, 자신을 다그치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으면 결국 이벨리아에게까지 손을 뻗을 터였다.

    황후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선 당장 벌어질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황후와 그 일당들의 잔혹함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가까스로 황궁에 돌아온 첫 생애였을 것이다.

    그때의 그는 어떻게든 리우리안이 아니란 사실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십 번의 회귀를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만난 이벨리아였다. 그는 가능한 한 오래 이벨리아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소문이 자자했던 황태자의 방탕한 일상까지도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문란한 생활을 즐긴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흑심을 품고 다가오는 영애들을 잠시나마 다정한 척 받아 줬을 뿐이었다.

    고작 그 모습에도 사람들은 이전의 리우리안을 금세 떠올렸고, 과거의 프레임을 현재에 덧씌웠다.

    그날도 그랬다. 그걸 문제 삼은 건지, 당장 황후궁으로 향하란 전갈을 받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들의 문란한 생활을 익히 알고 있던 황후는 전갈을 보내놓고도 리우리안이 바로 황후궁에 오진 않을 거라 확신한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을 불러 놓고 가넷 공작과 그런 대화를 나눌 순 없었을 테니.

    [황태자께서 계속 난잡한 생활을 이어 가도록 두고만 볼 생각입니까?]

    시종도 하나 없는 은밀한 시각, 황후의 침실 밖으로 가넷 공작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온통 언짢은 기색으로 가득했다.

    칼리프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전장에서 돌아온 아이입니다.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다가 1년을 넘게 전장에서 발목을 붙들려 있었다고요.]

    [그러니 이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게지요. 폐하께선 황태자가 왜 엘리아 왕국과의 전장으로 떠나야 했는지, 그 이유를 까맣게 잊으신 겝니까?]

    [아버님!]

    [폐하의 유일한 핏줄인 황태자 전하의 승계를 방해하려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폐하의 대단하신 아드님께서 문란한 생활을 즐기지만 않으셨더라도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전장으로 나가셔야 하는 일은 없었겠지요!]

    다소 신경질로 시작된 황후와 공작의 대화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싸움이 되었다.

    그럴수록 칼리프는 더욱 숨을 죽였다.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 이전에 리우리안의 승계를 방해하려던 움직임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금이 문란했던 황태자 전하의 이미지를 쇄신하기에 아주 좋은 적기예요. 대신들 사이에서 전하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는 건 이 아비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황후 폐하께선 아드님 간수에만 전념을 다하세요.]

    공작은 황후조차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진저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침실 밖으로 나올 것만 같은 뉘앙스였다.

    칼리프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걸음을 뒤로 물렸다. 혹여 공작을 마주치더라도 이제 막 도착한 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울먹이는 황후의 음성이 다시금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제가 아버님의 속내를 진정 모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버님께선 야망이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결국 황후로 만드셨고요. 아버님이라면 제 아들 역시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마시겠죠.]

    […….]

    [그러고 나면 제게 그랬듯, 제 아들도 아버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실 겁니다. 마음대로 조종하고 휘두르며, 아버님의 뜻대로 제국을 통치하려고 하시겠죠! 그로 인해 리우가 아버님 대신 온갖 비난과 핍박에 난도질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버님께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실 겁니다!]

    [황태자가 영민한 아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겠지요.]

    칼리프는 빠르게 눈을 끔벅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퍽 의미심장하게 흘러갔다.

    더욱이 울부짖는 황후를 향한 공작의 대답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뿐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건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한동안 황후의 침실에선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적막이 오래가진 않았다.

    곧 넋이 나간 듯한 황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리우는, 리우는……!]

    [황후께서도 차마 아드님이 영민한 아이라고는 말을 못 하시겠지요. 그러실 만도 합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계집질에만 전념을 하는 얼간이가 그저 황후의 다리 사이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황태자의 자리까지 꿰찼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말조심하세요! 리우는 제 아들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황후는 계집질이나 할 줄 아는 얼간이의 어미이지요. 이제 보니 황태자가 황후의 밑에서 자라 고작 얼간이밖에 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감히, 감히……!]

    [황후!]

    별안간 공작이 고함을 치며 역정을 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포한지, 칼리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아비가 분명 영민한 아이로 신중히 골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둘 중 조금이라도 더 나은 아이를 골라야만 한다고, 분명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아이 둘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무섭게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통이 가시기도 전이었고, 의식을 잡고 있는 것조차 버거웠던 순간에 제가 해야 될 일이라는 게 둘 중 누굴 살리고 누굴 죽일 것인지, 그걸 결정하는 일이었단 말입니다!]

    […….]

    [그래도 결국 아버님 말씀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똑같이 배 속에 품고 있던 아이 중 하나를 버렸습니다! 아버님 말씀대로요!]

    [그렇게 선택한 아이가 고작 지금의 황태자인 것이지요.]

    [하…….]

    황후의 울분에도 공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태도에 질릴 대로 질린 유스티아가 허탈한 숨을 속절없이 내쉬었다.

    거칠게 숨을 내쉰 건 칼리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무얼 뜻하는지, 본능처럼 그 의미를 파악하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공작의 목소리에 더는 혼란스러워할 수조차 없었다.

    [나를 원망하십니까?]

    […….]

    [쌍생아의 출산은 재앙입니다, 황후. 그때 내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황태자는 물론 황후까지도.]

    […….]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쌍생아 출산, 재앙, 세상에 나오기 무섭게 버려진 아이.

    칼리프는 넋을 놓은 채 눈만 끔벅였다. 길고 긴 대화 중 오직 그 세 가지 사실만이 머릿속을 혼란하게 맴돌았다.

    공작의 말을 끝으로 황후의 침실에선 더 이상 말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줄곧 우려했던 대로 문을 벌컥 열고 나온 공작을 마주해야만 했다.

    칼리프는 황급히 표정을 지우곤, 공작의 표현대로 얼간이처럼 허허 웃었다.

    공작은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듯 사납게 미간을 구겼다. 그러곤 하찮은 미물을 대하듯 혀를 차며 그의 곁을 냉랭하게 지나쳤다.

    칼리프는 그날 그 순간 느꼈던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놀람과 당혹감. 무엇을 향한 것인지 모를 두려움과 원망, 분노까지.

    짧은 순간 매섭게 들이닥친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를 한참이나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했다.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그 생은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이 났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칼리프는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전의 경험으로 황궁에 도달하기까지의 방법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황궁의 문턱은 밟아 보지도 못한 채 의미 없는 회귀를 몇 번 더 반복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죽인 리우리안인데, 그를 벨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고 놀라 날뛰는 리우리안을 마주하고서도, 그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은커녕 황후와 공작의 대화 내용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봐, 칼리프!”

    상념에 잠겨 있던 칼리프는 별안간 벼락처럼 떨어진 목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야, 아무것도.”

    버석하게 마른 눈동자가 속내를 들킬까 두려운 듯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펠릭스는 그 행동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은 듯했다.

    “그럼 내일부턴 계획에 맞춰 움직일 생각인가?”

    “그래야겠지.”

    “그렇다면 제일 먼저 만나 볼 사람은 역시…….”

    펠릭스가 말끝을 흐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칼리프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이드를 만나러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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