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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디아나 놀튼 (29/94)


  • 29화. 디아나 놀튼
    2023.06.29.


    “영애, 그건…….”

    이벨리아는 퍽 당혹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요동치는 눈동자가 불편한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놀튼 영애가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곤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송구해요, 전하. 그렇지 않아도 말의 무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아버님께 자주 꾸중을 듣곤 하는데, 감히 전하의 앞에서까지 경솔하게 굴었습니다. 나쁜 뜻으로 꺼낸 말은 아니니,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어요.”

    놀튼 영애는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처박다시피 하며 사죄했다. 지나치게 경직된 사과였다.

    이벨리아는 서둘러 놀튼 영애를 향해 팔을 뻗었다. 렐리아의 이야기가 불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과를 원한 건 아니었다.

    “아니에요, 영애. 그렇게까지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니니 심려치 마세요.”

    “전하…….”

    “나는 그저 어제 가지지 못한 영애와의 즐거운 시간을 늦게나마 가져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말끝에 이벨리아가 온화한 미소를 감아올렸다. 그제야 놀튼 영애의 경직된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이 보였다.

    이벨리아는 재차 그녀에게 차를 권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차인데, 영애의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향이 무척 좋아요. 맛은 보나 마나 좋을 것 같고요. 귀한 차를 내어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더할 나위 없이 듣기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은근하게 밀려오는 긴장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손님을 맞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전부 다 신경이 쓰였다.

    “향도 좋고 빛깔도 좋다 싶었는데, 역시 맛도 너무 좋아요, 전하!”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놀튼 영애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놀튼 영애를 따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영애의 입에 잘 맞는다니 너무 다행이에요.”

    “전하께서 내어 주시는 거라면 그게 뭐든 제 입에는 다 잘 맞았을 거예요. 늦었지만,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인사를 드리는 김에 제 소개도 정식으로 다시 한번 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놀튼 영애의 눈동자가 의욕으로 가득했다. 차마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놀튼 백작가의 디아나라고 합니다, 전하.”

    디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랄하게 고개를 숙였다. 각 잡혀 있던 직전까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게 퍽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귀엽게 보이기도 해서 이벨리아는 눈매를 휘어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반가워요, 디아나. 이제 됐으니 그만하고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언젠가 전하와 꼭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오다니. 정말 너무 기뻐요, 전하.”

    디아나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온통 진심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제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는 게 줄곧 궁금하던 차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어요. 나와 꼭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니, 혹시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아무래도 제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나고 싶어 할 이유가 없었다.

    황궁의 시종들까지도 그녀를 허울뿐인 황태자비 취급을 했다.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건 예삿일이고, 도 넘은 무시를 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녀를 믿고 따른다는 이유로 페일린이나 몇몇 시녀들을 따돌리기까지 했으니, 설명이 뭐가 더 필요할까.

    시종들 사이에서도 하찮은 수준인 황태자비의 입지는 귀부인들 사이에서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시종들과는 다르게 우아하고 고상하게 티를 마시며 흉을 보는 것뿐이었다.

    아마 디아나의 이야기를 부친을 통해 들은 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초대는 물론이고 그녀와 대화를 나눠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창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전하와 소소한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한 번쯤 뵙고 싶었거든요.”

    “나와, 소소한 대화를요?”

    “네. 파티가 열릴 때마다 멀리서나마 전하를 뵙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론 너무 아쉽더라고요! 그렇다고 전하께 선뜻 다가가기엔 그때마다 표정이 너무 굳어 계셔서…….”

    디아나가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렸다. 흘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얼굴엔 곤란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마 이유를 너무 잘 알아 그러는 것일 터였다. 모두가 즐거워야 마땅할 파티에, 어째서 그녀 혼자 굳은 표정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영애의 말을 들어 보니 영애는 나한테 정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네요.”

    이벨리아는 억지로 입매를 당겨 올리며 화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디아나를 초대한 건 음울한 대화나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태자비가 되고 처음으로 초대한 손님과는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영애가 왜 그렇게까지 나한테 관심을 가졌던 건지.”

    “그게, 사실은…….”

    이벨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말끝을 흐린 디아나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전하를 처음 뵀던 순간부터 전하한테 반하고 말았거든요!”

    “……네?”

    찻잔을 쥐었던 이벨리아의 손가락이 순간 경직된 채 멈추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은 들은 거지?

    “디아나, 미안하지만 방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번…….”

    “정확히 전하께서 황태자 전화와 국혼을 올리시던 날이었어요!”

    “디아나……?”

    “전 아직도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해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계시던 아름다운 전하의 모습을요.”

    “디, 디아나.”

    “어찌나 아름다우시던지,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으셨답니다!”

    디아나는 그날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한지 두 손을 볼 위에 댄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혼자만의 감상에 취한 모습에선 어떻게도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리어 이벨리아를 향한 순수한 애정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 보였다.

    “정말 전하만큼 아름다우신 분은 제국을 통틀어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어제는 또 얼마나 눈이 부셨다고요!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입장하시는데 선남선녀 한 쌍이 따로 없었어요.”

    “…….”

    “두 분이 어찌나 잘 어울리시던지, 그 가식으로 똘똘 뭉친 영애님과 서 계실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림 같……!”

    혼자만의 감상을 신랄하게 내뱉던 디아나가 일순 뻣뻣하게 굳은 채 멈추었다. 실수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렐리아를 언급한 것이 문제란 인지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이벨리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디아나가 너무 귀여웠다. 신나게 재잘거리다 딱딱하게 굳어 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아이처럼 해맑아 보였다.

    그게 렐리아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 혹은 불쾌함까지도 말끔히 상쇄시켜 주는 것만 같았다.

    “괜찮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해요. 렐리아 영애의 이야기를 금기로 정해 뒀다간 디아나 영애와 자연스러운 대화는 절대 나누지 못할 것 같아요.”

    “……진심이세요, 전하?”

    “물론이죠.”

    이벨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디아나가 더욱 환해진 얼굴로 와다다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렐리아를 흉보는 이야기였다. 첫인상부터 별로였다는 둥, 티파티에 초대받아 참석하면 언제나 아닌 척 제 자랑을 하기 바쁜데 그 모습이 무척 재수가 없었다는 둥. 제게 이런 말까지 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거침없는 언변을 뽐내었다.

    덕분에 이벨리아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쉴 틈 없이 웃느라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디아나의 이야기를 끊고 싶진 않았다.

    보다 못한 페일린이 곧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고 알려 왔고, 그제야 디아나와의 자리를 마무리했다.

    “전하, 오늘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너무 즐거웠고, 또 너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 인사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덕분에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이 웃었어요.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울 지경이에요.”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돌아가는 걸음이 무척 가벼울 것 같아요.”

    디아나가 상기된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 반나절 전이었다면 그런 디아나의 모습을 보며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저를 향한 진심을 어쩌지 못해 저러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디아나, 다음에 또 태자비궁에 놀러 와 줄 수 있겠어요?”

    “그 말씀은 저를 또 초대해 주실 거란 뜻인가요, 전하?”

    “디아나만 괜찮다면 그러고 싶어요.”

    “괜찮고말고요! 전하의 초대하면 전 언제든 환영이랍니다!”

    디아나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 디아나를 바라보는 이벨리아 역시 무척 기분이 좋았다.

    부친을 통해 디아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상한 사람은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디아나는 이상하지 않은 그 이상으로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가슴이 기분 좋게 뛰었다. 드디어 그녀에게도 좋은 친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

    칼리프는 아주 오랜만에 침실로 일찍 돌아왔다.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예고에 없던 그의 등장에 당황한 건 펠릭스였다.

    “뭐야? 일찍 돌아올 거란 말 없었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벌써 와?”

    “내가 내 침실에 돌아오는 것까지 네게 미리 알려야 하나?”

    칼리프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곤 제 뒤를 쫓는 펠릭스는 깔끔하게 무시한 채 창가에 놓인 테이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없어, 그런 거.”

    “그럼? 피로가 쌓여서인가? 오늘은 일찌감치 푹 쉬려고?”

    “난 어떤 식으로도 시간을 허투루 쓸 수가 없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럼 도대체 왜?”

    펠릭스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저를 향한 눈길이 무척이나 성가셨다. 이럴 땐 솔직하게 말하고 펠릭스의 입을 막는 것이 상책이었다.

    “생각 좀 정리하려고.”

    “무슨 생각을?”

    펠릭스의 질문이 재차 이어졌다. 그에 칼리프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까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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