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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그의 품 안 (32/94)


  • 32화. 그의 품 안
    2023.07.02.


    “시중은 괜찮아, 페일린.”

    이벨리아는 자연스럽게 응접실로 따라 들어오는 페일린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페일린이 의아한 얼굴로 눈을 빠르게 끔벅였다.

    “네? 그래도…….”

    “오랜만에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래. 이런저런 생각도 좀 하고.”

    거짓말로 핑계를 대려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페일린이 눈치채지 못한 불청객이 자리한 상태였으니까.

    페일린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금세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참았던 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고맙군.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날 숨겨 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얄미운 목소리가 심기를 거슬러 왔다. 이벨리아는 눈살을 찌푸린 채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언하건대 결코 그쪽 좋으라고 한 일은 아니니까 오해 말아요.”

    -그래? 그럼 이벨리아, 널 위한 일이었나?

    “페일린이 놀랄까 봐 그런 거뿐이에요!”

    -왜? 너의 시녀도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할까 봐?

    펠릭스가 키득거렸다. 이벨리아는 약이 바짝 올랐지만, 대꾸는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페일린이 저처럼 햄스터 꼴을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펠릭스를 상대하고 있지만, 저 역시 처음엔 기절할 것처럼 놀라지 않았던가. 페일린을 저처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이제 정말 그만하고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요.”

    이벨리아는 새침하게 몸을 돌리곤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향긋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디아나가 좋은 차를 선물로 보냈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향만으로도 차를 한 입 머금은 기분이었다.

    이벨리아는 괘씸한 햄스터의 존재는 말끔히 잊고 준비된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쪼르르, 잔에 부딪히며 나는 물소리가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찻잔을 입가에 대고 기울였다.

    눈을 감으며 맛을 음미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금세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을 만큼 풍미가 좋았다. 장담컨대 지금껏 마셔 본 그 어떤 홍차보다도 훌륭했다.

    이벨리아는 언제 새침하게 굴었냐는 듯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걸곤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기 무섭게 조금은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고 말았다.

    어느덧 사람의 모습을 한 펠릭스가 그녀의 앞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뭐, 뭐예요? 돌아가라는 말이 이해하기 어려워요?”

    이벨리아는 전에 없이 당황하며 말했다. 누가 안으로 들어와 이 모습을 보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걱정 마. 네가 우려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네 시녀는 지금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다 알아. 그리고 설령 누군가 이 방에 들어온다고 해도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도 좋아.”

    펠릭스가 태평한 얼굴로 팔짱을 척 꼈다. 그러더니 턱짓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향이 엄청 좋네?”

    “…….”

    “보나 마나 맛도 좋을 것 같고.”

    그는 할 수 있는 가장 덜떨어져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 놓인 찻잔을 곁눈질했다. 딱히 홍차가 탐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이벨리아의 불안을 상쇄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야 칼리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곳으로 향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

    “네, 좋아요.”

    “그런데 잔이 하나네.”

    “혼자 마실 거라고 했는데, 잔을 두 개나 준비해 달라고 할 순 없잖아요?”

    상황은 그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이벨리아가 어느 정도 불안을 잊은 얼굴로 새초롬하게 굴었다.

    펠릭스는 약이 오르는 척하며 성실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뭐, 좋아. 홍차쯤이야 혼자 얼마든지 마시라고.”

    “그럴 거니까 걱정 말아요.”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진 대답에 펠릭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떻게 봐도 차를 나눠 주지 않아 삐친 사람 같았다. 이벨리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펠릭스는 오해를 풀 생각 따위 없이 은밀하게 이벨리아를 살폈다.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훑어보기도 하고, 그녀를 꿰뚫을 듯 진득하게 응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최 납득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이 순간에도 자신을 보고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뭘 그렇게 봐요?”

    “…….”

    “이봐요, 펠릭스.”

    복잡한 머릿속으로 언뜻 이벨리아의 재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펠릭스가 정면을 보았다.

    “홍차 향이 이리도 좋으니, 보지 않을 재간이 있나.”

    적당한 말을 찾아 둘러대긴 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어색해진 후였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벨리아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펠릭스는 이벨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몸은 괜찮은 건가?”

    “몸이요?”

    “지난번에 쓰러졌던 걸 말하는 거야.”

    “아, 괜찮아요.”

    이벨리아는 일말의 거짓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펠릭스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정말 괜찮은 것 맞나? 안색은 여전히 별로인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요 며칠은 잠도 아주 잘 자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페일린은 나날이 안색이 좋아진다고 하던데요?”

    펠릭스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한데 영 틈이 생기질 않았다.

    이벨리아와 접촉을 하고 싶었다. 미미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는 거라면, 접촉을 통해야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건강을 핑계로 확인해 보려던 것이었는데…….

    “미안하지만, 잠깐 실례 좀 하지.”

    펠릭스는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나 이벨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갈 순 없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하게 요동쳤다. 죄책감이 알싸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잠깐이면 된다고 연거푸 합리화를 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바로 앞에 멈춰 선 펠릭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뭘 어쩌겠다고 이토록 가깝게 다가온 건지, 그게 못내 당혹스러운데 순식간에 남자의 손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확히 그 순간,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뭐 하는 짓이지?”

    별안간에 뻗어 나온 목소리는 이벨리아와 펠릭스의 시선을 단박에 잡아끌었다.

    “저, 전하.”

    이벨리아는 홀린 듯 리우리안을 향해 다가갔다. 바로 앞에 서서 가볍게 묵례하자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떨어졌다.

    “뭘 하고 있던 거지?”

    “네?”

    “방금 비의 앞에 서 있던 놈과 무얼 하고 있던 거냐고 물었어.”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그녀를 위압하며 온몸을 휘감았다.

    순간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서 잠깐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낯선 건 자신을 보며 옅게나마 미소를 짓는 모습, 제게 선물을 건네는 모습, 제 앞에서 고통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모습뿐일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가 무척이나 생소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노하는 리우리안이라면 도리어 무척이나 흔하게 봤던 모습인데.

    “……전하.”

    “대답하기 어렵다면 질문을 바꾸지.”

    “…….”

    “저자가 비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이를 악문 채 분노를 씹어뱉듯 묻는 그의 눈동자로 살기가 넘실거렸다. 두려워해야 마땅한 모습이건만 이벨리아는 두렵지 않았다. 그의 분노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가 난 그를 보고, 이벨리아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들켰다간 그의 화를 더 부추길 것 같아 부러 펠릭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저 혼자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뒤돌아본 테이블 주변엔 펠릭스는커녕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에……. 설마?”

    이벨리아는 당혹한 눈으로 바닥 곳곳을 응시했다. 건장한 덩치가 고작해야 소파와 테이블, 간이의자뿐인 응접실 안에서 꼭꼭 숨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가 어디에 숨어도 숨을 수 있는 존재로 다시 변했다는 건데.

    “전하?”

    응접실 바닥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녀의 시야로 불현듯 리우리안의 다리가 침범해 들어왔다. 그뿐일까, 성큼성큼 내뻗는 걸음엔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보폭과 속도를 유지하던 그가 거짓말처럼 멈춰 선 건 창가 커튼 앞에서였다.

    이벨리아는 설마 하며 커튼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펠릭스는 물론 햄스터의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리우리안이 성마른 손길로 커튼을 젖힌 순간, 상황은 완벽하게 달라졌다.

    “빌어먹을 쥐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리우리안이 싸늘하게 뇌까리며 시선을 아래로 처박았다. 그러자 커튼 뒤에 숨어 있던 햄스터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이벨리아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

    “좋은 말로 할 때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펠릭스.”

    발밑의 펠릭스를 몰아붙이는 리우리안의 태도가 지나치게 위협적이었다. 금방이라도 묵직한 발을 들어 손바닥 크기도 되지 않는 햄스터를 무자비하게 짓밟을 것 같았다.

    이벨리아는 급히 걸음을 떼었다. 펠릭스가 얄밉기는 했지만, 리우리안의 발에 짓밟혀 죽길 바라진 않았다.

    -대답하면 날 무사하게 내버려 둘 건가?

    “아니.”

    -허! 이러나저러나 나를 죽이겠단 말인데, 내가 어째서 대답해야 하지?

    이벨리아가 리우리안에게 향하는 그 짧은 사이를 참지 못하고 펠릭스가 입방정을 떨었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던데. 지금 펠릭스에게 가장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이벨리아는 펠릭스를 보며 미간을 구기고는 리우리안을 향해 곧장 팔을 뻗었다.

    “전하, 우선 진정하시어요. 전하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무것도……!”

    손끝에 닿은 리우리안의 손목을 조심스레 부여잡곤 펠릭스를 대신한 변명의 말을 전하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붙잡은 손목에 힘이 실리더니 역으로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동시에 폭발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강한 힘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벨리아는 너무 놀라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리우리안의 품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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