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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햄스터의 정체 (17/94)


  • 17화. 햄스터의 정체
    2023.06.17.


    이벨리아는 눈을 힘주어 감았다가 떴다.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 눈을 세차게 비비기도 했다.

    그러고 난 후에도 햄스터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루밍에 열중하고 있었다.

    “……잘못, 들은 건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햄스터가 말을 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금세 혼란을 지운 그녀는 지친 기색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햄스터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넌 어디에서 온 거니?”

    좀 전과는 달리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작은 생명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속 편히 그루밍을 하던 햄스터는 움직임을 멈추곤 고개를 대각선 방향으로 기울였다.

    ‘뀨’ 하는 울음소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워서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사르르 미소 지었다.

    “내가 정말 미쳐 가나 봐. 조금 전에 네가 말을 했다고 생각했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혼잣말을 내뱉으며 햄스터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단박에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햄스터는 그녀의 손길을 받고도 자리를 지켰다.

    아무래도 누군가 애완용으로 키우는 햄스터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손을 탈 순 없는 거니까.

    “너 정말 순하구나? 사람 손길을 즐길 줄도 알고. 페일린에게 네 주인을 찾아 달라고 해야겠다.”

    이벨리아는 눈매를 한번 휘어 접곤 허리를 폈다. 설렁줄을 흔들면 반가운 얼굴로 부리나케 달려올 페일린의 얼굴이 절로 그려졌다.

    아마 자신이 마음을 바꿔 식사를 하려고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게 아니란 걸 알면 곧장 실망할 테지.

    어쩐지 벌써부터 페일린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주인 있는 햄스터를 이대로 제 침실에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벨리아는 침대 근처에 있는 설렁줄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재차 벌어진 건 그때였다.

    -설마, 내 목소리를 들은 거야?

    다시 한번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이벨리아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이벨리아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햄스터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사랑스럽던 표정까지도 변함없었다.

    햄스터를 제외하곤 이 침실 안에 사람은 저뿐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들려온 소리인 것일까.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면 저 햄스터가 말을 한 것이어야 맞았다. 그런데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햄스터가 말을 하다니. 그것도 사람의 언어를 구사하다니.

    “……방금 그 말, 네가 한 거야?”

    이벨리아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미친 사람처럼 햄스터에게 말을 거는 행동에 어쩐지 자괴감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분명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무척이나 또렷하고 생생하게.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어.”

    “…….”

    “……설마, 너니?”

    어떤 반응도 없는 햄스터를 향해 다시금 물었다. 그러곤 사랑스러운 햄스터가 지금 모습 그대로 가만히만 있어 주길 간절히 바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여 초만.

    그렇게 된다면 지나친 수면 부족에 기력이 쇠하여 환청을 들은 모양이라고, 그렇게 합리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벨리아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말이 들려?

    이벨리아는 하얗다 못해 퍼레진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작은 틈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구석구석 살피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가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떻게도 저 햄스터가 말을 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내가 정말 미쳤나 봐…….”

    이벨리아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햄스터를 바라보았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온통 두려움에 절어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공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공포는 아직 남아 있었다.

    분명 테이블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햄스터가 별안간 이벨리아를 향해 빠르게 앙증맞은 다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벨리아가 뒤로 넘어지며 와락 소리를 질렀다.

    “아악! 오지 마! 오, 오지……!!”

    -소리 지르지 마!

    본능처럼 내지른 괴성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꽤 단호한 말투에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맞붙였다.

    그사이 햄스터는 어느덧 넘어진 이벨리아의 드레스 자락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것만으로 이벨리아는 심장이 터질 듯 뛰고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햄스터가 느닷없이 그루밍하듯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모습이 그저 그루밍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꼭 두 손을 싹싹 비비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잘못했거나 정중한 부탁을 위해 하는 행동처럼.

    -네 시녀가 아까부터 계속 문 앞을 지키고 있단 말이야. 해치지 않아. 절대 해치지 않을게. 약속해. 그러니까 소리 지르지 마, 제발.

    이어진 말소리까지 더해지니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햄스터 주제에 페일린이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어떻게 안 것인지…… 정말이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이벨리아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햄스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깐만 눈을 돌려도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저, 정말 네가 말하고 있는, 거야?”

    최대한 담담한 척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빨간 눈이 한참이나 자신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 정말 내 목소리가 들려?

    말도 안 되는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확실했다. 햄스터가 제게 말을 걸어왔다.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햄스터의 눈매가 미묘하게 아래로 휘어졌다.

    -하,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분명 정신을 차릴 정도로만 기운을 나눠 줬는데.

    퍽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의미심장했다. 무슨 뜻이냐는 질문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벨리아는 그저 이 엄청난 햄스터에게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햄스터는 눈치까지 재빨랐다.

    -일단은 진정하는 게 좋겠어.

    “지, 진정?”

    -그래. 이벨리아, 너 말이야.

    “내 이름도 알아??”

    이쯤 되니 이벨리아는 차라리 어제처럼 쓰러져 정신을 잃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그 진심이 그녀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 미치겠군.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조용히 이벨리아의 동태만 살피려던 것뿐이었는데. 칼리프가 안다면 당장에 죽이겠다고 검을 휘두를 일이었다.

    제가 아무리 이능을 가진 존재라고는 하나,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능력 따위는 없는데.

    갑자기 생긴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펠릭스는 겁에 질린 이벨리아를 빤히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종알거렸다.

    -혹시 작은 상자 같은 거 있어?

    “사, 상자? 그건 왜?”

    -너, 내가 무섭지?

    직설적인 물음에 이벨리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기도 잠시, 그녀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날 상자 안에 가둬. 그럼 네가 그렇게까지 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잖아.

    “……사람처럼 말은 할 줄 알면서 상자에선 못 빠져나와?”

    이벨리아가 퍽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생각지 못한 지적이었다.

    펠릭스는 이벨리아를 두고 ‘제법 똑똑한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놀란 마음을 내색하진 않았다.

    -상자를 꼭꼭 닫으면 되잖아. 이 작은 몸으로 상자를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넌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펠릭스가 끙 하고 탄식을 뱉었다. 생각보다 의심이 많은 여인이었다. 그런 주제에 어째서 칼리프가 진짜 리우리안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건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벨리아는 의심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결국 펠릭스의 말대로 해 주었다. 화장 도구들을 담아 놓는 소쿠리를 가져와 그 안에 햄스터를 넣었다.

    “덮개가 있는 상자는 없어.”

    -뭐, 이 정도도 충분해.

    “……네가 하라는 대로 했으니까, 너 정말 거기서 꼼짝도 하면 안 돼. 알겠지?”

    이벨리아가 소심하게 소쿠리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이렇게나 겁이 많아서야 곧 자신이 저지를 일은 감당할 수 있을지.

    펠릭스는 어쩐지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햄스터는 이 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햄스터는 벗어나지 않을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벨리아가 슬쩍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하지만 펠릭스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이벨리아에게 대답하는 대신 주의사항 몇 가지를 당부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널 해치려는 의도 아니니, 놀라지 마.

    “……응?”

    -아! 절대 소리치지도 말고.

    “응??”

    이벨리아는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정확히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그녀의 녹안을 가득 채웠다.

    작은 햄스터의 실루엣을 타고 별안간 푸른빛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발산된 빛무리는 그 기세가 무안할 정도로 금세 사라졌다.

    팔로 눈을 가리고 있던 이벨리아가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기 무섭게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푸른빛을 머금은 낯선 남자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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