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은밀한 청
(19/94)
19화. 은밀한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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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은밀한 청
2023.06.19.
해가 저물기 시작한 무렵, 칼리프는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 별안간 황태자궁에 도착한 몬트롤 백작의 서신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위대하신 승리를 누구보다 앞서 축하해 드릴 수 있다면 대대로 영광일 것입니다. 전하의 초대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서신을 전달해 온 과정은 평범하지 않았다. 은밀히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몬트롤 백작은 황후를 중심으로 한 가넷 공작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자로 막대한 자금을 융통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백작과 만날 이유는 충분했다.
서신을 가져온 시종에게 오늘 저녁 황태자궁에서 만찬을 함께하자 백작에게 기별하라 일렀다.
칼리프는 저 앞에 보이는 만찬장을 향해 속도를 내어 걸었다. 백작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제법 기대가 되었다.
만찬장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백작이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거창한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요.”
칼리프는 인자한 척 입가에 미소를 걸며 백작을 향해 두어 번 손짓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맞긴 한 건지 백작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수록 칼리프는 더욱 허술하게 굴었다. 백작이 이곳까지 걸음 하겠다고 작심했을 때 떠올렸을 리우리안의 이미지를 연거푸 상기했다.
효과는 톡톡했다. 의미 없는 인사치레가 몇 마디 오가고, 백작이 곧장 본론을 꺼내었다.
“남부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권이 제게 있다는 것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광산?
칼리프의 짙은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면 엘리아 왕국과 우리 제국 영토에 걸쳐 있는 그 광산을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전하.”
백작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프는 백작을 기민하게 살피면서도 뜻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갑자기 광산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황궁 멀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니만큼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을 뿐, 그간 광산과 관련해서 계속 문제가 이어져 왔습니다.”
백작이 망설임 끝에 속에만 담아 두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그제야 칼리프는 백작이 자신을 찾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문제라면, 어떤?”
칼리프가 옅게 미소를 감아올리곤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백작이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이더니 쌓인 게 많은 표정으로 두꺼운 입술을 움직였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그 광산은 엘리아 왕국과 제국 영토에 나뉘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로 오래전 엘리아 왕국과 협의를 보았었지요. 각각의 광산 소유주가 국경선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광산을 운용하기로 말입니다.”
“그럼 된 것이 아닙니까? 제국의 영토로 인정되는 광산만으로도 꽤 재미를 보셨을 텐데요.”
“전하, 다이아몬드 채굴은 광산 안에서, 정확히는 지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지만, 어디까지가 제국의 영토이고 어디부터가 엘리아 왕국의 영토인지 분별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백작이 퍽 억울하다는 듯 발끈하며 대꾸했다.
칼리프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이 깊어질 때면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러니 백작의 말씀은 더 이상 그 문제로 골머리 썩고 싶지 않으니 엘리아 왕국에 뻗어 있는 광산까지 온전한 광산의 소유권을 백작에게 달라, 그겁니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광물로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물은 질문에 제법 파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칼리프는 재미있다는 듯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영토와 관련한 문제긴 하지만, 막 전쟁이 끝난 참이니 엘리아 왕국과 협상이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황후의 세력인 몬트롤 백작이 어째서 황후가 아닌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그 부분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백작께서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그런 문제라면 어머님을 찾아가는 것이 빨랐을 텐데요. 다른 문제도 아니고 영토와 관련한 문제인데, 한낱 황태자에 불과한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전 제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러 골라 뱉은 약한 소리에 백작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이 눈빛이야말로 백작이 자신을 찾아온 진짜 속내일 터였다.
“이유가 뭡니까.”
“전하께서는 이번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에서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공을 세우셨지요. 제국민은 물론 황궁의 대신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서두가 길군요.”
칼리프의 날카로운 지적에 순간 백작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다급해진 모양새로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께선 황궁의 두 세력이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중립을 지키시는 분이지만, 외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평화로운 해결책을 강구해 오셨습니다.”
“이번 경우처럼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리 여부와 관계없이 제국이 끌어안게 될 부담이 커지고, 커진 부담감은 곧 제국민들을 향하게 될 테니 그런 것이지요.”
“물론 지당하신 말씀이나, 광산 문제는 이번 전쟁을 계기로 그간의 골칫거리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로 황후 폐하께 청을 올린다면 결국 황제 폐하의 윤허를 받아야 하는 문제이니 분명 황후 폐하께서 난처해하셨을 겁니다.”
“왜 나라고 난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군요.”
“황제 폐하께서 전쟁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 전권을 황태자 전하께 일임하지 않으셨습니까.”
몬트롤 백작이 어느덧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관망하듯 바라보던 칼리프가 처음으로 의자에서 등을 떼곤 상체를 당겨 앉았다.
“그러니까 백작의 말씀을 정리해 보자면 첫 번째, 그간 이어져 온 문제들을 완전히 타파하기 위해 이번 기회에 광산을 온전하게 소유하고 싶다. 두 번째, 그 문제를 어머님께 청을 드려 보고 싶지만, 결국 아버님의 허락이 필요한 문제이고, 아버님이 외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평화주의자이시니 결국 나를 찾아오셨다, 이 말인 거 같은데.”
칼리프는 백작의 말을 정리하며 양손을 깍지 꼈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눈으로 백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화가 단절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백작의 얼굴엔 초조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백작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할 즈음, 칼리프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문제라면 날 찾아온 게 옳은 선택이 맞는 듯하군요.”
“저, 전하!”
백작은 감격이라도 한 얼굴로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가히 혼자 보기 아까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낱낱이 음미하던 칼리프가 피식 웃으며 자세를 정돈했다.
본격적인 협상이 필요했다.
“내가 백작의 말을 들어준다면 나에게 준다던 수익의 일부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수익의 10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광산을 온전히 소유하고 나면 백작께서 거둬들이는 수익은 최소 배 이상이 될 텐데 말입니다.”
정확한 지적에 백작이 사색이 되어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큰 결정을 내린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그럼 20퍼센트를……!”
“그 두 배로 하죠.”
“예??”
백작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번득거렸다. 하지만 칼리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백작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님께 청을 올렸다면 수익의 절반 정도는 내어 드렸을 것이 아닙니까?”
“그, 그거야…….”
“그럼 40퍼센트라고 하더라도 백작께선 이득이신 셈이군요.”
군더더기 없는 결론이었다.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태자의 태도에 백작의 입이 아연하게 벌어졌다.
그 모습이 같잖기 그지없었다.
역시나 백작은 이전의 멍청했던 리우리안을 기대하며 은밀히 만남을 청한 것이 분명했다.
이전의 리우리안이었다면 공로를 인정해 주고 떠받들어 주는 말에 덜떨어진 놈처럼 허허거리며 뭐든 다 들어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마침 황후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금을 확보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기대에 없던 수확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이제라도 어머님을 찾아가도 좋습니다. 백작께서 그렇게 한다면 나를 찾아온 일은 어머님께 비밀로 해 드리지요.”
칼리프는 자애로운 말투로 선택권을 주는 척, 거세게 백작을 압박했다. 어차피 백작의 대답이야 정해진 일이었다.
제게 양보하는 40퍼센트가 당장은 크게 느껴질지 몰라도 황후를 찾아갔을 때 포기해야 하는 것보단 그나마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길이니, 선택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백작이 죽상이 된 얼굴로 대답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칼리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백작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럼 우리의 거래는 성립된 거로 하고, 신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백작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칼리프의 손을 맞잡은 백작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잠시 당혹한 빛이 백작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곧 칼리프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말씀하시지요, 전하.”
“내일까지 준비되어야 하는 겁니다. 어렵다면 부담 없이 거절해도 좋아요.”
이번에도 황태자의 목소리는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칼리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자신이 건넨 제안을, 백작이 어떻게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