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울피림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93/94)
93화 울피림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93/94)
93화 울피림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2023.09.01.
“황자님.”
저가 쓰러졌다고 했을 때의 보인 반응이나, 지금 제대로 시선을 못 맞추는 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 없으세요?”
데미안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데미안은 델리나의 질문에 모른 척했다. 옆에서 벨리온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데미안은 그저 침묵했다. 델리나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예전에 셀린과 만났을 때 셀린에게 뭔가 주시지 않으셨나요?”
그 말에 조금이지만 데미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델리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황자님이 주신 그것이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제 예상이 맞는지 궁금해요.”
데미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델리나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데미안에게 데카르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았기에.
“제대로 된 답을 주신다면 원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침묵을 깬 이는 의외로 벨리온이었다. 그의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봤다.
“황자님과 황녀님을 루넨 황제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
“광대의 말에 답하면 그렇게 해 드리지요.”
“……그 말, 믿어도 됩니까?”
“울피림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울피림의 이름까지 걸었으니, 그 말에 담긴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데미안 또한 잘 알 것이었다. 그러자 천천히 데미안의 입이 열렸다.
“……약병들입니다. 제가 대공녀에게 준 것은.”
약병.
델리나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델리나는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원했다.
“정확히 어떤 약들이었죠?”
“그것은 잘 모릅니다. 약이 든 상자를 전하라는 지시만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종류가 다양했던 것은 기억합니다.”
“……그럼 그 사람과 셀린의 관계는요? 그 둘의 아는 사이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아뇨. 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데카르와 셀린.
그 둘은 분명 서로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인연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얼추 예상하셨군요. 이번 독살 사건에 셀린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죽은 듯 쓰러진 저를 보고 놀라셨고요.”
데미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설마 영애를 노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렇죠. 루넨 황제가 저를 죽이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셀린이라면…… 저를 언젠가 노렸을지도 몰라요.”
사실 이번 사건에서 그녀가 저를 직접적으로 노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델리나는 똑똑히 봤다. 젠이 스카프를 찾았을 때, 잠깐이지만 일그러졌던 셀린의 얼굴을. 계속 셀린을 방해한다면 언젠가는 셀린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시 황자님 증언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게 많네요. 셀린이 독살 사건의 주모자라는 걸 밝히려면 우선 그 약을 썼다는 증거부터 찾아야 하는데…….”
“후각이 좋고 훈련이 잘되어 있는 개들을 풀어놔 보십시오.”
“개들을요?”
“대공녀가 쓴 약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르버네 영식의 사망 원인은 아마…… 일종의 각성제나 흥분제 탓일 겁니다. 그런 약들은 대개 향이 센 경우가 많고요. 그러면 개를 이용해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버려진 술병 같은 것을요.”
데미안이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하더니 이어 말했다.
“제가 대공녀에게 줬던 약들은 아마 약병 같은 데 있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방을 조사하게 되면 목걸이나 팔찌, 향수병 같은 걸 살펴보십시오. 아주 작은 빈 공간을 놓치지 마시고요. 그러면 분명 약이 어디선가 나올 겁니다.”
“……되게 잘 알고 계시네요.”
“루넨 제국에서는 그렇게 약을 찾습니다.”
데미안이 말을 마치자 벨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색대를 만들어야겠군.”
“바로 가시려고요?”
“그래야지.”
벨리온이 잠시 데미안을 힐끗 보다가 델리나에게 물었다.
“둘이서 더 할 말이 있나?”
“음……, 네.”
“그래.”
벨리온은 별다른 말 없이 방을 나갔다. 데미안이 조금 놀란 눈으로 벨리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는 황자님을 믿으시는 것 같아요. 저랑 황자님만 두고 나가시는 걸 보니까 말이에요.”
“그보다는 이제 나랑 메이린의 목숨이 자기 손에 달려 있으니까 그런 것 같은데.”
“에이, 설마요.”
벨리온이 사라지자 데미안이 한결 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잠시 웃던 델리나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제는 정말 루넨 제국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질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아. 나와 메이린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그 사람한테서만 벗어나기만 하면 돼.”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운데, 데미안은 메이린의 손을 잡고 버텼을 것이었다. 델리나 또한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대공녀한테 약을 전해 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영애가 쓰러지는 걸 보고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 내가 메이린을 살리기 위해 했던 일들이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있구나 하고……. 그걸 두 눈으로 보게 되니까 더 충격이기도 했고.”
“…….”
“그래서 나도 영애한테 사과하고 싶어.”
데미안의 진심 어린 사과에 델리나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네. 황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떤 마음이신지 충분히 이해했어요.”
“…….”
“아, 황자님, 설마 그 과정에서 저한테 반하신 건 아니죠? 그러면 안 되는데.”
“……진짜. 또 어디서 대공이 듣고 있을까 봐 뭐라고 말은 못 하겠고…….”
“알아요. 황자님 얼굴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농담 한번 한 거였어요.”
진심으로 난색을 표하는 데미안을 보며 델리나가 키득거렸다.
“혹시라도 헬리움 제국에서 살게 되시면, 그때는 좋은 여인을 소개시켜 드릴게요.”
“그거 좋지.”
만난 이래 처음으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 순간이었다. 데미안이 한결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작게 웃었다.
* * *
“델리나!”
의식을 되찾은 이후 델리나는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의사의 말대로 평소 키워 둔 체력이 있었기에 회복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황족 암살 미수 사건의 중요 인물로서 델리나는 여전히 황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델리나를 보러 온 이들이 있었다. 바로 에일리와 기드온이었다.
“너 정말……! 그때 그렇게 되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지금은 어때? 괜찮은 거야? 어디 이상한 데는 없고?”
에일리의 다급한 말에 델리나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그럼. 회복만 잘하면 된다고 했어.”
“진짜 다행이다, 다행이야……. 내가 너 그렇게 눈 감은 채 실려 가는 거 보고 얼마나 걱정 했는데…….”
테이블에 앉고서야 에일리는 당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건은 나도 얼추 전해 들었어. 그것 때문에 지금 자르버네 후작가는 거의 망했다고 봐야 해.”
“그 정도야?”
“당연하지. 다른 일도 아니고 황족 암살 미수인데. 게다가 죽은 자르버네 영식이 사업 때문에 불법 도박이랑 대출까지 손을 댔나 봐. 그것 때문에 채권자들이 후작가로 몰려와서 돈을 갚으라고 난리래. 하여간에 지금 후작가랑 독살 사건 때문에 사교계가 뒤집어졌다니까.”
생각만으로도 진이 빠지는지 에일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곧 그녀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리고 또 심상치 않게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뭔데?”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다들 엄청 불안해하고 있어.”
암만 황궁에서 쉬쉬한다 해도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아슈드가 군대를 이끌고 국경으로 향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소문은 점차 귀족들 사이에서도 퍼져 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황태손 전하가 그러시는 거야? 넌 혹시 알고 있어? 너 전하랑도 친분이 있잖아.”
“…….”
“하긴. 애초에 너 누워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니까, 너도 정신 차리자마자 놀랐겠다.”
델리나의 침묵에 에일리가 혼자 납득하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델리나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맞아. 그리고…… 혹시 몰라서 울피림 대공가도 국경으로 가기로 결정했어.”
요 며칠 벨리온을 보기 힘들었다. 출정 때문이었다. 벨리온은 황궁과 대공가를 오가며 국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델리나도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나도 따라가려고.”
“뭐? 국경에?”
따라간다는 델리나의 말에 에일리가 입을 쩍 벌렸다.
“그 말 진짜야?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 국경 분위기가 어떤지. 자칫 잘못하다가는…….”
“맞아. 전쟁이 날지도 몰라.”
델리나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가야만 했다. 가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창에 붉게 깜빡이고 있는 글자가 그를 말해 주고 있었다.
<흑막>
제국을 멸망시켰던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들 곁에는 셀린이 붙어 있다. 그들이 또 어떤 행보를 보일지 몰랐다.
“걱정 마. 나도 무턱대고 가는 건 아니니까. 떠날 때까지 열심히 몸도 회복하고, 필요한 것도 준비할 거야.”
비록 다섯 명 모두 흑막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델리나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직까지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을 보아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안 돼.”
그 때 기드온이 끼어들며 델리나의 말을 잘랐다. 방 안에 들어와서도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던 기드온은 누구보다도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가지 마.”