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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더 고통스러워할 사람 (18/94)


  • 18화. 더 고통스러워할 사람
    2023.06.18.


    “안녕?”

    펠릭스는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연신 집게손가락으로 햄스터와 펠릭스만 가리켰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누, 누구…….”

    누구냐는 짧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이 퍽 의외여서, 펠릭스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응. 나 조금 전에 저 햄스터.”

    펠릭스가 짓궂게 말장난을 쳤다. 이미 놀란 그녀이기에 되도록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란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반응이 썩 재밌었다. 늘 뻣뻣하게 구는 칼리프 녀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뭐랄까, 생기가 넘친다고나 할까?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칼리프보다 훨씬 더 재미없는 부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매번 속으로만 끙끙 앓길래 감정 표현에 서툰 줄 알았더니, 그렇지만도 않네?”

    속으로 했던 생각이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게 수상쩍어 보였는지, 줄곧 넋 빠진 표정만 짓던 이벨리아가 미간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 갑자기 사람이 된 거예요?”

    “글쎄. 정확히 따지자면 햄스터에서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잠시 햄스터의 몸을 빌렸을 뿐이지.”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사실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이벨리아의 얼굴에 더욱 짙은 의심만 두둥실 떠올랐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마법을 부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이벨리아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오래된 과거에 마법을 사용하는 인류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녀가 아는 한 그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어야 했다.

    “흐음. 마법이랑은 조금 다른 개념이긴 한데, 마법이라고 하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그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정말 마법을 사용하는 거라면 이건 엄청난 일이었다. 오늘 아침에 먹은 메뉴를 설명하듯 일상적인 톤으로 할 이야기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나치게 태평해 보였다.

    “난 펠릭스야. 어쨌든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 부분은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이벨리아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대할 때엔 신분과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적당 선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배웠지만, 차마 저 손은 맞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속내를 간파하기라도 한 건지, 펠릭스가 멋쩍은 얼굴로 손을 거두어 갔다. 그러더니 퍽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리우리안은 내가 황궁 안을 돌아다니는 걸 무척 싫어하거든. 눈에 띄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으니, 나로선 어쩔 도리가 있어야 말이지.”

    “…….”

    “그 녀석 눈을 피해 조용히 다니기에 이렇게 작은 동물만큼 편한 게 없거든.”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악의가 없었음을 피력했다.

    이벨리아는 펠릭스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이곳저곳을 훑었다. 몇 번을 봐도 낯선 얼굴이었다.

    황태자궁의 시종인 걸까?

    “차림새를 보아하니 리우리안의 시종은 아닌 것 같은데…….”

    차림새뿐만 아니라 정말 시종이라면 주인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태도도 말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제 앞에서 리우리안의 이름을 이토록 함부로 부르다니.

    이벨리아가 골몰하는 사이 펠릭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 시종이라고? 이 귀티로 가득한 얼굴이 시종으로 보인단 말이야?”

    “그럼 누구신지 정확한 신분을 밝히시지요.”

    이벨리아가 제법 똑 부러지게 요구했다. 그 탓에 펠릭스가 퍽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

    “그냥 리우리안의 친우인 것으로 정리하지.”

    친우인 것으로 정리하자고?

    이벨리아가 ‘허’ 하고 탄식을 뱉었다. 햄스터에서 사람으로 변신한 것도 수상한데, 무려 리우리안의 친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수상한 점은 상쇄되지 않았다.

    당최 황태자의 친우가 어찌하여 햄스터로 변신하여 황태자비의 침소를 찾는다는 말인가.

    “못 믿겠으면 리우리안에게 확인해 봐도 좋아. 물론 그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이벨리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의 말처럼 리우리안에게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수상한 작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제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지 않았던가.

    잠시 잊고 있던 생각을 떠올렸을 뿐인데 이벨리아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예정에 없던 정적이 두 사람을 휘어 감기까진 금방이었다.

    “이런,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펠릭스가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리우리안이란 이름만으로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그녀에게 리우리안이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이벨리아에게도, 칼리프에게도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답이 제 눈엔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원래 그렇지 않던가. 당사자에겐 어려운 문제가 타인에겐 별거 아닌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건, 이건 어디까지 두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감정이 기반이 된 문제엔 제삼자가 끼어들어 좋을 것이 없었다.

    결국 펠릭스는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키며 햄스터가 담긴 소쿠리 쪽으로 향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가 보는 게 좋겠군.”

    “…….”

    “여기에 왔던 방법으로 돌아갈 생각이니까 이번엔 너무 놀라지 말라구.”

    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이벨리아에게선 짧은 시선조차 받을 수 없었다.

    펠릭스는 거칠게 머리를 털어 냈다.

    문득 해가 지고 나면 굳은 표정으로 침소에 들어오던 칼리프의 표정이 떠올랐다.

    늘 이벨리아와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매번 이렇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나, 조금쯤은 답답하게 생각했는데 왠지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기분을 칼리프 또한 느꼈던 것이 아닐까.

    펠릭스는 말없이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얼굴이 슬픔에 한껏 젖어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것처럼 목 끝이 조이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가 풍기는 청초한 분위기 때문에 그 감정이 더욱 배가되는 걸지도 몰랐다.

    아마 그는 매일을 이런 기분 속에서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 한 가지를 깨달았을 뿐인데, 칼리프를 향해 더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칼리프가 금기했던 이 만남을 어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펠릭스는 곧장 햄스터의 위로 손을 뻗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막 햄스터 안으로 스며들려던 찰나였다.

    펠릭스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손을 거두곤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전하, 그럼 몇 숟갈만이라도 뜨세요. 그러고 나면 저도, 다른 시종들도 침실에 발을 들이지 않을게요.]

    [……나중에. 나중에 먹을게. 그러니까 이만 나가 줘. 부탁이야.]

    이곳으로 오는 길에 들었던 이벨리아와 시녀의 대화 내용이었다.

    지금 표정을 보아하니 한 끼 굶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게 현실이 된다면 그녀의 단식 소식을 접한 칼리프가 지금보다 더욱 예민하게 굴며 흉포한 분위기를 폴폴 풍기고 다닐 것이 분명했다.

    펠릭스는 미간을 구겼다. 그녀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

    “듣자 하니 끼니를 계속 거르고 있다던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인가?”

    시작하는 말부터 제법 훈계하는 투였다. 그 말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벨리아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펠릭스를 찾았다.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글쎄. 오래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에 혼절하기까지 한 네가 단 하루 만에 멀쩡해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무언가 거들먹거리는 투였다. 그게 이벨리아의 심기를 고스란히 자극했다. 그러나 펠릭스의 훈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네 상태는 어떤 명약을 가져온다고 해도 하루 만에 털어 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어. 그런 네 옆을 종일 지킨 게 리우리안이었고, 그가 네 곁을 지켰기에 나도 널 찾았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이벨리아가 그녀답지 않게 까칠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었다. 하지만 펠릭스는 이번에도 그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네가 지금 멀쩡히 서서 나를 마주하고 있는 자체가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거다. 그러니 나한테 몇 마디 훈수 둘 자격은 충분히 있다는 얘기고.”

    “…….”

    “식사 거르지 말고 건강부터 챙겨. 네가 아프면 너보다 더 고통스러워할 사람이 있으니까.”

    이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지 못한 진심 어린 충고였다. 그가 말한 ‘더 고통스러워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우리안을 가리킨 것이리라.

    전에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속으로는 수백 번, 수천 번 그럴 리가 없다고 습관처럼 생각했지만, 오롯이 그 생각만 고집하기에는 펠릭스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중했다.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히스테리 수준이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야. 그러니 부탁 좀 하지.”

    “…….”

    “리우리안을 너무 미워하진 마. 그 녀석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니까.”

    온통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이었다.

    리우리안이 그럴 리가 없었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신은 렐리아 넷트가 아닌 이벨리아 캐롤라인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아프다고 하여 더 고통스러워할 이유도, 그 때문에 예민하게 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의 눈앞으로 지난밤의 리우리안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그대를, 사랑해 볼까 해.]

    […….]

    [이런 나를,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

    이벨리아는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한숨을 뱉으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묻고 싶었다, 자신은 모르는 리우리안의 진심에 대해 그는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를.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선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침실 이곳저곳을 뒤져 봐도 보이지 않았다.

    펠릭스가 서 있던 자리도, 햄스터를 넣어 두었던 소쿠리도 모두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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