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탐색 (16/94)


  • 16화. 탐색
    2023.06.16.


    펠릭스는 창가에 서서 무료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해가 가장 쨍쨍하게 비추는 이 시간이 그에겐 하루 중 제일 지루한 때였다.

    말동무라고는 칼리프가 유일한데, 그는 매일매일 새로운 이유로 바빴다. 물론 그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저로서도 바라는 바였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늦장을 피울 법도 하지 않은가?

    “어제 그렇게 상처를 받고 왔으면서 다른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펠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자였지만, 어느 모로 봐도 참 지독한 사내였다.

    [네가 말한 대로 했어.]

    [정말? 그 방법이 효과가 있던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절망스러운 칼리프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지만, 부러 그렇게 물었다.

    그 말끝에 칼리프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적인 사인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펠릭스는 이벨리아의 반응을 이미 알고 있었다.

    태자비궁에서 이어진 그들의 대화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황태자궁에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으니까.

    [……기다려 보면 알게 되겠지. 선택은 언제나 이벨리아의 몫이니까.]

    나직이 읊조리는 칼리프의 표정이 종말을 앞둔 사람처럼 슬픔에 잠겨 있었다.

    종말의 전제를 그의 세상으로 둔다면 영 잘못된 반응도 아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이벨리아를 바라보는 일이 그에겐 곧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잠자리에 든 그는 동이 틀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는 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고, 평소와 다름없이 제 역할을 마땅히 수행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뭐, 바쁘게 움직이는 편이 슬픔을 잊는 데 차라리 효과적이긴 하지.”

    펠릭스는 진정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허공을 배회하는 눈길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물론 잠시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그는 이내 한쪽 눈을 찌푸리며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기지개를 켰다.

    “으으, 지루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창밖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일순 흥미로운 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는 곧 침실 한쪽에 놓인 서랍 앞으로 다가가 네모난 모양의 투명한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엔 자그마한 햄스터 한 마리가 톱밥 사이를 헤집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릇 안에 손을 넣어 작은 생명체를 조심히 감싸 쥐었다.

    “조용히 탐색이나 하러 가 볼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은밀했다. 마치 이른 아침 침실을 떠난 칼리프의 눈치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네 생각은 어때?”

    그는 햄스터를 올린 손바닥 위에 해바라기 씨를 하나 올려 주곤 친근하게 물었다. 마치 제 편이 되어 달라 뇌물이라도 바치는 모양새였다.

    귀여운 애완용 쥐는 해바라기 씨에 온 신경이 쏠린 것처럼 입 안에 채워 넣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그게 펠릭스에겐 기다리던 대답이 되어 주기라도 한 걸까?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햄스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나랑 생각이 같을 줄 알았어.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한다.”

    칼리프가 보았다면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

    “전하. 아침도 거르셨는데, 점심은 드셔야 해요. 어제 쓰러지기까지 하셨는데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뭐든 드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페일린.”

    간곡히 청을 올리던 페일린이 놀란 눈으로 침대 위의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기침 시간에 맞춰 침소를 찾은 이후 처음으로 들어 본 이벨리아의 목소리였다.

    페일린은 감격한 얼굴로 다급히 대답했다.

    “네! 네, 전하!”

    “……미안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하지만 돌아온 주인의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페일린은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하, 그럼 몇 숟갈만이라도 뜨세요. 그러고 나면 저도, 다른 시종들도 침실에 발을 들이지 않을게요.”

    “……나중에. 나중에 먹을게. 그러니까 이만 나가 줘. 부탁이야.”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건넨 청에도 이벨리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페일린은 고개를 떨군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번도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이 없는데, 이토록 단호하게 나온다면 어떻게도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페일린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은 채 침대 옆 협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전하. 준비한 식사는 여기에 둘 테니 혹시라도 마음이 달라지시면 꼭 한 숟갈이라도 챙기셔요. 따뜻한 식사가 생각나시면 지체 없이 저를 찾으시고요.”

    “응, 그럴게. 고마워, 페일린.”

    계속해서 한 박자 늦게 대답하던 이벨리아가 이번만큼은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묻어난 대목이었다.

    페일린은 하는 수 없이 등을 돌렸다. 곧 침실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이벨리아는 참았던 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부러 페일린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그녀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얼굴이 온통 엉망이었다.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두덩은 퉁퉁 부은 채였다.

    페일린이 봤다면 기겁했을 몰골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여닫으며 고개를 돌리자 협탁 위에 놓인 쟁반이 보였다. 제법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지만, 식욕은 돌지 않았다. 입맛은커녕 숟가락을 들 힘조차 없었다.

    이벨리아는 습관처럼 차오른 한숨을 다시금 내뱉었다. 그러곤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약 기운으로나마 잠을 청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벨리아는 지난 밤 역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유는 이번에도 리우리안이었다.

    [이벨리아.]

    […….]

    [그대를, 사랑해 볼까 해.]

    […….]

    [이런 나를,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도무지 믿을 수 없던 그의 말이 밤새도록 귓가에서 맴돌았다.

    “……사랑을, 해 보겠다고.”

    그 말을 하던 순간, 그는 사랑을 말하는 사람답지 않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사랑해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 그에겐 끔찍한 고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후 달라진 그의 태도 중 이해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었지만, 그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지난밤의 그였다.

    리우리안 페트로프에겐 이벨리아 캐롤라인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없었다.

    현 발체로페 제국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개의 세력 중 하나인 가넷 공작가가 그의 뒤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난 몇 년간 국혼을 통해 부부의 연을 맺었음에도 리우리안과의 거리를 단 한 발짝도 좁힐 수 없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이벨리아는 습관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과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면서도 그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냈다. 렐리아 영애와 부적절한 사이로 지내면서도 그의 명예엔 자그마한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앞으로라고 변하지 않을 터였다.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이자 막강한 세력의 가넷 공작가를 발밑에 둔 이상, 그를 끌어내릴 사람은 제국 내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가넷 공작가의 중심인 황후가 제 아들을 내치겠다고 작정한 게 아닌 이상, 리우리안에게 자신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황후의 사랑스러운 아들로, 렐리아의 다정한 애인으로 지낸다면 큰 문제 없이 차기 황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절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인 것일까.

    몇 번을 생각해도 리우리안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어쩌면 이것까지도 자신을 괴롭게 만들기 위한 질 나쁜 장난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지난밤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결연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만큼 거짓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

    이벨리아는 습관처럼 지난밤 리우리안이 서 있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끊임없이 그를 의심하면서도 그의 잔상을 좇는 꼴이라니. 모순적인 행동에 절로 비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가 않았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선 괜한 의미 부여도, 그에게 휘둘려 중심을 잃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자꾸만 흔들렸다.

    “하아…….”

    어느덧 턱 끝까지 차오른 한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이불이라도 다시 뒤집어써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선 계속해서 리우리안의 잔상을 좇을 것 같았으니까.

    이벨리아는 다시 자리에 눕기 위해 몸을 반쯤 돌렸다. 그때 예기치 않은 움직임이 그녀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곳에서 자그마한 움직임이 느껴졌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잘못 본 건가.”

    분명 무언가 움직인 것 같았는데.

    하지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시야에 걸리는 게 없었다.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금세 체념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기엔 리우리안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몸을 누이기 위해 베개의 위치를 정돈했다. 그런데 그때, 믿을 수 없는 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거침없이 파고들어 왔다.

    -이쪽도 멀쩡해 보이진 않네.

    이벨리아는 자리에 누우려던 것도 잊고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그녀의 시선이 박힌 자리엔 조그만 햄스터 한 마리가 그루밍을 하며 앉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