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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그대를, 사랑해 볼까 해 (15/94)


  • 15화. 그대를, 사랑해 볼까 해
    2023.06.15.


    “그래, 그랬지. 그대가 쓰러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

    “……계속 곁을 지키고 있었어.”

    사실을 고하는 칼리프의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둥둥, 거칠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고막을 세차게 울렸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닌데 칼리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벨리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1분 1초가 긴장이 되어 손끝까지 벌벌 떨렸다.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나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까. 제 마음 같은 건 끝끝내 심연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야 옳았던 것일까.

    두려움이라면 이미 몸서리쳐질 정도로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한 두려움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때 혼란에 휩싸인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요.”

    “…….”

    “이러지 않으셨잖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한 번도 이러신 적 없었잖아요.”

    두서없이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온통 물기로 가득했다. 그래서 칼리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청초하게 빛나는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온통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건 고통스럽게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오신 날 밤, 저를 찾아와 잘 지내보자고 말씀하신 것도, 조찬 자리에서 무작정 저를 데리고 나가신 것도, 렐리아 영애가 아닌 저와 승전 파티에 가겠다고 하신 것도……!”

    “…….”

    “전하께선 별 뜻 없이 하신 일일지 모르나, 저는 아니에요. 전하의 별거 아닌 행동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결국엔 지나친 망상인 것 같아 억지로 마음을 붙잡고 그렇게 또 실망을 하고, 하……!”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지난 며칠간의 일을 나열하던 그녀가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녀린 어깨가 거칠게 오르내리고 부르튼 입술이 위태롭게 떨렸다.

    칼리프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지나친 힘에 뼈마디가 부러질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고통이 그의 심장을 파고들기 시작했으니.

    [혹 내가 전장에서 죽기를 바란 건가.]

    [현명한 여인이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아무래도 나의 비는 나를 무심한 남편으로 만드는 거로 모자라, 자격 없는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신 것 같군.]

    지난날 제 의지로 직접 뱉었던 말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곧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제 심장에 고스란히 와 박혔다.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상처 주기를 자처한 건 자신이면서.

    그러니 이렇게 아파할 자격 따위는 없는 것이라고. 그 생각을 뼛속 깊이 새기고 또 새겼지만, 계속해서 심장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전하께서는 제게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언제나 제 존재를 부정하셨고, 절 폐위시킬 수 있는 날만을 기다리던 분이셨어요.”

    “…….”

    “어쩌면 지금 제가 하는 이런 말들이 그동안 전하께서 애타게 기다리시던 그 명분이 되어 드릴지도 모르겠죠. 그래도, 그래도…….”

    “…….”

    “그래도 이젠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이벨리아가 결연한 눈동자로 칼리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와 다른 생각 같은 건 추호도 할 수 없도록, 그를 꽁꽁 옭아매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건지 말씀해 주세요.”

    완벽한 요구였다.

    칼리프는 맞닿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늘 그녀를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였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제 손으로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장기가 뒤틀리는 것처럼 형언할 수 없이 괴로웠다.

    그래서 칼리프는 고민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감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가 힘들지 않길 바란다.”

    “…….”

    “나는, 그대가 이제 그만 편해지기를 바란다.”

    부디 지금 하는 이 선택이 당신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기를.

    “나는.”

    “…….”

    “나는 그대가 진심으로 행복해지길 바란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칼리프는 간절히 속삭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럼에도 이벨리아가 얼마나 혼란해하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불규칙해진 호흡 소리와 잘게 떠는 움직임까지.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모든 게 선명히 전해졌다.

    어쩌면 그것으로 막연히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비극의 순간이,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가와 있음을…….

    “……거짓말.”

    하…….

    칼리프의 잇새로 허탈한 숨이 새어 나왔다. 번쩍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일그러진 이벨리아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찼다.

    간절히 구원하고자 했는데, 조금도 구원받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그를 빈틈없이 집어삼켰다.

    “전하께선 오늘도 제가 아닌 렐리아 영애를 다정히 바라보셨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다독이셨고, 그녀를 위한 디저트까지 명하셨죠. 그 자리에…….”

    “…….”

    “……그 자리에 분명 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요.”

    칼리프는 쓰게 웃었다.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직접 행한 일이었고,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렐리아를 위한 게 아니었다.

    렐리아는 황후의 눈과 귀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치밀하지 못하고 단순하긴 하나, 그래서 더욱 위험한 인물이었다.

    언제든 황후를 찾아가 모든 걸 고해바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랬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이벨리아를 구하는 동시에 렐리아의 의심은 사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렐리아의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그것뿐이라.

    “황제 폐하께서 전하와 제게 만남을 청하셨다는 말은 진짜였나요?”

    “…….”

    “정말 그분이 저를 찾아서,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절 데리고 나오신 게 맞나요?”

    “…….”

    “제가 렐리아 영애와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으셨던 건 아니었나요?”

    이벨리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괴로운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맹목적인 불신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간의 리우리안 페트로프와 리우리안인 척했던 칼리프 드윗, 두 남자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게 그가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이유였다.

    불길한 예감이 또렷하게 밀려왔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이벨리아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말투까지 이 모든 건 빌어먹을 끔찍한 회귀가 목전까지 다가와 있음을 알리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칼리프는 입을 힘주어 다물었다. 턱이 불거지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안면 가득 떠올랐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그녀는 이번에도 기어이 제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는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일까.

    그런 거라면, 이번에도 그 개 같은 결과를 마주해야 하는 거라면…….

    “……하아.”

    그는 참았던 숨을 툭 내뱉었다.

    어차피 그래야만 하는 거라면 펠릭스의 말처럼 제 마음만이라도 전부 드러내 보고 싶었다.

    “그래. 그랬지. 그대가 렐리아 영애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끔찍하게도 싫었어.”

    “…….”

    “폐하께 만남을 청한 건 나였다. 적어도 오늘 정오에 약속했던 폐하와의 만남에서 그대의 자리는 없었어.”

    칼리프는 이전까지와는 달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그때마다 더욱 이지러지는 그녀의 표정에 두려움이 몰아닥쳤지만, 꿋꿋하게 견뎌 냈다.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제가 렐리아 영애에게 패악이라도 부릴까 봐 그러셨습니까? 아니요. 전하께서 절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오지 않으셨다면 상처를 받는 건 결국 제가 됐을 겁니다. 정말 모르셨나요? 그렇게 될 거란 걸, 정말 모르셨어요?”

    “아니. 알아서 그렇게 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봐야 결국 상처받게 되는 건 그대뿐이란 걸 잘 알아서.”

    “…….”

    “그게 끔찍이도 싫었다. 그래서 아버님의 핑계까지 대며 그대를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왔어.”

    거침없는 대답에 이벨리아의 잇새로 고통에 찬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은 여전히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도통 빠져나오지 못하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절망스럽게 울부짖었다.

    “왜요! 도대체 왜!!”

    “…….”

    “전하께선 절 미워하셨습니다. 전하께선 제게 늘 모질기만 하셨습니다. 그렇게 제풀에 제가 지쳐 나가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요. 이제 와서 왜……!”

    그녀는 거세게 밀려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역시나 나는…… 그대에게 고통밖엔 되지 못하는 건가.

    무능하게 고개를 떨군 칼리프가 슬프게 속삭였다.

    “행복을 바란다는 말조차 믿지 못하는 그대인데, 과연 이 말은 믿을 수 있을까.”

    믿지 못하겠지. 리우리안으로도, 칼리프로도 나는 그대에게 그저 혼란뿐일 테니까.

    “이벨리아.”

    “…….”

    “그대를, 사랑해 볼까 해.”

    “…….”

    “이런 나를,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담백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만큼은 조금도 담백하지 못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진심을 전한 남자의 마음은 생각만큼 후련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의 혼란을 걱정한 남자는 끝끝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고,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는 없었다.

    칼리프 드윗이 아닌 리우리안 페트로프로 고백하는 것이 그릇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혼란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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